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슙 외 : 화무십일홍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02.

몽블랑11 2017. 2. 20. 17:37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02.

w.몽블랑




*



몇 년 후,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순리는 궁궐의 주인을 바꾸어 놓았다.



대왕대비에 이어 왕이 승하하고 세자였던 정국이 그 자리에 올랐으며, 지민은 세자빈에서 중전이 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왕자가 태어났다. 정국과 지민을 닮아 눈처럼 희고 고운 아이는 방긋방긋 웃기도 잘 웃었다. 지민이 그랬듯, 주변 이들을 사르르 웃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토록 사랑스러운 아이가 태어났지만, 그를 바라보는 지민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더 웃지 못한다고 하는 게 맞았다. 공무 때문에 입궐했던 지민의 아버지는 오랜만에 지민을 만났다가, 그의 표정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마마, 어디 몸이라도 좋지 않으십니까.”

“…아닙니다.”

“그럼 왜….”

“…….”



혼자서도 밝게 빛나던 아이였다. 이 나라의 태양을 만나 혼인을 맺으면 당연히 더 밝게 빛날 줄 알았는데, 궁으로 들어와 지민을 만날수록 그의 빛이 조금씩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지민의 아버지인 박 대감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지민과 왕의 사이가 좋지 않은가 물으면 그렇지도 않았다. 일단 두 사람 사이엔 어린 적자가 있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증거였고, 두 번째로 박 대감은 이따금 지민과 왕이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웃으며 대화하는 두 사람 사이엔 그리 문제가 없어 보였다. 오늘도 박 대감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찜찜함을 뒤로 한 채 퇴청해야 했다.



그런데 지민에겐, 그리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것이 문제였다.



정국은 지민에게, 미묘하게 먼 사람이었다. 참으로 그 느낌이 이상했다.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해주는 행동 속에서 정국은 이상하게 선을 그었다. 지민에 대해 묻지만 정국 자신에 대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지민이 정국에 대한 것을 물어도 정국은 대답하지 않고 부드럽게 화제를 돌렸다.



지민은 정국이 다루는 정무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정국이 힘든 일이 있을 때 기댈 곳이 되고 싶었고, 기쁜 일이 있을 때 나누고 싶은 사람이었으면 했다. 그러나 정국에게선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전혀 지민과 공유하는 부분이 없었다.



정국은 분명 제 지아비이며 제 부군이고 제 아이의 아버지였지만, 그는 그 무엇보다 이 나라의 왕인 듯 했다. 그리 자라났으니 어쩔 수 없다 여기면서도, 그래서 지민도 정국에게 기댈 수 없었다. 지민은 여전히 정국을 어려워했다.



그것은 말로 꺼내기가 어려웠다. 뭐라 어려움을 말해야 좋을지도 몰랐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지민은 어찌 보면 이 궁 안에서 철저히 혼자였다. 궁 밖에서 수많은 애정을 담뿍 받으며 자라났는데, 궁으로 들어오면서 그 모든 애정들은 칼 같이 잘려 나갔다. 궁 밖과 궁 안 사이에는 커다란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세워진 것 같았다.



“마마, 왕자님께서 울고 계십니다.”

“…아….”



지민은 수심이 가득하던 얼굴을 빠르게 지우고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토닥였다. 그러나 여러 번 토닥여도 아이의 울음이 잦아들지 않자 그를 곁에서 바라보던 태형이 물었다.



“유모를 불러올까요.”

“…그리해 주겠소?”

“예.”



태형은 짧게 인사를 올리고 교태전을 나섰다. 지민은 그의 인사에 습관처럼 미소로 답했다. 변함없이 여전히 사랑스러운 미소에 태형은 그게 못내 씁쓸했다.



중전의 호위인 태형은 중전과 같은 성(性)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궁녀들보다 지민의 곁에서 더 오래 있었다. 그런 태형에게, 품에 안고 있는 아이가 우는 것조차 듣지 못하고 멍하니 수심에 빠져 있는 지민은 더 이상 눈에 설은 모습은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제 주인은 더욱 야위어 가고, 더욱 외로워지고 있었다. 그것이 자꾸 태형의 눈에 들었다.



그러나 그는 손 내밀어 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



정국은 대전에 앉아 머리를 붙들었다. 아까 입궐했던 지민의 아버지, 박 대감이 올렸던 문서 두루마리 때문이었다.



박 대감은 지금처럼 나라의 힘이 세었던 적이 없으니, 대를 이어 주변의 소국들을 정리해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주변국들의 정세를 살펴본 바, 박 대감은 지금이 적기라고 믿는 것 같았다.



확실히 박 대감의 의견엔 타당성이 있었다. 그는 주변국들의 정세에 대해 밝았으며, 그의 말대로 정국이 전제 정권을 쥐고 있는 현재만큼 국력이 부강했던 적이 없었다.



정국도 주변국들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것은 일차적으로 행정적 정리를 의미하는 바였다. 정국은 전쟁보다는 화친이 먼저 내밀어 보아야 할 수라고 생각했으나, 박 대감을 필두로 한 많은 조정 대신들의 생각은 달랐다.



굳이 시간이 오래 걸리는 화친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주변국들을 저렇게 두었다간 언젠가 연합을 맺어 이 나라를 쳐들어올지도 모른다, 전하께서는 변방의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한지 두루 살피셔야 한다, 등의 이야기가 난무했다. 정국은 조정의 대신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선왕전하 대엔 전쟁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짐 또한 주변국들에 대한 정리는 필요하다 생각하나 그대들의 의견과는 다르다. 이 나라가 계속해서 주변국들을 향해 무기를 들이대면 또 다른 나라에 대한 위협이 될 수도 있고, 그 위협은 다시 우리나라를 향해 돌아올 수도 있다. 현재의 국방 또한 중하니, 지금으로서는 현재의 경계를 지키고 나라 안의 백성들이 더 평안하게 사는 것이 더 시급하지 않겠는가.”



그러자 박 대감이 앞으로 나와 두루마리를 머리 위로 들고 무릎을 꿇었다. 원로대신이자 중전의 아비인 그가 그리 행동하는 것에 조정대신들이 모두 놀란 눈치였으나, 박 대감은 그에 아랑곳 않고 고개를 숙인 채 감정이 실린 말투로 우렁차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고했다.



“전하! 지금 나라 밖 뿐만 아니라 이 나라 안에조차 정리되지 않은, 첩자와 같은 이들이 살고 있나이다. 나라가 부강해지지 않으면 그들은 언제든 눈을 돌릴 것이옵고, 또 다시 반란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나라 안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나라 밖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대대로 내려온 이 나라의 안녕을 보장할 수 없으니, 국방은 백성들의 삶을 살피시는 만큼 중요한 국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전하…!”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전하.”



박 대감의 뒤로 여러 대신들이 절을 올렸다. 그것이 모두 그들 스스로의 소신일지, 박 대감에 대한 충성일지는 몰랐으나, 과반수에 가까운 사람들이 대전 앞에 엎어졌다. 내시는 박 대감이 들고 있는 문서를 정국에게 가져다주었다. 문서를 받아든 정국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생각해 보겠다.”



생각이라니, 어정쩡한 답안이었다. 그러나 박 대감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예를 올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조례는 여기서 마치겠소, 이제 그만들 가보시오. 하는 정국의 말에 대신들이 모두 일어서 뒤로 물러섰다.



대신들이 물러서고 대전의 문이 닫혔다. 정국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국무회의 시간도 아닌데 이런 이야기가 조례에 왜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들이 뱉은 정벌론에 대한 입김은 상당히 거셌다. 박 대감과 같은 정당이 아닌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대신들조차도 박 대감의 말에 대해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그들이 하고 있는 말엔 분명 일리가 있었다. 정국도 화친만을 밀어붙일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 방책에 대해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주변국들을 정리했을 때의 이점이 아닌, 전쟁을 했을 때의 이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머리를 붙들고 눈을 감은 채 앉은 정국을 향해 환관이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전하.”

“무어냐.”

“이조(吏曹)의 관리가 전하를 알현고자 합니다.”

“무슨 일이라더냐.”

“전하를 뵙고 나서 말씀 드리겠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 들라 하라.”



정국은 뻐근한 목을 한 번 돌리고 박 대감의 문서를 책상에 놓았다. 뒤이어 대전으로 들어온 이는 정국이 아는 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꽤나 고운 생김을 한 하얀 얼굴의 그는 대전으로 당당히 걸어들어 와 정국을 향해 예를 올렸다. 정국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슨 일이냐, 하고 물었다.



“소신 이조정랑 김윤기라 합니다.”



이조정랑? 정국은 조금 삐딱하게 앉아 양 손을 모으고 살짝 눈을 내리깐 채 자신의 앞에 선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약관(20세)은 지났겠고, 이립(30세)은 아직인 듯한 젊은 얼굴이 벌써 정5품, 그것도 이조의 정랑이라.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는 들어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권세가 높고 대단했다. 어떤 배경이라도 등에 지고 있는가 생각한 정국은 말없이 그대로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이조판서께 여쭈어도 답이 시원하게 내려오지 않아 이리 알현을 요청 드렸습니다.”



왕의 앞에서 제 상사, 그것도 한 나라의 판서에게 하는 독설로 시작한 그의 말에 정국의 한쪽 눈썹이 작게 튕겨졌다. 정국은 한 쪽 입꼬리를 올려 비식 웃으며 자세를 바로 고쳤다. 툭툭 뱉는 듯한 말투가 왕인 제게 잘 보이려는 시도가 하나도 없어, 그게 오히려 정국의 관심을 끌었다.



“…말해 보시오.”

“며칠 전 입궐하여 보니 책상 위에 쪽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그곳엔 얼마 전 포박되어 구금 중인 대상(大商: 큰 상인)에 대한 증거 제출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써 있었고, 저는 즉시 이조판서께 이에 대해 말씀을 올렸습니다. 그러자 판서께서는 쪽지를 가져와보라 말씀하시고는, 제게서 쪽지를 가져가셔서 현재까지 이에 대한 언급이 없으신 상태입니다.”



정국은 흥미로운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쪽지가 아무래도 주인을 잘못 찾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든지.



“이조판서가 따로 생각이 있지 않겠소.”

“따로 생각이 있으시다면 애초에 쪽지를 받은 제게 말씀을 해주실 법도 하지만, 벌써 사흘째 저와의 접촉을 피하고 계신 것으로 아뢰옵니다.”

“그래서… 지금 내게 상사를 고자질하는 거요?”



정국이 슬핏 웃으며 흘린 그 말에 윤기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정국은 윤기의 그 눈에서 찰나이지만 저를 향한 경멸을 보았다. 금방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지만, 분명 그 시선은 경멸이었다. 한 나라의 군주를 향해 던지는 겁을 상실한 그 시선이, 정국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흥미로웠다. 말을 참는가 싶더니, 이내 윤기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전하께 제가 이리 말씀을 드리는 것은 상사에 대한 보호나 고자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조 내에서 이러한 쪽지가 떠돌고 있으며 이조판서께서 그 일에 대해 묵인하고 계시는 이 일이, 과연 어디까지 연관되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며, 이는 또한 이 나라의 기강이 얼마나 확고히 잡혀있는지에 관한 일입니다.”

“…….”

“전하의 등잔 밑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가깝고도 모르기 쉬우실 터이나, 다른 이도 아닌 전하의 측근에서 일어나는 만큼 이 사안에 대한 무게는 무겁습니다. 큰일인 만큼 원리원칙을 지키려하지 않으면 자칫 국가의 기틀이 흐트러질 수도 있는 일입니다.”

“…….”

“허나 전하께서 그리 말씀 하신다면 신 김윤기, 더 할 말이 없으니 물러나 보겠습니다.”



윤기는 끝까지 일관성 있게 물러나려했다. 명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퇴청하려는 신하는, 정국이 왕위에 오른 뒤로 처음이었다. 정국은 웃음기를 지우고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무엄하다. 누가 물러나도 좋다 했느냐.”



화가 난 듯 발걸음을 꽤 빠르게 내딛던 윤기는 한숨을 내쉬곤 그 자리에 멈춰서 다시 예를 갖췄다. 저 칼같이 예를 갖추는 것이 정국에겐 퍽 우스웠다. 정국은 왕좌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와 윤기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용한 대전에 울리지도 않을 만큼 조그마한 목소리로 윤기에게 물었다.



“그 쪽지의 내용을 기억하느냐.”



그러자 윤기는 제 소매에서 작은 종이조각을 꺼냈다. 원래 있던 쪽지와 한 자도 다르지 않은 내용입니다. 하고 두 손으로 쪽지를 올리는 윤기의 말에, 그대로 외워서 쓴 건가 싶어 정국이 칭찬을 건넸다.



“머리가 비상하구나.”

“외운 것이 아니오라 무슨 일이 있을까 하여 미리 베껴 써놓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비상한 것이고.”

“…….”



말을 잃은 윤기가 건넨 쪽지를 가만히 읽던 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기의 말대로 단순한 쪽지는 아니었다. 원래 필체를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내용 자체로도 그냥 넘길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알았다. 나가 보아라.”



쪽지는 정국의 손에 들린 채였다. 윤기는 머뭇거렸다. 정국은 이번엔 나가래도 나가지 않는 윤기를 향해 의문의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윤기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저는 이 쪽지를 외우지 못합니다.”



무슨 말이지? 했던 정국이 이내 피식 웃었다.



“짐을 못 믿는 건가. 그래서 쪽지를 돌려 달라 하는 것이고?”

“…….”

“짐이 제대로 조사하지 않을 거라 여겨 그런 말을 하는 거라면, 애초에 내게 이에 대해 이야기한 이유가 뭐지?”



윤기는 이번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정국의 말대로 그는 이 사건을 왕에게 알리고자 했던 것이었고, 왕의 손에 쪽지가 들어갔으니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윤기는 찜찜한 얼굴로 왕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뒷걸음질하여 대전을 빠져나갔다.



윤기가 나가고 나서 그가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던 정국은 다시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을 경멸의 눈으로 쳐다보던 그 시선과, 그러면서도 공손하게 예를 갖추던 상반된 모습이 정국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참으로 뇌리에 남는 자였다. 이조에 인물이 들어왔구나. 정국은 쪽지를 뒤집어 보며 웃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



구금되어 있던 대상이 처결을 받고, 이조판서가 경질되고 형조판서까지 징계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채 보름이 지나지 않은 후의 일이었다.



*



+)

설명충입니다. 노잼 주제에 기네요... ㅠㅅㅠ

하뜌 눌러주신 분들과 댓글 남겨주신 체리쉬님 감사합니다♥ 

그러고보니 체리쉬님 국민 좋아하신다고 했는데... 어... 오늘 국민... 어.........(숨는다)

역사를 아는 게 없어서 쓰기가 어려워요 ㅠㅠ 그래서 쓰는 데 시간이 되게 오래 걸려요... 나는 왜 역사알못인가... 흐읍 ㅠㅠ 안녕하세요 역알못 몽블랑입니다 설명충이기도 하죠(...) 흐아아아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