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뷔] 늦게 피는 꽃 09.
[국뷔] 늦게 피는 꽃 09.
w.몽블랑
*
꼭두쇠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국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의 술주정이었다 생각하면 그만일 법도 했지만, 그날 이후로 단원들 몇몇은 자기들끼리 모여 수군거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 단원들도 있는 것 같았으며, 극이 시작되기 직전 즈음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단 한 사람, 정국을 제외하고는.
정국은 패 내에서 이렇게 소외감을 느껴본 적은 처음이었다. 다들 무엇에 대해 자신에게 숨기고 있는데, 절대로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꼭두쇠가 일전에 제게 말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였지만, 그것만 갖고 정국 혼자서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알아내기는 어려웠다.
정국은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캐내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패 내의 무거운 분위기를 자기 혼자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대신 정국은 공연 전날 밤 만화전을 찾았다. 일단 태형에게 제가 주인공인 것을 알리고 싶었다.
만화전의 문을 열고 자신을 기다리는 태형을 보면, 모든 시름이 잊히는 것 같았다.
“나 내일 공연해. 주인공으로 설 거야. 그러니까… 보러와 줘.”
“응. 구석에서라도 볼게.”
태형이 대답하며 히, 하고 웃었다. 정국은 태형처럼 웃어보였다.
“그러고 보니까 나 첫 연회 때 춤추는 거 봤어?”
태형은 첫 연회의 춤을 떠올렸다. 마음속에 떠오른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너무나 아파서 가슴을 쥐어 잡은 채 자리를 뜨게 만들었던, 그 춤. 태형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국이 조금 슬프게, 또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거 너 생각하면서 만든 거야.”
“…나?”
“네가 궁으로 들어가고, 다신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친 듯이 춤만 추다가… 만들었어.”
정국의 말을 듣던 태형은 고개를 숙였다. 그날 정국의 춤이 안타깝고 애절했던 이유가 자신이었다니. 자신이 떠난 그 시간을 정국은 어떻게 보냈던 걸까. 무희가 내려가고 혼자 남은 정국의 춤은 그리도 쓸쓸했는데. 그렇듯, 외로웠던 걸까. 아무것도 모르던 제가 울어버릴 정도로.
“네 춤… 많이 슬펐어. 그래서 너를 만날 때 울고 있었던 거야.”
정국은 태형을 보며 쑥스럽게 웃었다.
“원래 내 독무였는데 꼭두쇠가 보더니 순정이랑 같이 하면 좋을 것 같다 해서 순정이 것도 만들었어.”
아, 순정이는 그날 나랑 같이 춤 췄던 무희야. 정국이 덧붙였다. 태형이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몸짓이 유려했던 그 무희를, 태형 또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순정이 안무는 너를 생각하며 만들었어. 네 몸짓, 네 손짓, 네 발걸음… 그런 거.”
정국은 꿈꾸듯 그 시간을 회상했다. 태형을 그리며 안무를 짜던 그 시간들을.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을 만큼 태형을 그렸지만, 눈을 뜨면 절대로 볼 수 없었던 태형이 이제 눈앞에 있었다.
“그때 생각하면, 지금이 꿈같아. 그때보다 네가 내 앞에 있는 지금이… 네가 내게 닿는 지금이 좋아.”
“…….”
“지금이 꿈이라면, 계속 꿈을 꿨으면 좋겠어….”
깨지 않는 꿈이라면, 차라리 그게 더 좋겠어. 정국은 조심스레 태형을 안았다. 태형이 제 품에 순순히 기대어 와 정국은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태형의 목과 어깨에서 나는 향기에 코를 묻은 채 눈을 감았다.
만약 이것이 현실이라서 정말 곧 헤어져야 한다면, 그보다 차라리 지금 품에 안겨 있는 태형이 꿈이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정국은, 그 꿈을 깨지 않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것 같았다.
*
3주차의 공연 날이 밝았다. 남사당패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무거웠지만 정국은 차근차근 제가 해야 할 동작들과 대사, 노래를 되새겼다. 태형이 보러 온다는데, 그 앞에서 실수를 할 수는 없었다.
평소보다 열심인 듯한 정국의 연습을 보는 사당패의 눈길이 좋지는 않았지만, 정국은 그런 것들에 대해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죽으러 가는 길이 뭐 그리 좋다고. 스치듯 들린 말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오늘 밤 태형을 위해 공연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
정국은 서태후의 역을 맡았다. 남사당패에 있으면서 남자의 몸으로 여장을 하는 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정국에겐 극의 주인공을 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궁 안에 있는 한 달의 연회 중 태형에게 제가 주인공인 극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게 기뻤다. 실권을 휘어잡았던 서태후를 표현하기 위해 진한 화장과 화려한 복식, 거기에 가채까지 얹고 나면 정국이 연기할 인물에 대한 준비는 끝이었다.
뿌듯한 얼굴로 정국은 무대 뒤의 휘장을 살짝 열어 모여 있는 사람들을 둘러봤지만, 그의 눈에 태형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안 왔나? 입을 조금 삐죽이며 다시 무대 뒤로 가 단장을 한 번 더 점검했다. 조금 있으면 막이 오를 시간이었다.
*
태형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무대와 가까운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제가 이곳에 공연을 보러 온 것을 다른 궁인들에게 보일까 얼굴을 꽁꽁 싸맸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워낙 싸맨 탓에 누구인지는 알 수 없는 듯 했고, 사람들은 그저 오늘 관심 받고 싶은 아이가 있으려니, 하고 지나갔다.
사실 궁인들의 독특한 특징은 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알고 싶어 하면서 깊이 알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태형 또한 그런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막이 오르고 무대에 정국이 나타났다. 가면을 쓰고 나타났지만 움직임만으로 알 수 있었다. 오늘의 공연이 무슨 내용인지 몰랐던 태형은 정국의 분장이 굉장히 화려하다고 생각했다. 손끝까지 금장을 두르다니, 무슨 이야기의 주인공이기에 이리도 사치스러울까. 태형이 무대에 집중했고, 정국의 대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문무백관들은 들으시오. 태자가 아직 어리니 아직 어미의 손길이 필요할 나이요. 그러니 태자를 황제에 책봉하고 당분간은 내가 태자의 정치를 돕도록 하겠소.”
어린아이의 몸 위로 맞지 않는 커다란 청나라 황제의 옷이 입혀지고, 그 뒤엔 태후가 섰다. 그 순간 태형은 이 극이 누구를 주인공으로 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정국이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그리고 나를, 황제의 어미를, 서태후에 봉하겠소.”
“……!”
놀란 태형이 숨을 들이키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모두 마찬가지였다. 무대에 시선이 쏠려 있었다. 태형은 곁눈질로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환관과 궁인들 중 누군가는 공포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누군가는 화를 참지 못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모든 공포와 화의 근원지는 바로, 무대 위에 아무것도 모르고 연기 중인 정국이었다.
“내가 이 자리에 서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두 색출하여 제거해야 합니다, 폐하. 그래야 폐하의 황권이 천하를 호령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요.”
서태후의 말 한마디에 어린 황제는 어리디 어린 아이의 목소리로 신하들의 죽음을 단칼에 명했다. 아이의 천진난만한 목소리와 신하들의 잔인하고도 자비 없는 죽음이 대비되어 관객들은 숨을 죽인 채 극을 응시했다. 황제는 그렇게 서태후의 치마폭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황제가 성인이 다 될 때까지도 서태후의 권력은 줄어들지 않았고, 황제는 자라면서 그런 서태후와 심각하게 대립했다. 특히 황제와 황후의 사이를 이간질하며 황후를 고립시키고, 끝끝내 괴롭힘으로 황후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부분에서는 누군가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어디에선가 본 듯한 장면이었다.
그런 갈등 속에서 아직 어린 나이에 병을 얻고 만 황제마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황제의 죽음에 대해 서태후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황제가 죽어가는 것을 그녀는 방관하고 있었다. 자신의 친아들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폐하, 모두 다 자신이 뿌린 씨입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 생각하시고 어미에 대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황후에게 어머니가 했던 행동들이 제가 뿌린 씨앗은 아닙니다. 어머니의 열등감이고 어머니의 죄지요. 그 모든 것이 어머니께 고이 돌아가길 바랍니다.”
“…내가 죄인인지 폐하께서 죄인인지, 하늘은 모든 것을 알겁니다. 지금 벌을 받은 게 누구인지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죽어가는 황제는 힘이 없었다. 결국 그마저 분노 속에서 세상을 떠나고 서태후는 다시 권력을 쥐고 새로운 허수아비 태자를 황제에 봉했다. 그리고 서태후가 다시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였다.
“저 죄인들을 모두 체포하라—!”
금군대장의 목소리가 연회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이건 연극이 아니었다. 금군대장의 발도(拔刀) 소리가 날카롭게 연회장을 울렸다. 무대가 금군들과 남사당패가 섞여 아수라장이 되었다. 금군들은 무대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오랏줄을 묶어 자리에 꿇어앉혔다. 그들이 문을 모두 막고 포위한 탓에 도망갈 곳은 없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예인들이라 하더라도, 칼과 창 앞에서마저 도망칠 수는 없었다.
“아, 안 돼, 정국ㅇ…!”
금군대장의 손에 제일 먼저 털썩 무릎이 꿇린 정국을 향해 뛰쳐나가려던 태형이 누군가의 팔에 허리를 콱 붙들렸다. 그리고 강한 힘에 의해 한 번 반항할 새도 없이 그는 그대로 풀숲으로 끌어당겨져 입이 막혔다.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이미 그곳은 소란스러운 공간이었고 그의 비명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마마, 저 남준입니다.”
귀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태형이 급하게 얼굴을 돌렸다. 남준이 맞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한 태형이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남준은 태형의 입을 강하게 막은 손을 풀지 않았다.
“일단, 지금은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어딘가가 강하게 쿡 찔린다고 생각했다. 태형은 그 자리에서 실신해 축 늘어졌고 남준은 그런 태형을 들쳐 안고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지만 남준이 안고 있는 얼굴을 가린 사람마저 검문을 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태형이 빠져나가고, 정국은 오랏줄에 묶여 병사에게 등을 밟혀 고꾸라졌다. 얼굴을 덮고 있던 가면이 억지로 벗겨지고 몇 시간을 공을 들여 했던 분장이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정국에겐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왜… 왜 이런 일이…?
정국은 제 옆에 묶여 끌려온 꼭두쇠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에 ‘이 사람들 왜 이러는 거예요? 우리 뭘 잘못한 거예요?’ 물었다. 그러자 꼭두쇠는 피부와 입술이 허옇게 일어나고 초췌해진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말했잖아, 정국아. 우리 다 죽게 생겼다고.”
*
+)
음 이제와서 고백하지만.. 이미 다 알고 계셨을 수도 있지만.. 역사고증이 엉망입니다^ㅁ^ 원래 가상의 국가를 쓰려고 했는데 은근 타임라인이 뒤엉켜서 ㅠㅅㅠ ....
아무튼 가상의 국가로 알고 계시면 됩니다! 틀린 부분은 언젠가 고칠 거예요! ...하는데, 뭐 이미 남사당패에서 글렀나 싶어요... 사당패에 여자가 있다는 데에서 이미...(쓴웃음)
지난 편에 하뜌 남겨주신 분들과 댓글 남겨주신 밀회님, 체리쉬님 감사합니다! 리댓은 지금 달러갈게요^ㅁ^
이번 편 개인적으로 지금 굉장히 마음에 안 드는데 여유가 너무 없네요ㅠㅠ 읽어주시는 분들 죄송해요 ㅠㅅ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