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08.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08.
w.몽블랑
*
제 신분을 밝힌 남준의 말에 석진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무비사 정랑께서 여기까진 무슨 일이십니까.”
“아. 다름이 아니라, 이번 특별 경연 행사에 저희 병사들이 참석하게 되었는데 행사 진행 일정과 일시가 궁금하여 찾아왔습니다. 예조 관할이라 들었는데 정확히 어디 여쭈어야 하는지 몰라 이렇게….”
“그 일이라면,”
석진도 얼마 전 들은 이야기였다. 실무 담당이 어디 좌랑이었던 것 같은데, 누구셨더라…. 잠시 후 누군가가 떠올랐는지 석진은 아, 그분이시라면, 하고 말을 꺼냈다. 그런 석진의 말을 남준은 꽤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자르며 들어왔다.
“데려다 주시면 안 될까요?”
“예?”
“예조는 처음이라서요.”
석진이 눈을 깜빡인다. 눈동자가 따뜻한 갈색이었다. 남준은 그 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자 잠시 뒤를 돌아봤던 석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찾기 어렵지 않으실 텐데요.”
“제가 예조 건물 구조도 모르고 예조 근무하시는 분들도 잘 모르고 또,”
“그게 아니라… 저쪽에 오고 계시거든요.”
선배님, 하고 석진이 곁문을 통해 들어오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응, 무슨 일인가? 하고 석진에게 물음을 건네는 그에게 석진은 ‘여기 무비사 정랑이신데, 이번 경연 일로 여쭐 것이 있다 하십니다.’ 하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굳어버린 남준을 손으로 공손히 가리켰다.
“아, 자네가!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지. 이리 오게!”
“…하지만, …네….”
“그럼 저는 이만….”
더 볼 일이 없어진 석진이 고개를 숙였다. 남준도 급하게 꾸벅였다. 고개를 들자 이미 돌아선 석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걸어가는 모습마저 자세가 발랐다. 가볍지 않은 걸음걸이로 한 걸음 한 걸음 땅을 밟는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소박한 두루마기가 고왔다. 매화 꽃잎을 몰고 다니기라도 하는, 아니 매화 꽃잎 그 자체인 이 같이.
“…보게. 이보게, 무비사 정랑!”
“…예?!”
“걸음 빠른 젊은 사람이 안 오고 뭐하시나. 저 앞까지 가서 자네 찾았지 않는가.”
“아. 죄송합니다, 어르신.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빨리 오시게!”
예, 하고 대답한 남준이 그의 뒤를 따라 예조 건물의 다른 문으로 들어섰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남준은 뒤를 돌아보았다.
함께 하지 못한 그 짧은 시간을 아쉽게 만드는 사람을 만났다. 남준은 이 느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제 탓이 아니었다. 제 책임도 아니었다. 자신을 돌아보자마자 말을 잃게 만드는 사람을 제가 무슨 힘이 있어서 거부할 수 있었을까.
불가항력이었다고, 남준은 그리 생각했다. 또한 앞으로 예조로 오는 일은 깡그리 긁어모아 제가 가져오리라 다짐했다.
*
“석진아.”
“예, 아버지.”
“요즘의 윤기는 어찌 하고 있는 것 같으냐.”
김 진사의 질문에 석진은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떤 변화가 있다고 하기에도, 어떤 변화도 없다고 하기에도 어려웠다. 윤기는 분명 무슨 일인가를 꾸미고 있었다. 그러나 제게 그 패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분명 자신을 위해 제 편이 되어줄 것을 알면서, 제게 숨기는 것이 서운하기 짝이 없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다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윤기의 승진이 빠른 편입니다. 이조정랑도 나이에 비해 분명 높은 자리였는데 왕세자를 가르치는 선생이 될 것이라는 소문도 돌고 있으며, 그에 대해 투기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벌써 조정 내에 투기하는 자가 있단 말이냐.”
“예. 왕세자의 서연에 들어간다는 것은 결국 다음 권력에 대한 보증인지라….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윤기와 전하는 전혀 접점이 있어 보이지 않고, 때문에 사람들도 윤기의 능력이 비상한 줄만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도 그러하고요.”
“음….”
“만약, 윤기가 주상전하와 가까워진 것이라 해도 어떤 방법으로 주상께 다가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윤기는 제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아서요.”
“…그렇구나.”
김 진사는 시무룩한 얼굴의 석진을 바라보다 입가에 웃음을 띠우고 물었다.
“석진아. 윤기가 네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아 서운한 게냐.”
“…솔직히 말하면, 그러합니다.”
“왜 네게 이야기하지 않는지 모르는 건 아니잖느냐.”
석진은 머뭇거리다 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알면 안 돼. 위험해. 그래서 안 돼.’ 윤기의 목소리가 석진의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여전히 서운했다. 그러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석진을 보며 미소를 지었던 김 진사는, 이내 떠오른 생각에 웃음기를 지우고 목소리를 낮추어 이야기했다.
“윤기는 우리와 태생이 다른 아이다. 이미 멸망한 나라일지언정, 비록 음인일지언정, 그 아인 황제의 아들이야. 만약 선대왕이 그 나라를 없애버리지 않았다면 윤기는 우리와 전혀 다른 세상을 보고 전혀 다른 세상을 꿈꿨을 아이다.”
“…….”
“수국(洙國)의 황족들을 모두 처단하면서 나는 아내를, 그리고 너는 가엾게도 어머니를 잃었지. 그러나 윤기는 그때 제 부모와 형제, 제 나라, 제 백성, 그 모든 것이 짓밟혀 쑥대밭이 되었다. 이 나라 왕가에 대한 복수심이 깊을 수밖에 없어.”
촛불에 흔들리는 김 진사의 미간의 주름이 깊었다. 석진은 무릎을 꿇은 채 아버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김 진사의 말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힘이 있었다. 석진과 독대하는 넓지 않은 방이 비밀스럽기 그지없었다.
“사실 나는 윤기가 지금쯤이면 잊었을 거라고… 반쯤은 그리 생각했단다. 그땐 어린아이였으니, 어쩌면 잊은 채 살아가는 게 나을 거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윤기는… 하나도 잊지 않고 있었지.”
“…….”
“타는 듯한 마음의 불길을 그 어린 나이에 몇 년 간 아무도 모르게 속에 숨긴 아이다. 그런 윤기의 계획을, 그 생각을 우리가 모두 알 수 있을 리 없고… 또 말해줄 리도 없을 것 같구나.”
석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아버지, 그 모든 것을 윤기 혼자서 해낼 수는….”
“…없겠지, 그래. 나도 알고 있다.”
김 진사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생각하던 김 진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윤기가 아무리 홀로 지고 가려 한들, 그럴 수는 없을 게다. 언젠가 우리에게 해주어야 할 일을 말해주겠지. 우리 서운하더라도, 그때를 기다리자꾸나.”
…예, 아버지. 석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 진사의 말 대로였다. 항상 마음이 쓰였지만, 지금은 기다릴 때였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석진은 윤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동네의 아이들이 모여 함께 놀 때면, 윤기는 아이들과 섞여들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무표정에 가까운 하얀 얼굴로 무리에서 떨어져 저만치서 서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윤기에게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았지만, 석진에게 윤기는 항상 그렇게 보였다.
나와 있어줘. 나를 안아줘. 나를 사랑해줘.
석진은 그런 윤기의 곁에 있었다. 윤기를 안아주었다. 그럼 어린 윤기는 제게 안겨서 가만히 숨을 쉬었다. 석진은 그 아이의 분내가 좋아서 한참동안을 안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된 그 아이가 제 처지도 같았고, 불쌍도 했다. 제가 줄 수 있는 애정을 다 주리라 생각했다.
석진은 그래서 이렇게 새벽마다 제게 안겨드는 걸까, 생각했다.
윤기는 가끔 지난번처럼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석진을 찾았다. 안아줘. 형, 나 안아줘…. 젖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며 그리 이야기하면, 석진이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윤기는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석진이 윤기를 안아주면 윤기는 석진을 마주 안고 바르르 떨었다. 아직도 향이 나…. 윤기는 다른 어떤 향을 찾듯 석진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쉬면서도, 그것이 만족스럽지 못한지 이내 미간에 주름을 잡곤 더 깊게 안겨들었다. 석진은 아무런 향도 맡지 못했는데, 윤기는 향이 사라지지 않는다며 괴로워했다. 그러다 그걸로도 성에 차지 않으면 윤기는 눈썹 끝을 늘어뜨리곤 세상 가녀린 얼굴로 석진에게 애원하듯 물었다.
“입 맞춰도 돼…?”
석진은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윤기는 조심스레 다가와 자그마한 제 혀끝을 내밀어 조르듯 입술을 맞대왔다. 그러면 석진은 혀로 그를 감싸며 위로하듯 윤기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어 주는 것이다.
사실 조금 머리가 크고 나서, 처음 윤기가 제게 입을 맞춰왔을 때 석진은 내심 놀랐었다. 그러나 굳어버린 제게 울 듯한 표정으로 ‘싫어…?’ 하는 윤기의 말에 석진은 차마 싫단 말을 할 수 없었다. 싫은 것보다 당황스러움뿐이어서, 그보단 생각보다 너무나도 싫지 않아서 석진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윤기는 제게 환하게 웃어보였었다.
하긴, 이미 그조차도 너무나 예전 일이었다. 그 하얗고 외로운 얼굴이 저를 불쌍히 여겨 달라 다가올 때면, 석진은 아무것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석진은 아직도, 윤기가 제게서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얻어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윤기의 행동의 동기가 무엇인지, 제 행동이 윤기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석진은 전혀 알지 못했다. 생각해본 적조차 없었다.
*
“지금 퇴청하십니까.”
“으핫!”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석진이 이상한 소릴 내며 놀랐다. 놀란 마음에 커다랗게 허우적댔다. 그에 석진을 바라보던 그가 커다랗게 웃었다. 석진은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라서는 그를 향해 웃지 마십시오, 하고 말했다. 자신을 놀래킨 건 언제부턴가 자신의 퇴청길에 항상 나타나는 남준이었다.
“오늘 즈음 되면 그래도 이곳에 제가 있을 거라 이미 예측하시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계실지도 모른다 생각은 했습니다. 하지만 이리 놀래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놀래킨 것이 아니라 그대가 놀라신 거지요. 저는 그저 퇴청길인지 여쭈었을 뿐입니다.”
“…….”
석진은 말문이 막혔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무어라 말하려다 한숨을 쉬곤 제 가슴을 쓸어내리는 석진의 옆으로 자연스레 남준이 와서 섰다. ‘오늘은 별 일 없으셨습니까?’ 하고 묻는 남준에게 석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굉장히 평화로운 하루였습니다. 방금 전까지는요.’ 하고 말했다. 남준은 ‘그럼 이제 평화로운 하루는 접으시고 저랑 즐거운 하루를 시작하시지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익숙한 눈웃음을 제게 보였다. 석진은 어이가 없어 남준을 바라보다 푸스스 웃어버리고 말았다. 남준을 보면서 웃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석진 스스로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많은 것이 이상했다. 그 느낌이 이상했고, 이 시간이 기다려진다는 것도 이상했고, 알 수 없는 두근거림도 이상했다. 석진은 이게 무얼까, 하고 생각했다. 남준에게 말하고 물으면 대답을 얻을 수 있을까. 제 감정이 무엇인지 남준은 알고 있을까. 하지만 석진은 차마 남준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것이 왜인지, 남준에게 묻는 것만은 할 수가 없었다. 얼굴 가득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천천히 따라가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오늘은 함께 퇴청하며 집으로 가고 싶었는데, 헛걸음을 한 셈이 되었다. 누군지 모를 이가 석진의 곁에 서 있었다. 윤기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고 몇 걸음 뒤에서 천천히 걸으며 그들을 살폈다.
집으로 가는 길 문득문득, 자신은 지금껏 잊고 있었던 석진의 환한 웃음이 보였다. 저러한 미소를 본지가 제겐 너무나 오래인데, 그 잃었던 웃음을 찾아낸 이는 제가 아니었다. 윤기는 자기도 모르게 뒷짐을 지고 있던 주먹에 힘을 주었다. 석진의 앞에 있는 이의 이름부터 알고 싶었다. 이름부터 알고, 그 다음은 차차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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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찌 특집편인듯(...)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뜌 눌러주신 분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