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05.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05.
w.몽블랑
*
정국은 오랜만에 암행을 나섰다. 이번엔 백성들을 살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기에, 밤늦게 궁을 출발하여 호위와 단 둘이 친구의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꽤 시간을 들여 걸었다. 그리고 도착한 집의 싸리문을 열자, 마당 중간의 평상 위에 뻗어 있던 누군가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호위는 문 앞에 서서 대기하고, 정국은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누군지 잘 보이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려 시야를 맑게 해보려 애썼지만, 거꾸로 펼쳐진 시야는 그리 쉽게 맑아지지 않았다.
“게 누구냐….”
“또 술 마시고 이 시간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
“어이쿠. 오셨습니까, 전하아!”
뻗어있던 몸을 뒹굴, 하고 구르더니 납죽 엎드려 절을 한다. 정국은 그 모습에 피식 웃다가 이내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정국은 손을 휘저어 냄새를 날리려 애를 썼으나 외려 냄새에 더 찌드는 느낌이었다. 평상 위에 놓인 반상엔 이렇다 할 안주 하나 없이 술병들만 나뒹굴고 있었다. 반상을 구석으로 대충 밀어놓고 정국은 엉덩이를 걸터앉았다.
“술이 더 늘었구나.”
절을 하듯 엎어져 있던 그는 반짝 고개를 들고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더니 술에 취해 풀어진 근육으로 헤죽, 웃었다.
“더 늘기느은… 원래 이 정도는 마셨지요.”
“웃기지 마라. 혼자서 됫박은 넘게 마셨겠다.”
“즈언하, 잔소리 닥쳐 주시옵… 악!”
“어찌 이리 무엄하단 말이냐.”
정국이 퍽하고 발로 차자 억, 소리를 내면서도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워서는 정국을 향해 도끼눈을 뜬다. 그 도끼눈이 우스워서 정국은 크게 웃었다. 주상을 향한 무엄함이 경쾌하게 느껴지는 이. 그는 정국의 어릴 적 동무, 호석이었다.
*
호석은 어릴 적부터 함께 놀고 공부하며 자란 동무였다. 왕족과 높은 양반들 자제만 모아놓은 곳에서도 정국과 호석, 그리고 남 준, 세 사람은 눈에 띌 정도로 몰려다녔다.
정국은 세자가 되기 전이었으나, 그는 이미 세자가 될 것이 뻔한 단 한 명의 적자였다. 하여 그때부터도 이미 호석과 남준을 향한 질투의 눈길은 거셌다. 비난의 화살은 아이들에서 번져 호석과 남준의 아버지에게로까지 이어졌다. 미래의 세(勢)를 얻기 위해 자식들까지 이용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랑곳하지 않는 아버지들과 달리, 아이들은 예민했다. 결국 세 사람은 어느 샌가 친한 적 없던 사람들처럼 흩어졌다. 그것은 아마도 남준이 먼저 과거에 합격하겠다고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처음 과거를 준비한다고 했을 때 호석도 정국도 그를 응원했었다. 정국은 남준의 어깨를 토닥이며 ‘어서 빨리 궁에서 너를 봤으면 좋겠다.’ 하고 이야기했다. 그 말에 삽시간에 남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만약 내가 과거에 합격하여 궁으로 들어가면 그땐, …우린 친구가 아닐 거다.’
똑같이 어렸던 것 같은데, 그 말을 했을 때의 남준은 마치 어른인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호석과 정국은 ‘왜?’, ‘왜 아니야?’ 하고 물었지만 남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로 몇 년이 지나서야, 정국은 그때 남준의 집안에 정치적 평지풍파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일로 인하여 남준의 백부가 숙청을 당했다. 집안의 큰 어르신이 죽음을 당한 것은, 그 모든 것이 결국 남준이 정국과 친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이었다.
그때부터 정국은 친한 사람을 없앴다. 제 곁의 모든 사람을 잘 믿지도 않고, 말도 잘 하지 않았다. 그것은 호석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정국은 마치 만인의 주상처럼 굴었다. 호석은 갑자기 태도가 달라진 정국을 이해할 수 없어서 정국에게 가 따졌다.
‘갑자기 왜 이러는데? 이유라도 좀 알아야겠어.’
‘…….’
‘너도 김남준도, 그냥 그렇게 멀어지면 그만이야? 그럼 나는. 세월이 흐르면 변하는 것도 있는 거야, 하고 내가 납득하면 끝인 거냐? 니넨 뭐가 그렇게 쉽냐?’
굳은 침묵을 지킬 뿐, 대답이 없는 정국에게 호석은 길길이 화를 냈다. 그러고서도 호석은 정국을 찾아왔다. 정국이 호석을 보지 않겠다 하면, 또 길길이 화를 내다 물러갔다. 그러나 호석은 며칠 후 또 정국을 찾아왔다. 참으로 지치지도 않고, 잊을 만하면 ‘세자전하 계십니까.’ 하고 찾아왔다.
그 두 사람이 다시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호석의 집안 가세가 기울고 나서부터였다. 어릴 땐 정국과 수업을 함께 들을 정도로 대단했던 집안 권세는, 누구의 잘못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그 모든 부와 권세가 마치 한 번도 다지지 않은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없던 것 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호석은 그때부터 주독에 빠져 살았다. 술에 취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매일을 주사와 숙취 속에 보냈다. 그때 즈음엔 호석이 정국을 찾아가지 않은지도 꽤나 오래였다.
그런 호석에게로 어느 날 밤, 정국이 찾아왔다.
‘…나를 알아보겠는가.’
대청마루에 누운 채 술기운에 잠긴 시선으로 정국을 빤히 바라보던 호석은, 조금의 웃음기도 없이 정국을 향한 말을 내뱉었다.
‘주상전하 아니십니까.’
‘…….’
‘이리 누추한 곳까지 귀하신 분이 어찌 찾아오셨는지요.’
‘…….’
‘지금의 나는 전하와 어울리지 않으며, 이곳 역시 전하와는 어울리는 곳이 아닌 것 같으니 지금 당장 돌아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가시를 숨긴 어투에 정국은 한숨을 쉬며 호석이 누운 대청마루 옆으로, 기둥에 기대어 앉았다. 처마 뒤로 하늘에 박힌 별들이 햇살 아래 유리가루처럼 반짝거렸다. 정국은 처마 밑의 하늘을 바라보며 던지듯 말했다.
‘화, 풀어 달라기엔… 이젠 조금 늦었겠지.’
‘…네, 늦었습니다.’
정국은 호석을 내려다보았다. 호석은 정국을 바라보지 않았다.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정국은 손으로 마루를 쓸어보았다. 마루가 찬데, 거기에 등을 대고 누워 있는 호석은 춥지도 않은지 얇은 옷차림이었다.
‘갈 때 가더라도… 궁금한 게 있었네. 대답해줄 수 있겠는가.’
‘…….’
‘내게, 무엇이 제일… 원망스러웠는가.’
호석은 정국을 무엇 때문에 원망스러워 하는가. 정국이 생각해본 이유는 많았다. 먼저 친구 관계를 끊으려 했던 것도 자신이었고, 계속해서 찾아오는 호석을 만나주지 않거나 타인처럼 대했으며, 호석의 집안이 이렇게 되기까지 정국은 한 번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 중 어느 것이라 해도, 혹은 그 모든 것이 원망스럽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
호석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정국은 함께 침묵했다. 답조차 주지 않으려나, 생각했다. 그래도 일어나기 싫어서 고집스레 앉아있었다. 포기를 모르는 정국의 성격이었다. 한참 후에서야 호석은 입을 열었다. 술조차 다 깨버린 듯한 목소리였다.
‘이제와 알고 싶다 하셔도 되돌릴 수 없는 일입니다.’
‘알고 있네.’
‘그런데 왜 들으려 하십니까.’
‘무엇이 가장 원망스러웠는지라도 들으면,’
‘…….’
‘…자네가 조금은 더 편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내 말을 거짓이라 생각하며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만. 정국이 덧붙인 말에 호석은 다시 말이 없었다. 다만 생각했다. 정국의 마지막 말이 사실일까, 하고. 그리고 자신이 알던 정국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지금 저 정국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여도 될 만한 사람이었던가, 에 대해. 정국이… 어떤 사람이었더라.
한참 후에서야, 호석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없습니다.’
‘무어라.’
‘없었습니다, 그런 거. …전하가 원망스럽지 않았습니다.’
호석은 끙, 소리를 내며 마루에서 몸을 일으켰다. 호석을 바라보는 정국의 눈동자가 빛났다. 호석은 조곤조곤 제가 갖고 있던 이야기들을 정국을 향해 털어놓았다.
‘전하가 원망스러워 안 찾아뵌 게 아닙니다. 제가 원망스러웠던 건 전하가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제 자신이었고, 무엇도 제 마음대로 되지 않던 이 세상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세상을 살아나기가 힘들었고, 그러다 보니 친구도 무엇도 다 놓아버린 겁니다. 제겐 그 무엇도… 의미가 없지요.’
‘…….’
‘제가 왜 전하를 원망하겠습니까.’
‘…….’
‘제가 감히, 전하를 압니다. 저를… 그리고 남준을, 도와주실 수 없던 전하의 처지를, …이제는 이해합니다.’
호석이 정국을 향해 웃었다. 호석의 눈동자가 조금 젖어서 반짝거리는 것도 같았다. 말이 없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정국의 시선을 피해 호석은 고개를 숙였다.
‘저까짓 것에게 어린 날의 친우라는 이유로, 여기까지 찾아와 주셔서 송구스럽고 황송합니다, 전하. 그러니 이제… 마음 편히 돌아가셔도 됩니다. 저는 오늘 이렇게 찾아와주신 것으로도, 마음이 족할 것 같습니다.’
‘내게 이제 돌아가란 말을 하고 있는 건가.’
호석은 대답이 없었다. 답답해진 정국이 한 번 더 말했다.
‘그럼 난 이대로, 여기까지 온 보람도 없이 어린 날의 친우를 잃어버리고 돌아가란 말인가.’
정국의 침통한 목소리에 호석은 입술을 물었다. 제 마음 약한 것을 알면서 이리도 흔드는가. 아니면 약한 것을 알기에 이리도 흔드는가. 호석은 결국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저와 전하는 친우로는 지낼 수 없습니다. 어느 왕이 역적 집안의 자식과 지란지교를 논한다 하더이까.’
‘…….’
‘처음엔 어찌하여 유배도 사약도 아닌, 그리도 모질게 저희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도륙하였을까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전하를 많이도 원망하였습니다. 사실일 리 없건만, 어찌하여 구해주지 않으셨는가. 구하려고는 해보셨는가. 며칠 밤낮을 눈물로 보냈습니다.’
‘…….’
‘그러다 몇 해 전, 갑자기 생각했지요. 나는 왜 도륙당하지 않았는가.’
호석의 말에 정국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제가 지금껏 살아있는 것도 전하의 은혜인 줄을 알고 있습니다. 대전 앞에서 상왕 전하께 무릎을 꿇고 며칠을 비셨다지요. 며칠을 걷지 못하셨다 들었습니다. 이 모든 말들이 세상 사람들의 입을 타고 흐릅니다. 저를 구해주셨으면 되었지, 얼마나 더 세간에서 뭇 사람들의 입에 저와 얽혀 오르내리려 하십니까. 그들의 입에서 나오지 않는 말이 없으며, 그 말들의 힘은 무섭고 대단한 것입니다, 전하.’
‘…….’
‘어릴 적의 정에 휘둘려 이러시는 것도 군주의 덕이 아닙니다. 돌아가십시오.’
호석이 절을 올렸다. 제게 절을 올리는 호석이 참으로 고집스러웠다. 그러나 정국은 안다. 이렇게 저를 모질게 내치는 호석은, 결국 그 자신이 아니라 저를 걱정하고 있음을. 정국은 애틋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젠 정말 궁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술에 빠져 산다고, 자네가 잊혀질 친우던가.’
‘…….’
‘가끔 오겠네. 내게도, 친우 하나쯤은… 지닐 기회를 주게.’
호석은 절을 한 자세 그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정국의 떠나는 발걸음 소리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나 싸리문 닫히는 소리가 나고 정국의 발걸음이 호석의 집에서 완전히 멀어졌을 무렵, 호석은 결국 참아왔던 눈물을 흘렸다.
참으로 어리석은 친구였다. 그리고 더 이상 밀어낼 수 없는 은인이었다. 친우 하나쯤은 지닐 기회를 달라는 정국의 그 말을, 호석은 차마 끝까지 밀쳐낼 수가 없었다.
*
그래서 가끔 정국은 호석을 찾아온다. 보통 오면 호석은 이런 상태였다. 술에 취해서 아무 말, 아무 행동이나 하는 상태. 또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셨구나. 정국의 탓하는 말에도 호석은 뭐, 왜, 뭐. 어쩌라고 그러십니까, 즈언하. 네?! 하고 말했다. 무엄하기 그지없는 말끝에다가 딸꾹, 하고 마무리를 하고 말아서, 정국이 가지가지 하는구나, 하고 어이없다는 눈으로 호석을 바라봤다.
“언제까지 이렇게 술만 마시며 시간을 버릴 테냐.”
“평생 이러고 싶습니다, 전하아. 죽을 때까지이.”
“…이제 궁으로 들어와 나를 도와주지 않겠느냐.”
정국의 그 말에 호석이 고개를 세게 도리질 쳤다.
“싫습니다. 절대로, 궁은 안 들어갈 겁니다.”
“아직도 궁이 그리도 싫으냐.”
정국의 물음에 호석은 치를 떨었다.
“그 무엇보다 더러운 곳입니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도륙을 당하는 곳이지요. 궁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변해서 나왔습니다. 모두 싹 다! 다 변해버렸습니다. 나라고 다르겠습니까?! 아예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또 다시 딸꾹, 하고 게슴츠레 눈을 뜨는 호석을 가만히 바라보던 정국은 그즈음 떠오르는 한 사람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혹시 말이다.”
“어응?”
“…아니다. 되었다.”
“뭡니까, 말을 하려다 말고.”
“되었대도. 이제 자작은 그만하고 나와 함께 마셔라. 술잔 하나 더 가져오너라. 술도 다 비었으니 술도 한 병 더 퍼오고.”
“에이, 귀찮게….”
“안주는 이 집에 눈을 뒤집고 찾아도 없을 것 같아 내가 궁에서 가져왔다. 빨리 움직이거라, 빨리.”
자리에서 터덜터덜 일어나는 호석의 뒷모습을 보며 정국은 못다한 말을 삼켰다. 혹시 궁에 들어오기 싫은 이유 중에는, 그 옛날 서로 연심을 품었던 남준도 있느냐고. 그리도 애틋하게 서로를 품었는데, 이제는 조금도 그립지도 않느냐고.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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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고 없이 올립니다. 이상한 거 있을 거 같은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ㅠㅅㅠ 가끔... 자신이 설명충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때가 있스니다. 자괴감이 듭니다...
대디에 하뜌 눌러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댓글 달아주신 쭝님과 비밀글님 감사합니다♥ 지금 대댓 달러갑니다! 오늘은 좀 빠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