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뷔] 늦게 피는 꽃 02.
[국뷔] 늦게 피는 꽃 02.
w.몽블랑
*
다음 날부터는 궁중의 예법 강의가 이어졌다. 태형은 태황태후의 명으로 얼굴에 쓰인 붉은 천을 벗지도 못한 채 그들의 강의를 들어야 했다. 그들의 강의 방식은 혹독했다. 태형과 예법을 가르치는 선생, 그 공간엔 언제나 단 둘이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태형은 가르친 것을 하나라도 틀릴 시엔 매질을 당했다.
이번도 그랬다. 하루 종일 높은 사람에 대한 절을 배우고 반복해서 절을 했던 태형은 이제 자신이 오늘 몇 번째 절을 하는 것인지도 셀 수가 없었다. 그저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일어서지도 앉지도 못할 즈음, 절을 끝내고 힘이 풀려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주저앉자 굵지도 크지도 않은 매가 찰싹, 하고 날아와 땀에 젖은 허벅지에 착 감겼다. 상처 위에 새로 터진 상처에 태형이 고통스러워 짧게 윽, 소리를 내면 예법 선생의 입에서 바른 말이 쏟아졌다.
“그렇게 비뚤게 하시면 안 됩니다, 마마. 다시 해 보시지요.”
붉은 시야는 어지러웠고 의식은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태형은 제 몸과 머리가 분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제 자신은 무엇을 위해 18년이라는 시간을 세상과 분리되어 살았던 것일까. 그 와중에 정신을 다잡지 못한 몸이 또 다시 무너졌다. 찰싹, 하고 어깻죽지를 내리치는 매가 태형의 몸을 따라 달라붙으며 유연하게 휘어졌다.
*
남준은 태형을 데리러 그가 강의를 받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실내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없는 것이 강의가 끝난 것 같은데, 태형이 보이지 않았다. 남준은 태형을 부르며 건물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의 모습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강의가 일찍 끝나셨는가. 혹시 먼저 가셨나? 생각도 해보았지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태형이라 남준은 강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마마.”
조용했다. 강의실 안쪽에 열기가 남아있는 것이 방금 전까지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던 건가, 하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안쪽 강의실 한 중간에 익숙한 작은 몸이 옆으로 쓰러져 있는 것이 남준의 시야로 들어왔다.
“…마마…!”
그는 급하게 뛰어가 태형을 살폈다. 그의 얼굴 위로 붉은 천이 아무렇게나 덮여 있었다. 가린 천을 남준이 손으로 다 치워버리자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눈을 다 감지도 못한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동그란 이마에 맺힌 식은땀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땀에 젖어 옷이 달라붙은 상태였다. 남준은 조심스레 제 손을 태형의 이마에 올렸다. 열이 오르고 있었다. 볼까지 붉게 달아오른 것이 예사 열이 아니었다.
남준은 빨리 태형을 만화전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에 그의 등과 무릎 밑으로 손을 넣어 안아올리려 했다. 그런데 남준이 태형의 등 뒤로 손을 넣자 태형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입에서 신음을 쏟아냈다.
“아윽….”
“아프십니까? 마마, 어디가 아프신 겁니까?”
“ㄷ… 등이… 아프…ㅂ…니다….”
태형이 간신히 완성해 뱉어낸 말에 남준은 태형의 등을 살펴보았다.
“…어떻게… 어떻게 사람을 이런….”
숱한 상처들 위로 피가 터져 등은 여린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거기에 옷이 붙어 옷과 상처가 쓸리고 붙었다 떨어질 때마다 태형이 신음을 흘렸다. 등뿐만이 아니라 허벅지와 엉덩이, 종아리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러했다. 이래서야 태형을 안아올릴 방법이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남준은 제 겉옷을 벗었다. 조금 두께감이 있는 옷이니 그것으로 태형을 감싸고 그 후에 안아올리면 조금 덜 아플까 싶어 남준은 제 옷으로 작은 태형의 몸을 감싼 뒤 다시 안아올렸다.
“흐읍….”
여전히 아픈 듯 신음을 삼키는 태형이 품에 안겼다. 그 몸집이 너무나 조그마해서 남준은 가슴이 쓰렸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빨리 만화전으로 옮겨 드리겠습니다. 하는 남준의 말에 태형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의 주먹이 꽉 쥐어져 있는 게 아직도 아픈 것을 참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남준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
어의를 부를 수 없다 했다. 아직 태형은 궁의 사람도 뭣도 아니니 어의에게 보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럼 어쩌라는 겁니까!, 하는 남준의 말에 환관은 밖에서 의원을 불러와야 한다고 했다. 그러다가 멈춰서는 ‘아직 태자전하께서 붉은 천도 넘겨주시지 않은 아이 아닌가. 남에게 함부로 몸을 보여선 안 될 아이일 텐데.’ 하고는 의원조차 보이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는 투로 말했다.
얼마나 아파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답답함에 소리를 지르고 싶었던 남준은 이를 악물어 제 성질을 꾹꾹 눌렀다. 그럼, 해열제와 고약이라도 주십시오. 본인이라도 바르고 나을 수 있게. 하는 남준의 말에서 뭘 느꼈는지, 환관은 조그마한 약통 두 개를 빠르게 가져다주었다.
문제는 약을 가져온 남준마저도 그랬다는 것이었다. 태형을 건드릴 수가 없었다. 상처부위는 등과 엉덩이, 허벅지의 상처가 거의 전부였다. 옷을 벗기지 않고서 상처를 만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 아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태자의 것이었다. 태자가 손을 대기 전 다른 누군가의 손을 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남준은 태형의 상처에 들러붙은 옷 하나 벗겨 줄 수 없었다. 상처를 깨끗하게 닦아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리 할 수가 없었다.
대신 해열제를 물에 갠 뒤 태형의 입에 조금씩 흘려 넣기 시작했다. 이제 아픔에 축 늘어진 젖은 몸은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어디가 아프단 말도, 신음도 나지 않았다. 단지 열에 들떠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이 태형의 숨이 끊기지 않았음을 알렸다. 남준은 씁쓸한 얼굴로 태형의 입가에 흐른 약을 손으로 대충 닦아냈다.
예법 선생은 왜 이렇게까지 호되게 매질을 했으며, 왜 이런 아이를 혼자 두고 가버린 걸까. 많이 아파했을 텐데. 그러다 남준은 생각했다. 예법 선생이… 누구였더라. 태형의 강의 앞뒤로 얼핏 본 이는 예부상서 김익준, 그는 분명 태황태후의 사람이었다.
그럼 이 모든 게, 태황태후의 기세 선점을 위한 행동이란 말인가. 이 여린 사람의 기를 제압해서 어쩌겠다고. 하는 생각을 하던 남준은 이내 그것이 아님을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었다. 태형을 기선 제압하려는 것이 아니라, 태자를 누르고 싶었던 것이다. 태자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결국 강자들의 기싸움 사이에서 중간에 피를 보고 있는 건 약하디 약한 태형이었다.
“…너도 참 기구하구나….”
남준은 침대에 옆으로 뉘여 놓은 태형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가에서 있을 때 보았던 그 조용하고 외롭고 조그마한 아이는, 궁에 들어와 더 외롭고 더 고통스러워졌다. 태형에겐 차라리 그 좁은 집에 갇힌 시기로 돌아가는 것이 나을까. 남준은 태형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언젠가는.
*
“태자전하. 저 남준입니다.”
“…들어라.”
남준이 대전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태자는 보고 있던 두루마리에서 눈을 떼었다. 천천히 감겼다 뜨이는 태자의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는 늦은 시간을 증명하듯 충혈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시간이 늦은 만큼 밤늦은 남준의 방문에 의아한 것은 태자였다.
“무슨 일인가, 이 시간에.”
“아직까지 정무를 보시고 계십니까.”
“지금 몇 시나 되었는가.”
“축시가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곧 자러 가야겠네. 그런데 자네야말로 이 시간엔 무슨 일인가.”
남준은 서 있던 자세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태자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뭐하는 건가.”
“…만화전 마마를 살려주십시오, 태자전하.”
“만화전 마마라면,”
태황태후가 데려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가장 작은 궁에 처박아 놓고 아직 얼굴도 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살려달라는 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궁 내부에서 아주 소수만이 그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며, 심지어 지금은 그가 어떤 활동도 하지 않고 궁에 들어올 준비만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남준이 이렇게 와서 그를 살려달라고 빌 만한 이유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태자는 무언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뭔가, 자신의 것을 누군가 건든 듯한 더러운 느낌.
“지금은 예법 강의를 받고 있는 줄 아는데, 내가 그이를 살려줄 만큼의 큰일이 그에게 일어났다던가.”
“예법 강의를 맡고 계신 것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전하.”
그것에 대해 태자는 관심이 없었다. 예부의 관리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랬다. 그런데 남준이 물으니 그게 궁금하긴 했다.
“그래, 누구인가.”
“예부상서 김익준입니다. 그가 누구의 사람인지는 전하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그래서.”
“오늘 가보니 만화전 마마께서 호되게 매질을 당하셔서 강의실 안쪽에 쓰러져 계셨습니다. 어느 한 군데 안 맞은 곳 없이 온몸이 매질을 당해서 상처가 터져 있었습니다.”
태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태자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숨이 끊어졌는가.”
“…아닙니다.”
“그럼, 숨이 끊어질 것 같은가.”
태자의 질문에 남준의 숨이 막혔다. 마치, 그가 숨이 끊어지길 바라는 듯한 태자의 표정과 말투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남준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터졌다.
“태자전하, 저는 지금 만화전 마마를 살려 달라 청하러 온 것입니다. 제발 마마께 승은을…!”
“내가 자네에게 묻겠다.”
“…….”
“내가 왜, 그 사람을 신경 써야 하지?”
“전하, 그 아이는,”
“태황태후께서 나를 견제하려고 데려온 사람을, 내가 굳이 신경 써줄 필요가 있는 건가.”
자신과는 상반되는 태자의 싸늘한 말투에 남준은 입이 굳었다.
“내가 그를 신경 쓰기 시작하면 태황태후께서 그 아이를 빌미로 내 이것저것을 흔들려고 할 텐데. 자네라고 모를 바 아니라고 알고 있네만.”
“…….”
“그 아이의 명줄이 어디까지인지 몰라도 하루 빨리 끊기는 게 그 아이에게도 내게도 편할 일일 텐데. 아니면 아예 궁에 대해 모르는 채 그 구석에서 살다가 죽는 것이 더 편할 거고.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을 텐데 자넨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만화전의 일을 내 앞에서 입에 올리고 있군.”
“…….”
“앞으로 입조심하게. 궁 안은 혼란하고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변할 수 있어. 자네도 몸을 사리는 게 좋을 거야.”
태자의 말이 조금도 틀린 곳이 없어서 남준은 할 말을 잃었다. 태형이 아파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잘못된 사람에게 청을 했을지도 몰랐다. 특히 태자는 더더욱 그랬다. 생각이 짧았을지도 모른다.
명… 받들겠습니다. 두 손을 모아 태자에게 인사를 한 남준은 다시 한 번 더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고 뒤를 돌아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리고 하나 더.”
태자의 목소리에 남준이 발걸음을 멈췄다. 등 뒤에서 피곤한 듯 하면서도 분명히 예리한 날을 세운 태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번 더 만화전을 ‘그 아이’라고 부르면 그땐 자네도 무사하지 못할 줄 알게.”
남준은 몸을 돌려 태자에게 고개를 깊게 숙였다. ‘송구합니다, 전하. 앞으로는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태자는 그런 그를 날카로운 눈으로 응시할 뿐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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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고없이 올립니다. 야금야금 수정 예정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