슙민국뷔 : 인어공주 이야기 (完)

[슙민/국뷔] 인어공주 이야기 10.

몽블랑11 2016. 11. 25. 19:03

[슙민/국뷔] 인어공주 이야기 10.





침대에 두 나신이 누웠다. 한 쪽은 벽을 보고, 한 쪽은 천장을 보고. 벽을 보고 누운 지민에게선 말이 없었다. 정국은 천천히 눈을 깜빡인다. 우리 왜 이렇게 됐을까. 더 나빠질 수 없었던 것들이 더 나빠져 감에 정국은 숨을 죽인 채 지민의 기척을 살핀다. 한 번 정신을 잃었던 지민을 뺨을 때려 깨워 다시 몰아붙인 터라 지민이 깨어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 지민이 긁히는 목소리로 정국의 이름을 부른다.



“전정국.”

“…….”

“대답해. 전정국.”

“…응.”

“다인이 보게 해줘.”

“…….”

“안 그러면… 기대해도 좋을 거야. 내가 무슨 짓을 할지.”

“…….”

“…….”

“형은.”

“…….”

“꼭 그렇게까지 해야 돼?”

“…….”

“날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뜨려야 해?



물을 수 없는 질문을 목 끝에 담고 정국은 지민의 하얀 등만 바라본다. 손을 내밀면 닿을 등이 그렇게 멀어 보일 수가 없었다.



*



태형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정국에게로 가 업무 보고를 마친 후 다인에게로 향한다. 다인과 지민을 감시, 보호하는 것. 그게 요 몇 주간 태형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다인은 제가 어디론가 납치되었고 윤기를 볼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옆에 태형이 있어 생각보다는 밝게 지내고 있었다. 원래부터 아이가 밝고 심지가 굳은 것도 물론 아이가 멀쩡한 이유 중 하나겠지만.



“다인아. 일어나자.”

“…으응, 선생니임.”



이불 속에서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양 팔을 벌려 자신을 안아 달라 손짓하는 아이는, 어린이집에서는 원래 이런 법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러는 이유는 윤기가 아침마다 안아줬거나, 아니면 여기서 마음 붙일 사람이 없어 그나마 아는 태형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중이거나 둘 중 하나겠다. 전자라 생각하면 상관이 없었지만 후자라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유야 어찌가 되었든 태형은 아이를 안아들었다.



품에 아이를 안자 아이가 어깨에 얼굴을 기대어 온다. 막 잠에서 깬 포근한 아기 냄새. 태형의 품에 얼굴을 묻고 다시 잠이 들려는 아이를 안고 방을 조금 돌아다니며 등을 토닥이다가 욕실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치카치카하고 어푸어푸하고 깨끗해지고 나오자.”

“으으응….”

“오늘은 지민이 삼촌 만나러 갈 거야.”



지민이라는 얘기에 눈을 비비던 다인이 배시시 웃는다.



“삼촌 만나요?”

“응. 그러니까 씻고 오자.”

“네.”



아이가 씻는 걸 지켜봐 준 태형이 아직은 서툰 손길로 아이의 머리를 빗기고 옷을 입혔다. 탁자에 앉아 아이와 함께 토스트를 먹은 태형이 아이의 입술에 묻은 우유 거품을 손가락으로 닦아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지민의 방에 아이를 데려다 줄 시간이었다.



며칠 간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아이였기에 태형의 손을 잡고 걷는 복도가 낯선 모양이다. 태형을 향해 허리 굽혀 인사하는 남자들도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데굴데굴 큰 눈을 굴리며 태형에게 바싹 붙어 걷는 다인의 손을 잼잼하듯 잡으니 아이가 저를 쳐다본다. 그런 다인의 눈을 맞추며 괜찮아, 하고 웃어 안심시키며 태형은 지민의 방에 다다랐다.



다인을 만난 지민은 자신에게 달려오는 아이를 품에 안는다. 지민이 아무 말 않고 꽉 안고만 있자 아이가 불안해졌는지 어두워진 표정으로 지민에게 ‘삼촌….’ 하고 울먹인다. 그래도 울지 않고 지민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확인하는 다인에 지민이 배시시 웃는다. 삼촌 여기 있어, 하고.



“삼촌 아직 아파?”

“응?”

“감기.”



그러고 보니 다인이 자신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감기에 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으니 다인이 감기를 걱정할 만도 했다.



“이제 안 아파.”

“열 안 나?”

“응.”

“다행이다. 아빠가 삼촌이 아프면 우리가 옆에 있어줘야 한댔어.”

“…….”

“그런데 삼촌 옆에 못 있어주니까 아프면 안 돼.”



윤기. 지민은 그리운 그 이름에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꾹 누른다. 꽉 막힌 목에 마른침을 삼켜 봐도 이번엔 삼켜내기가 힘들었다. 이렇게나 망가져 버린 후에 들어버린 윤기의 이름은 성역과도 같아서 듣는 것만으로 그리움도, 죄책감도 들게 했다. 자신을 구해줄 사람은 그뿐이라서, 열이 오른 이마에 닿던 서늘하고 큰 손을 자신도 모르게 떠올리다 울어버린 순간도 있었다. 혼자 깊어지는 마음이 안타까워 그만하라고 가슴을 쳤지만, 그렇다고 멈춰지지는 않았다. 지민은 궁금했다. 과연 윤기도 한 번 더 자신을 가엾이 여겨줄까. 아니, 한 번 더 만날 수는 있을까.



“형사님 보고 싶다.”

“응?”

“아빠.”

“…….”



다인은 말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문 아이의 표정이 이상해서 지민이 ‘다인아?’ 하고 묻는다.



“아빠 보고 싶은데 볼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보고 싶다고 말 안 할래.”

“…….”



다인은 작은 주먹을 꼭 쥐고 지민을 바라본다. 아이가 입술을 앙다물어도 눈망울에 차오르는 눈물이 선명하게 보여 아이와 눈을 맞추던 지민은 가슴이 무너졌다.



“그런데 삼촌, 나 사실으은… 아빠 보고 싶어.”

“…….”

“아빠, 으흐… 아빠, 흐끅, 보고 싶어… 흐아아….”



아이가 얼굴이 무너지며 울기 시작한다. 저도 눈물을 숨길 수 없는 주제에, 지민은 아이를 품에 안고 아이와 아픈 가슴을 맞대고 토닥이기 시작했다. 지금껏 다인을 울릴까봐 태형이 꺼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민은 다인을 보고서까지 그리움을 숨길 수는 없었다. 지민의 눈에서도 숨길 수 없는 눈물이 흐른다. 서로 비슷하지만 다른 색의 그리움을 안고, 지민과 다인은 한참을 안고 서로 울었다.



*



“박지민이 울었다고요.”



지민과 다인이 만났던 것을 보고 받는 정국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예, 하고 대답하는 태형의 목소리에 정국이 허탈한 얼굴을 한다.



“울고 자시고 할 정도로나 만난 사인가, 민윤기 씨랑.”

“…….”

“…하아….”



의자에 앉아 살짝 미간에 주름을 잡고 눈을 감은 정국이 잠시 간 말이 없다. 태형이 비껴본 정국의 얼굴엔 허공을 바라보는 시선 아래로 씁쓸한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동화 있잖아요. 애들 보는, 그런 동화.”

“…예.”

“항상 공주가 있으면 왕자가 있고 마녀나 괴물이 있죠.”

“그렇습니다.”

“왕자는 항상 공주를 구해주는 존재니까 나는 항상 왕자가 되고 싶었단 말이에요.”

“…….”

“그런데 지금 이 상황 이상하지 않아요? 내가…, 내가 괴물이 된 것 같잖아. 내가 공주와 왕자를 못 만나게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지 않아요?”



믿기지 않는다는 말투로 정국이 태형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날카로워진 듯한 정국의 표정은 역설적이게도 그렇기에 더 애처로워 보인다. 그 이중적인 표정으로 정국이 태형과 눈을 맞추며 물었다.



“…아니죠.”

“…….”

“말해 봐요. 내가 괴물인지.”

“이사님.”

“당신이 보기에도 내가 괴물 같은지 말해 보라고.”

“…아닙니다.”



태형이 대답했지만 정국은 태형의 대답을 들어도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혼자 자신이 괴물 같은지 아닌지를 생각해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 이미 결론이 났을지도 몰랐다. 이사님, 하고 태형이 부르자 정국은 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은 태형더러 나가라는 듯 내젓는다. 태형은 인사를 한 채 정국의 사무실을 나섰다.



조용히 문을 닫은 태형은 무표정이었다.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긴 복도를 지나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태형은 사무실 문을 닫고 창문의 모든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리고 오롯이 사무실 안에 혼자가 되었을 때에야, 태형은 천천히 한숨을 내쉰다.



지금까지 정국이 태형에게 제 감정에 대해 내뱉은 적은 없었다. 그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왔을 뿐이다. 그 모든 것은 지민을 향한 그만의 방식이었고, 그것에 대해 한 번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지금까지 지민이 누군가에게 관심을 두어본 적이 없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지민이 누군가가 보고 싶다고 눈물을 보인 건 처음이라서, 정국은 조금 불안해진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그런 그를 지켜보기가 힘들어지는 자신이었다.



정국이 지민을 억지로 안던 날, 우는 그의 모습은 태형에겐 충격 그 자체였다. 지민을 향한 정국의 마음을 소유욕, 혹은 집착이라고만 정의하고 있던 태형에게 정국이 눈물을 흘린다는 건, 그만큼 정국이 지민에 대한 마음이 깊다는 반증밖에는 되지 않았다. 차라리 소유욕이나 집착이라면, 그래서 지민을 곁에 두어 정국이 힘들어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그걸로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국은 그게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지민의 마음을 얻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푸후….”



눈을 감고 책상에 엎드린 태형의 입에서 한숨 같은 웃음이 터진다. 자조였다. 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의 마음을 얻기란 굉장히 힘들다는 걸. 제가 몇 년을 정국의 곁에 서 있는데 제가 있는 줄도 모르는 정국도 있지 않은가. 자신을 그저 충성스러운 개쯤으로 여기는 듯한 정국인데, 그가 지민의 마음을 얻으려 하는 걸… 자신은 곁에서 지켜볼 수 있을까. 오롯이 정국을 도와줄 수 있을까. 마음을 누를 수 있을까, 지금처럼.



가슴이 답답해진 태형이 차 키를 들고 빌딩 밖으로 나선다. 달도 중천에 뜬 한밤중, 태형이 차를 달려 몰고 나간 곳은 석진의 병원이었다. 그러나 태형은 석진의 사무실 대신 다른 사람의 병실을 열고 들어간다.



“…어, 또 오셨네요.”



책을 읽던 남준이 고개를 든다. 편하게 태형을 맞이하는 남준과 달리 태형은 그런 남준에게 어색한 미소로 인사한다. 본인도 남준과 자신이 나란히 앉아 이야기하거나 할 사이는 아니란 걸 알면서도, 남준은 자신을 전혀 몰랐기에 오히려 같이 있기 더 편했다. 모두 태형을 알고 태형에게 기대하는 게 있었지만, 남준은 아니었다. 태형이 누군지 모르고 그저 병원 복도에서 처음 만나 이야기해 본 사람, 그 후로 자신의 병실에 가끔 놀러왔던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조용히 문을 닫고 들어온 태형에게 남준은 제 발치의 침대를 양보한다.



“앉으세요.”



타박타박 걸어와 침대에 앉는 태형을 지켜본 남준이 태형이 우울하다는 걸 알아챘는지 몸을 기울여 그의 표정을 관찰한다. 태형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얕은 한숨과 잘 올라가지 못하는 입꼬리.



“어…. 혹시 지금 기분이 별로예요?”

“…그런 것 같아.”

“그럼 나 어떡할까요?”



몇 번 오지 않았지만 남준과 짧게 대화를 하다 나가는 태형이었기에 남준은 읽던 책을 덮고 있었다. 아직 손가락을 읽던 페이지에 끼운 채로 남준은 제 책을 가리키며 ‘조용한 게 좋으면 나 그냥 책 읽으려고요.’ 하고 묻는다. 그러자 태형이 침대에 상체를 눕히며 ‘책 재밌어?’ 하고 물었다. 그러자 남준이 개구지게 웃는다.



“전 여기에만 있으니까 세상 모든 게 다 재밌죠.”

“그럼 내 얘기도 재미있나 들어볼래?”



태형이 남준을 향해 빙긋 웃는다. 그러자 남준은 푸후, 하고 웃으며 이내 책을 덮어버렸다. 남준은 그러고도 제 팔을 베고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태형의 입술이 열릴 때까지 기다린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지금 그쪽 얘기예요?”

“그냥. 그냥 어떤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어.”



태형이 꺼낼 말은 대화라기보다 독백에 가까웠다. 남준은 태형과 눈을 맞추진 않았지만 그에게 시선을 둔 채, 가만히 앉아 태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준다.



“왕자와 공주가 있고, 그 둘 사이를 갈라놓는 괴물들이 만드는 이야기에서 이 사람은 괴물을 기다렸어. 그 사람이 괴물이 되기 전부터 이 사람은 괴물을 바라봐 왔지. 그 사람이 괴물이 아니라 믿었고 또 두 사람이 다른 동화의 왕자와 공주이길 바랐지만, 그럴 수 없었어. 괴물과 괴물을 기다리는 사람은 악당이었거든.”

“…….”

“괴물은 공주만을 원해. 그래서 힘으로 가둬두지. 그리고 왕자를 두려워 해. 언젠가 공주를 구해주고 제 품으로 데려갈까봐. 사실 괴물은 왕자가 되고 싶어 해.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왕자가 될 수 있는지를 몰라.”

“……”

“사실, 괴물은 공주야. 공주라는 왕자가 구해줄 수 있는. 강해보이고 나빠 보여서 아무도 모르지만, 사실은 약한 공주야. 구해줘야 하는 존재인 걸, 곁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알아.”

“…….”

“그래서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힘들어 해. 자신은 공주도 왕자도 괴물도 아니고, 그냥…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서. 그저 초라하게 곁에서 기다릴 뿐이니까. 이 사람이 괴물을 구해줄 수는 없는 거야. 동화 속엔 없는 얘기잖아, 그런 거. 아무도 그런 사람 얘기엔 관심이 없지. 곁에서 괴물을 지키다 사라지는 거, 그게 그런 존재의 운명이고 숙명이니까.”



낮은 태형의 목소리가 조근조근 병실을 채운다. 남준은 태형이 과연 이들 중 누구일까 생각한다. 읊조리듯 아무 일 아닌 듯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분명 이 중에 태형이 있다. 그게 누군지 알 것 같았지만 남준은 모르는 척 ‘동화작가가 꿈이에요?’ 하고 묻는다. 그러자 태형이 푸스스 웃으며 ‘애들이 읽을까?’ 하고 물었다.



“해피엔딩이면 좋겠네요.”



해피엔딩. 남준의 말을 조그맣게 따라한 태형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



+)

제목을 만들게 된 비유

사실 이 글의 인어공주는 한 명이 아니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