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뷔] 늦게 피는 꽃 08.
[국뷔] 늦게 피는 꽃 08.
w.몽블랑
*
연습을 하던 정국이 옆돌기를 하려던 차였다. 땅을 짚은 팔에 순간적으로 힘이 풀리며 팔이 꺾였다. 자칫하면 머리부터 땅에 닿으며 목까지 꺾일 판이었다. 놀라면서도 빠르게 머리와 어깨를 둥글려 앞으로 구른 정국이 숨을 고르며 식은땀을 닦았다.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 했다.
그러자 합을 맞추며 옆에서 그 꼴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 있던 순정이 제 동작을 그만두고 정국을 향해 걸어왔다. 순정은 첫 연회 때 정국과 함께 춤을 췄던 무희였는데, 나이는 정국보다 두 살 어린 것이 정국을 향해 혀를 쯧쯧 차댔다.
“그따위로 할 거면 관둬라, 관둬. 응? 죽고 싶어서 정신 놓고 연습을 해? 조금 있으면 저승 갈 날 잡겠네, 아주. 그러다 목 꺾이면 어쩔 뻔 했어? 하마터면 송장 치울 뻔 했어. 알아?”
“하이씨이….”
정국이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순정의 말이 틀린 곳이 하나도 없어 반박할 수도 없어서 더 짜증이 치솟았다. 안 그래도 찔끔찔끔 틀릴 때마다 저를 향하던 꼭두쇠의 눈치가 보이던 참이었는데, 아예 대놓고 실수를 해버리니 변명할 여지조차 없었다.
“너 오늘 진짜 왜 그래?”
순정이 아예 옆자리에 붙어 앉아 물었다. 정국의 긴 속눈썹이 눈동자를 반쯤 가린 채 우울해 보였다. 왜 그러냐 묻는 순정에게 무엇 때문이라 정확히 말할 수가 없었다. 하도 여러 가지가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이 되어 정국을 괴롭혔다. 정국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가 입을 딱 다문 채 마른세수를 했다. 정국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곤 한숨뿐, 정작 말이 없자 순정은 ‘…정리 잘 해. 오늘은 그만 들어가고.’ 하며 정국의 어깨를 쳐주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하아, 진짜….”
어딜 가야 이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태형을 볼 수 있게 되어 뛸 듯이 기뻤던 게 불과 얼마 전이었는데, 이제 태형의 얼굴을 보면 참을 수 없이 괴로울 것 같았다. 전날에 보았던 태형의 다른 모습이, 그 숨결이, 그 소리가 계속해서 정국을 맴돌았다. 그 잔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태형을 안고 있는 사람은 정국도 연회에서 본 적 있는 사람이었다. 용이 그려진 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며, 어쩌면 유일했다. 이 나라의 태자. 나라 안의 누구보다도 존귀한 이였다. 그리고 자신은, 한낱 남사당패거리의 예인일 뿐. 춤을 잘 춘들, 연기를 잘 한들, 노래를 잘 부른들, 태자에 댈 수도 없을 만큼 참으로 하잘 것 없는 존재였다.
“…….”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이 정국의 하루를 멍하니 흘러갔다.
*
여느 때처럼 숨어든 만화전은 여느 때와 같이 조용했다. 정국은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곳임을 알면서도, 항상 정문이 아닌 뒷마당의 담을 타고 넘었다.
벌써 달은 중천이었다. 사실 정국은 오늘도 만화전에 오지 않으려 했다. 어제도 오지 않았고, 그제도 오지 않았다. 태형을 보지 않아야 잔뜩 어지럽혀진 제 마음이 가라앉을 줄 알았는데, 어째서인지 시간이 갈수록 쌓여만 가는 그리움과 태형을 볼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조급함이 제 속을 더 휘저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과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싸우다가, 한참을 망설이고 망설이다 찾아오니 시간이 어느 새 밤의 한중간을 달리고 있었다.
정국은 제 발걸음이 평소 같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터벅터벅 걷는 소리가 제 귀에도 들렸다.
뒷문 앞에 도착했을 때, 정국은 문득 제자리에 멈춰 섰다. 태형을 보고 싶은 마음과 여전히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부딪쳐 제 마음속에서 요동쳤다. 정국은 손잡이를 차마 잡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과연 이 문을 열었을 때 태형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자신은 태형에게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무슨 말을 할까. 태형은 무슨 말을 할까. 망설이던 찰나였다.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문 안엔 태형이 있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잠은커녕 졸지도 않은 듯 눈빛이 형형했다. 당황한 정국을 앞에 두고, 태형은 무언가에 화가 난 것 같았다.
“왜 안 들어와.”
태형이 따지듯 물었다. 정국은 말을 잃었다.
“왜, 왜… 왜 안 들어오는데.”
“…….”
“왜 어제도 그제도 안 오고.”
“…….”
“내가, …이제 싫어졌어?”
정국을 바라보는 태형의 눈동자가 끝내 울먹거렸다. 정국을 원망스레 쳐다보면서도, 눈물은 흘리기 싫은 듯 제 소매로 거세게 눈을 훔쳐냈다. 그러나 터지는 눈물을 다 닦아내지 못하고 끝끝내는 주르륵 볼을 타고 흘려내고 말았다. 태형은 끅끅거리고 울음을 누르며 제 할 말을 정국에게 쏟아냈다.
“그날 왔던 거지…. 본 거지…? 태자전하를… 나를…. 그래서 이제 오지 않으려고 했던 거지? 이제 내가, 싫어져서… 내가 미워져서, 보기 싫어서…. 내가, 흑, 내, 내가 더러, 워서….”
“…….”
“정국아… 흐읍, 정국아….”
차마 정국에게 먼저 다가오지도 못한 채, 제자리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제 이름만 부르는 태형을 정국은, 마음이 아려와 더 지켜볼 수가 없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제게 무슨 힘이 있을까. 찾아오지 않은 제가 잘못이었다. 정국은 울먹이는 태형을 품에 안았다. 스르륵 품에 안기는 태형은 그 체온이 더 서러운 듯 정국의 가슴에 못다 터뜨린 울음을 토해냈다. 정국은 태형의 울음소리가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좋아할 줄은 제 자신도 몰랐던 탓에, 정국은 모든 사념거리를 날리고 새하얗게 백지화 되어가는 머릿속을 막을 수가 없었다.
“흐으, 흐아아…. 흐읍, 끕, …흐윽….”
“…하아….”
내가 감히 너를 보지 않으려하다니. 어떻게 됐었나봐. 하고 생각하며 태형의 결좋은 머리를 쓰다듬던 정국은, 또 다른 생각에 한숨 끝에 체념의 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이제 다른 생각은 하나도 안 나고 너밖에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내가 어떻게 됐나봐. …큰일 났다. 이제 네가 없는 궁 밖에서 어찌 살아가지.
*
그렇게 한참을 울던 태형은, 울다 지친 듯 만화전 내로 들어와서는 침상에 앉아 안 그래도 퉁퉁 부은 눈이 감기는 것을 억지로 막으려 용을 쓰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눈이 감기고 고개가 떨어지는 것을 막지 못하고 뚝 떨어졌다가, 정국이 불편하지 않게 제대로 눕혀주려고 하면 벌떡 깨어나서는 정국의 소매를 꼭 붙들고 가지 못하게 했다.
그것도 몇 번이겠지 싶은 정국은 결국 태형이 잠에 들 때까지 천천히 기다렸다. 태형은 차츰 차츰 자세를 낮추더니, 정국의 예상과 다르지 않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를 내며 정국의 허벅지 위로 상체가 엎어진 채 잠이 들었다. 정국은 그런 태형의 등을 반복적으로 토닥였다. 고개를 숙여 태형이 곤히 잠든 것을 확인한 정국의 입에서 버릇처럼 한숨이 흘렀다.
태자가 왔다간 후 찾아오지 않는 자신을, 이 외롭고 시린 궁에 혼자 남아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기다렸을 태형이었다. 자신을 기다리느라 지난 사흘은 잠을 설쳤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렇듯 세상모르고 잠이 들었을 테다.
정국은 조심스레 태형의 밑에서 몸을 뺐다. 고른 숨소리가 흐트러질세라 귀를 기울이며 천천히 태형을 침상 위에 편하게 눕히고 그 위에 따뜻한 이불을 덮었다. 깊이 잠이 든 태형의 얼굴이 평화로워 정국은 침대 밑에 앉아 이불에 턱을 괴고 태형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예뻐서 어떡해….”
정국은 태형의 이마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리된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춘 정국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돌려 만화전을 벗어났다. 얼마 후 있을 3주차의 연회가 끝나면, 자신과 태형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일주일뿐이었다.
*
3주차의 연회는 궁에서 일하는 궁인들과 환관들을 위한 자리였다. 귀한 이들을 상사로 모시는 그들을 위해 꼭두쇠는 무언가 웃을 거리가 많은 가면극을 하기로 하고, 사람들과 어떤 공연을 준비할지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 관리가 꼭두쇠를 만나 이야기하고 싶다며 그들의 천막을 찾아왔다. 무동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꼭두쇠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던 터라 급하게 나갔다가 그의 배에 새겨져 있는 자수를 보고 넙죽 엎드렸다.
‘높으신 분이 어찌하여 이런 곳까지…!’
‘일어나게. 오늘은 중한 이야기를 하러 왔으니.’
꼭두쇠는 그가 누군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흉배에 새겨진 짐승과 그 마릿수가 여간한 자리가 아니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꼭두쇠는 그를 거절할 힘이 없었다. 꼭두쇠가 절을 하는 것을 빠르게 일으킨 그는 자리를 옮겨 사람이 없는 외진 곳으로 꼭두쇠를 데려갔다. 그리고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비밀스럽고도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 공연에 서태후 이야기를 하게.’
‘서태후…라면, …중국의 서태후를 말하는 겁니까?’
‘그러하다. 꼭, 서태후의 수렴청정 장면을 넣어야 하네. 동치제의 죽음까지 싹, 다.’
꼭두쇠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서태후는 자신의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아들의 죽음마저 방관한 것으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었다. 현재 태황태후가 태자의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상황에, 심지어 태황태후와 태자가 선대의 일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마당에, 그런 것을 극에 올렸다간 목이 성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사실 죽으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꼭두쇠는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으리는 누구시고, 이걸 명령한 분은 누구십니까…. 우릴 다 죽이려고 그러십니까…?’
그의 말에 환관이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웃었다.
‘궁에 들어온 이상, 그런 것쯤은 각오했어야 하지 않겠나.’
발을 뺄 수도, 더 넣을 수도 없었다. 이 명을 따르지 않으면 죽을 것이고, 이 명을 따라도 죽을 것인데,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꼭두쇠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런 꼭두쇠에게 그는 한 가지를 더 확인했다.
‘이곳에 정국이란 아이가 있다지.’
‘…….’
‘그 아이를 그 극의 주인공으로 올리게.’
‘…정국인 왜….’
‘꼭, 그 아이가 극의 주인공이어야만 해.’
내 말, 알아들었는가. 관리는 꼭두쇠에게 한 번 더 확인했다. 비참한 표정으로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는 꼭두쇠에게 관리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나지막이 말했다.
‘이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을 것이고, 이 말을 들으면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 될 테니,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는 잘 알거라 믿네.’
*
“정국아, 꼭두쇠가 너 부른다.”
말을 전하는 동료의 말에 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꼭두쇠를 찾아가 보니 그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혼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항상 이 큰 패거리를 몰고 다니던 사람이라 일을 할 때 이렇게 술에 취한 모습은 본 적이 없었는데, 참으로 이상하다 여기며 정국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꼭두쇠는 취기에 풀린 눈으로 정국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네?”
정국이 영문을 몰라 새된 소리로 되물었다. 눈치가 빠른 꼭두쇠가 무얼 알아챈 걸까. 설마 태형을 찾아가던 것을 들켰나? 들켰을 리가 없는데. 정국이 많은 고민들 뒤로 애써 표정을 감추자 꼭두쇠는 다시 물었다.
“태자, 그리고 태황태후.”
“…….”
“둘 중 누굴 만난 적 있어?”
“예…?! 아니요?!”
정국은 놀란 눈으로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만난 적이라니. 앞에서 공연을 한 적은 있어도 정국이 따로 태자나 태황태후를 만난 적은 없었다. 자신이 그럴 신분도 아니었고. 꼭두쇠는 전혀 모른다는 정국의 반응에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빨간 얼굴을 손바닥으로 슥슥 문질렀다.
“그럼 도대체 왜, 널… 왜 널 굳이 세우라 한거냐고, 왜.”
“…….”
“정국아.”
꼭두쇠가 술에 취해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다 죽게 생겼다.”
그가 조금 울고 있는 것도 같았다.
*
+)
연극 끌어들여서 궁중에 파란을 일으키는 내용이 '왕의 남자'에도 있었죠! 그 영화를 봐서 저런 연결고리가 떠올랐나봐요! 그 사건이 시작되면 늦게 피는 꽃도 이제 막바지일 것 같아요..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지만...^ㅁ^;;;; 아잌 누가 앞 내용 써줬으면 좋겠어요ㅠㅠ 빨리빨리ㅠㅠ
하뜌 눌러주신 분들과 댓글 남겨주신 밀회님, 체리쉬님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리댓은 지금 달러 갈게요 하항^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