슙민국뷔 : 인어공주 이야기 (完)

[슙민/국뷔] 인어공주 이야기 12.

몽블랑11 2016. 11. 25. 19:05

[슙민/국뷔] 인어공주 이야기 12.





지민이 다시 눈을 떴을 땐 방 안은 캄캄했다. 어두운 방안에서 눈을 떴다 감았다, 가 다시 떴다. 어차피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눈을 뜨는 게 의미가 있는 일인가. 제 상체에서 스르르 떨어지는 이불을 한 쪽으로 힘겹게 밀어낸 지민이 침대에서 일어나려다 주르륵 바닥으로 주저앉는다. 허벅지부터 아래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다시 침대를 붙들고 천천히 몸을 일으킨 지민은 온몸의 근육들이 아우성치는 걸 느꼈다. 인상을 찡그릴 힘도 없이 비틀대며 욕실로 들어간다.



샤워기를 틀고 물을 맞으며 캄캄한 창밖을 바라보던 지민은, 이게 언젠가 봤던 장면임이 떠오른다. 그래, 윤기와 함께 있을 때 꿈에서 봤던 장면이다. 그 꿈이 또 현실이 되리라고는 그땐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지금 또 이렇게 서 있다는 게 그저 허탈하다. 빈껍데기 같은 자신을 안으면서 정국은 만족스러운 걸까. 그는 뭘 원하는 걸까.



“…하아….”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그가 자신을 옆에 두고 이런 행동들을 하는 건지 지민은 이해가 잘 되질 않았다. 그를 이해하려는 행동 자체가 힘들었지만, 정국이 어떤 마음으로 제게 이렇게 하는지 스스로라도 납득은 가야지 이 생활을 버텨낼 수 있을 텐데, 그것조차 이유를 찾기가 어려웠다. 지금의 정국은 그저 제게 미친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무언가 지금까지 잡고 있던 끈을 놓은 사람처럼 구는 그를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처럼 느껴진다. 언젠가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하고 원했던 것들이 모두 물거품처럼 부질없는 게 아닐까. 그럼 자신은 무엇에 기대어 살아야 할까. 아니 처음부터… 왜 살아야 하지.



지민은 제 몸을 어딘가로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 몸이 가벼워지는 착각까지 느끼다 곧 정신을 차린다.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는 생각에 숨을 몰아쉰다. 냉정히 생각하면 어차피 뛰어내릴 수 있는 공간도 없었고, 그리고… 아직 다인을 윤기에게 안전하게 넘겨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그래. 아직은 죽을 수 없었다. 아직은.



*



태형이 정국의 앞에 서 있다. 평소와 같이 아침 보고를 끝낸 태형이 천천히 서류를 내리자 정국이 입술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내뱉어졌다.



“박지민더러 민윤기 딸 데려다 줄 준비하라고 하세요.”



정국의 말에 태형이 자신도 모르게 ‘네?’ 하고 반문한다. 지금껏 한 번도 반문한 적 없던 태형이 불쑥 물을 정도로 정국의 행동이 예상 외였다. 정국은 반문하는 태형을 무표정으로 올려다본다.



“내 말이 뭐 잘못됐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김태형 씨 라이플 다룰 줄 알죠.”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태형이 예, 하고 대답했다.



“조만간 쓸 일 있을 겁니다. 청소해 놓으세요.”



태형의 손끝에 불안감이 엄습한다. 과연 제 총 끝에 겨눠지는 이는 누구일까. 윤기? 다인? 그것도 아니면 지민? 정국이 그리고 있는 파국은 어떤 그림일까. 태형은 주먹을 꽉 쥐고 정국을 향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



태형에게 정국의 말을 전해들은 지민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 있다.



“정말이야? 전정국이 다인이 데려다 주라고 했어?”

“예.”

“그 외에 다른 말은 없었고?”



태형은 라이플을 준비하라던 정국의 말을 떠올렸지만, 없다고 고개를 젓는다. 그런 태형의 반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민이 제 무릎을 안고 그 안으로 얼굴을 묻는다. 그런 지민에게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 형사님한테 다인이 데려다 주고 나면… 정국이가 날 놓아줄까?”

“…….”

“아니면 다시 여기로 돌아와야 할까…?”

“이사님께서는 그것에 대해선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아니. 정국이 말고… 당신이 보기엔 어떠냐는 거야.”



지민이 고개를 틀어 태형과 눈을 맞춘다.



“당신, 정국이 잘 알잖아. 좋아하니까.”



지민의 말에 태형이 굳다가, 이내 풀어지며 피식 웃고 만다.



“그게, 지민 씨 눈에도 보입니까.”

“아마 다 알 걸. 정국이는 둔해서 모르는 거야.”

“…그렇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날 놓아줄 것 같아? 지민의 말에 태형이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그런 태형의 답안을 이미 예상한 듯 지민은 픽 웃었다.



“그래. 역시… 그렇겠지.”



지민이 몸을 틀어 비켜 앉아서는 제가 앉아있던 침대를 팡팡 친다. 여기 앉아. 태형이 별 말 없이 옆에 앉자 지민은 ‘내가 궁금한 게 있어.’ 하고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 여기 처음에 탈출했을 때, 경찰에 체포되기 전에. 양강회로 데려다줬던 거, 당신이잖아.”

“네, 그렇습니다.”

“그거… 전정국이 시킨 거야?”

“…네.”



태형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대답했다.



양강회는 사실 BH 인더스트리의 자회사 정도 되는 조직입니다. 거기도 이사님의 통제 아래 있습니다.



지민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그럴 것 같았어, 하고.



“그땐 왜 그런 거야? 왜 날 탈출시켜주는 척 했던 거야?”

“그때의 지민 씨를 그대로 뒀다간 어떻게든 죽을 것 같았으니까요. 이사님은 그걸 불안해 하셨습니다.”



처음으로 이 방에서 탈출에 성공했던 그날, 태형이 그 무거운 문을 열어줬었다. 그리고 무사히 양강회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차로 데려다 주었다. 양강회에서 조금 몸을 숨기고 있으면 도망칠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태형을 믿었었는데. 그게 모두 정국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것이었다니. 쉽게 생각했던 게 자신이 어리석었다.



“그러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된 거야?”



지민의 질문에 태형이 무슨 말이냐는 듯 시선을 던진다.



“사실은 나, 내가 왜 기억을 잃어버렸는지 기억이 안 나.”

“…….”

“다 기억이 난 줄 알았는데. 내가 왜 항구에 있게 되었는지, 항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생각해 보니 하나도 기억이 안 나더라고. 머리만 아프고.”

“…그러십니까.”

“그리고 양강회에서도 갇혀있기만 했으니까.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몰랐잖아.”



태형은 조용히 지민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조심스레 입을 연다.



“양강회에도 지민 씨의 존재에 대해서는 비밀에 부쳤습니다. 그저 저희 소속의 보호가 필요한 조직원이라고 해놨을 뿐이었는데, 그걸 그쪽에서 잘못 해석을 했는지 BH에서 좌천당한 조직원이라고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으응.”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양강회는 마약 판매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곳입니다. 어떻게 보면 저희의 자금줄 중 하나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BH로부터의 엄격한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눈먼 돈에 눈독을 들이기 쉬운 곳이니까요.”

“응.”

“양강회도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마약 쪽의 자금은 건드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대신 다른 쪽으로 몰래 돈을 만들고 있었죠.”

“어떻게?”

“인신매매입니다.”



태형의 말에 지민이 입을 다문다. 마약에 인신매매라니. 생각지도 못한 세계가 제 손 언저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정국이 있다.



“사람들을 사고파는, 정확히 말하자면 성을 사고파는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일찬은 그걸로 차곡차곡 뒷돈을 쌓아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일찬 눈에 지민 씨가 든 거죠.”

“내가?”



태형이 고개를 끄덕인다.



“지민 씨를 데리고 나가서 팔면 돈이 될 거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차피 BH에서 좌천된 조직원이니 버린 사람쯤으로 생각했던 게 정일찬의 가장 큰 실수였죠. 그래서 지민 씨를 빼돌리려 했는데 그게 경찰에 걸리면서 실패한 겁니다. 그때 정일찬도 죽고…”

“그 사람은 왜 죽었는데?”

“폭발 사고였습니다. 제 생각엔 그때 지민 씨가 같이 기억을 잃으신 게 아닐까 합니다. 눈앞에서 사고를 보신 게 처음일 테니….”



태형의 말에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아무 말이 없는 지민에 태형이 ‘궁금한 건 다 풀리셨습니까?’ 하고 묻는다. 지민이 고개를 또 끄덕이자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하며 자리를 뜨려는 태형의 옷깃을 지민이 다시 급하게 잡는다. 궁금한 건 다 풀렸다 해놓고 또 잡는 지민이 귀찮지도 않은지 태형은 똑같은 말투로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묻는다.



“정국이를 좋아한다면서, 당신은 내가 싫지 않아?”



지민이 제 옷깃을 잡은 채 올려다보고 있었다. 까만 지민의 눈동자를 마주한 태형은 쉽게 입을 열지 못한다. 그러나 이내 열린 입술에서 뱉는 대답은 단호했다.



“…싫다기보단 밉습니다.”

“…왜…. 왜 미워.”

“지민 씨만 돌아보면 이사님이 행복하실 테니까요.”

“…….”

“그렇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을 돌아본다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태형의 낮고 조근조근한 말투에 지민의 시선이 흔들린다. 태형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제가 밉다고 하는데도 왜 태형이 싫어지지 않는 걸까. 왜 오히려 애처로워 보이는 걸까. 지민은 제 시선을 잡으려 하지만 태형의 큰 눈이 머리칼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지민 씨.”

“…응.”

“이사님은 둔하신 게 아닙니다.”

“…어?”



지민은 잊어버린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태형의 말이 뜬금없게 들려왔다.



“제가 옆에 서 있다는 걸 모르시는 건 둔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다른 한 곳만 바라봐서 그렇습니다.”

“…….”

“이사님은 그곳 외엔 돌아보신 적이 없습니다.”



지민의 손에서 태형의 옷자락이 스르르 빠져나가고, 태형은 지민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지민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도로록 떨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