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슙 외 : 화무십일홍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15.

몽블랑11 2017. 4. 27. 00:03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15.

w.몽블랑




*



집으로 가는 동안 남준은 평소 같은 것을 물었다. 오늘은 별 일 없으셨습니까. 저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혹시 제가 없는 동안 누가 괴롭히진 않으셨습니까. 마지막 질문에 석진은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비사 정랑께서 매일 퇴근길을 기다리던 저를, 괴롭힐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럼, 그간… 제가 보고 싶지는 않으셨습니까.”



웃고 있던 석진의 웃음이 저도 모르게 사라지며 발걸음이 멈췄다. 그를 따라 남준의 발걸음도 멈췄다. 남준도 웃고 있지 않았다. 주먹을 쥐었던 남준이 제 손의 힘을 풀며 억지로 웃어 보이려 애썼다. 그러나 제 뜻대로 잘 되지는 않았다. 아무 말도 없는 석진이 답답했다. 남준은 다시 석진에게 물었다.



“저를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

“그간 저를 기다리신 적, 없으십니까.”



석진의 말간 눈동자가 저를 향했다. 석진의 표정을 남준은 읽을 수 없었다. 그 투명해 보이는 눈동자 뒤로 감춰진 그 생각을, 남준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오늘 석진을 기다리고 있던 건 남준으로서도 반쯤은 도박에 가까웠다. 또 다시 자신을 내치면 어떡하지 생각하면서도, 오늘은 석진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국에게 불려갔던 그 뒤로, 제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생각하니 초조했다. 석진의 대답이 굼뜨게 느껴졌다. 



“정랑이, 오시길… 기다렸습니다.”

“…하.”

“다가오지 마시라 해놓고, 기다렸다고 말하면… 못된 사람이란 것을 잘 알고 있으나,”

“…….”

“기다렸습니다. 참으로… 못된 마음이오나.”



남준은 석진을 마주보다가 손을 잡았다. 손을 잡다가 그의 손을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순순히 저와 눈을 마주치고 손을 잡혀주고 제게 끌려와 안겨주는 제 앞에 있는 꽃 같은 이의 존재에 감사했다. 품 안에 안긴 석진에게서 옅은 향이 났다. 석진의 체향일 것이나 남준에겐 향기롭기 그지없었다. 남준은 석진의 어깨에 살며시 턱을 기댄 채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전해드릴 말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

“전하께 출정을 명 받았습니다. 수일 내로 병사들과 함께 남해로 출정하게 될 것입니다.”

“…네?”



화들짝 놀란 석진이 남준의 품에서 떨어졌다. 그 솔직한 표정에 남준이 웃었다.



“뭐… 예상했던 일입니다. 어릴 적 아버지가 그쪽에 계셨던 터라 살아본 적이 있어서 그쪽 지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그곳에서 공을 세우셨던 터라 아마 그것을 알고 있는 대신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저런 연유로 조정에서 저에 대한 추천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전하께서 직접 부탁하신 일이기도 하고.”

“전하께서… 말씀입니까.”

“예. 예상했던 일이지만 한동안 그대를 못 볼 텐데 이대로 허송세월을 하기엔 아쉬워서, 그리고 그곳에서 죽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으나…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니 후회 없이 행동하고 싶어서, 찾아온 것입니다.”

“…….”



석진은 혼란스러웠다. 그 두 눈동자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석진이 남준의 손목을 살며시 붙들었다. 놓아주기 싫다는 듯. 남준은 그것이 안쓰러워 석진의 어깨에 올려놓은 손을 다정하게 토닥였다. 석진은 아무 말이 없었으나 남준은 그 마음을 꽤나 헤아릴 듯 하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 없을 것이니.”

“하오나….”



남준은 장난스레 씩 웃고는 짐짓 심각한 척 입을 열었다.



“그리 걱정되시면, 제가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왠지… 그렇게 하면 이길 것 같아서요.”

“말씀하세요.”



남준이 눈을 감았다. 그리곤 제 입술을 내밀었다. 처음엔 그것이 무슨 뜻인가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석진이, 이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선 ‘…네? 그, 제게… 저, 어….’ 하고 되도 않는 말을 터뜨렸다. 남준은 한쪽만 실눈을 뜨고는 피식 웃으며 석진을 향해 재촉하듯 말했다.



“말을 못 알아들으신 건 아닐 테고.”

“…….”

“안 해주실 겁니까? 해주시면 이기고 정말 돌아올 것 같은데.”

“아….”



반드시. 남준이 덧붙인 말에 석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인적은 드문 곳이었다. 노상에 아무렇게나 핀 나무들 뒤로 숨듯이 선 두 사람이었다. 석진이 좀처럼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남준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지고 오지요, 뭐…. 꼭 이긴다는데도 해주지 않으신다는데…. 좋아한다면서 보는 사람도 없는데 해주지도 않으시고…. 제가 이기는 건 나라가 이기는 건데 그대의 애국심이 그 정도라면 어쩔 수,”



남준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은 석진이 말을 하고 있던 남준의 입술에 제 입술을 살며시 갖다 대었다. 갖다 댈 땐 눈을 꾹 감고 있던 석진이 스치듯 입을 맞추곤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남준은 그 감촉이 꿈결인가 생각하였다. 부드럽고 어떻고의 느낌이 없을 정도로 찰나였다. 석진은 눈을 맞추지 못하고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남준은 조금 애가 닳았다. 이게, 이게 아닌데. 전혀 닿은 것 같지도 않았다. 조금 더 닿고 싶었다.



“……!”



남준이 석진의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부드럽게 끌려와 입술이 맞닿자 남준이 살며시 혀를 내어 석진의 입술을 작게 핥았다. 그 노골적인 느낌에 눈을 커다랗게 떴던 석진은 이내 스르륵 눈을 감았다. 제 혀를 내자 그것을 입술로 감아오는 남준이 느껴져 석진은 작게 웃었다. 남준과 얼굴을 가까이 붙인 탓에 똑바르게 썼던 갓이 조금 뒤로 넘어갔지만, 석진은 그대로 제 팔을 뻗어 남준을 껴안았다. 그 품이 따뜻하고 커다랬다. 저를 마주 안아주는 두 팔이 포근했다. 그것이 석진에겐 마치,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와 입을 맞추고 포옹한 것처럼 느껴졌다.



*



“중전마마, 홍문관 부제학께서 오늘 아침, 알현을 청하셨습니다.”

“홍문관 부제학…?”



지민은 제 머릿속으로 제가 아는 인물들을 넘겼다. 홍문관 부제학이라면 정3품 관직으로 꽤 높은 자리에 있는 자다. 자문을 구할 만큼 왕과도 퍽 가까운 자리였다. 제가 함부로 만남을 거절할 수 없는 높은 관직이라는 것은 알겠으나 홍문관 부제학이라니, 지민의 머릿속엔 그런 사람은 없었다. 혹시 궁녀가 이름을 들어놓았는가 싶어 지민은 그의 이름을 물었다. 지민의 질문을 받은 궁녀의 눈동자가 기억을 떠올리듯 또르르 굴러갔다.



“성은 김, 성함은 윤 자, 기 자로 들었습니다.”

“김윤기…?”



그의 이름을 입에서 한 번 곱씹어 보았다. 제가 아는 한, 그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그는 어째서 저를 만나려 하는 걸까. 제게 무슨 이야기를 가져오는 걸까. 괜한 불안감에 지민은 제 품의 아이를 좀 더 꽉 안아보았다.



*



“중전마마, 부제학 김윤기 인사드립니다.”

“…….”



지민은 그가 들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를. 윤기의 허리가 굽어졌다가 펴지는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지민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지는 것을 궁녀들 모두가 보았다. 지민은 낯빛이 창백해져선 강보에 싸인 아이를 쥔 손을 떨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물러라.”



지민은 그의 인사도 받지 않고 주변인들부터 물렸다. 그러나 교태전 내부 인물 이외에 외간남자와 중전을 단 둘이 남겨두는 것은 어딘가 켕기는 일이었다. 그것을 눈치 챘는지 경계하는 표정으로 아이를 꽉 안고 작게 떨고 있는 지민 대신 여유로운 표정의 윤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금방 끝날 터이니 자리를 잠시 비켜주시오.”



윤기의 말에 궁녀들은 머뭇거리면서도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교태전의 문을 닫은 궁녀들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민을 바라보았으나 지민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문을 꼭 닫았다. 그렇게 문이 닫히고 교태전에 남은 이는 지민과 윤기, 단 둘이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뜻밖에도 지민이었다.



“…음인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지민의 조용한 목소리에 윤기는 차분하게 답했다. 윤기는 자신과 지민 중 자신이 위라는 것을 알았다. 두 사람의 신분을 떠나,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오늘 지민은 자신이 왜 찾아왔는지 알 리 없었으므로.



강보를 손이 하얗게 되도록 꽉 쥔 지민의 손이 그를 증명하고 있었다. 윤기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자신보다 잃을 것이 많은 이였다. 쥐고 있는 것이 많아 저를 두려워하고 있음이 뻔했다. 그렇게 지민이 파들대면서도 꼿꼿이 앉아 제게 지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려 하는 모습이, 윤기에게는 퍽 우스웠다.



“음인의 몸으로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는 걸로 압니다.”

“불가능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잘… 이용만 하면.”

“…무엇을 이용한단 말입니까.”

“글쎄요.”



윤기가 빙긋 웃었다. 저 젊은 나이에 홍문관 부제학이라는 큰 자리를 꿰차기 위해, 과연 무엇을 이용했을까. 그 답을 알 것만 같은 지민은 제 잔뜩 틀어진 심기를 되돌리려 무던히 애썼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아 애꿎은 강보만 꽉 쥔 채였다. 그제야 연두색 비단에 싸인 아이가 눈에 들어왔는지 윤기가 아이의 얼굴을 넘겨다보며 웃었다.



“전하를 빼닮으신 귀여운 대군마마시군요.”



지민은 윤기에게서 아이의 얼굴을 숨겼다. 왠지 보여주기도 꺼림칙했다. 그런 지민의 한껏 날선 경계를 느낀 윤기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진정하시지요, 마마. 제가 오늘 이리 온 것은 대군마마를 해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는 윤기의 말이, 참으로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전하와의 사이에서 그런 귀여운 대군마마를 두시고도 다른 이와 만남을 가지시는 것은, 중전으로서 맞는 태도인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



지민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끼쳤다. 어찌해서 알고 있는가. 저자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저 사람을 찾고자 보낸 하룻밤을, 어찌하여 저 자가 알고 있을까. 지민은 두방망이 치는 제 심장을 이제 안정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불안한 얼굴로 윤기를 바라보았다. 윤기는 지민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미미하게 정국의 향과 섞인 그의 푸른 새벽의 향기가 음습하게 지민을 감쌌다.



“그리 궁에 오래 머무르시고도, 궁의 생리를 아직도 모르십니까. 바로 곁에 있는 분과 몸과 마음을 나누시고도,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궁 안에 새어나가지 않는 비밀이란 없는 법이지요.”

“…….”

“밖에 서 계신 분은 양인이 아니실 텐데, 그래도 좋으셨습니까.”



윤기는 싱긋 웃고는 두어 걸음 다시 지민에게서 물러났다. 하얗게 질린 그 표정이 볼 만했다. 오히려 너무 쉬워서 따분할 지경이었다. 궁에 있기엔 약하디 약한 자였다. 그런 자가 중전이라는 커다란 자리에 앉아 여태까지 버틴 것도 용했다.



지민은 달달 떠는 제 손을 제 다른 손으로 꽉 잡아 숨겼다. 그리고 윤기를 향해 물었다.



“내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원하는 거라니요?”

“내게 원하는 것이 있으니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겠소.”

“그 말씀을 제가 마마께서 ‘인정’하시는 것이라 보아도 괜찮겠습니까.”

“…다른 말 말고, 원하는 것을 말하시오.”



이번엔 꽤나 강하게 나오는 것이 윤기의 마음에 이제 조금 들었다. 윤기는 그제야 해맑게 입동굴까지 보이며 웃었다. 저를 올려다보는 눈길이 꽤나 매서웠다. 덕분에 윤기는 지금 이 자리가 꽤 재밌었다. 보이는 것처럼 하얗고 말랑말랑하게 굴어선 분명 재미가 떨어질 테니까.



“마마께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다만?”

“앞으로 대군마마의 안녕을, 신경 쓰셔야 할 것입니다. 저 또한, 전하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음인이니까요.”



대군이라니. 대군은 아직 아기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 이제 고사리손으로 눈을 깜빡이며 지민의 손가락 하나 정도를 꽉 잡기 시작한 그런 아이에게, 윤기는 잔혹한 얼굴로 아이의 안녕에 대해 말했다. 지민은 겁에 질린 얼굴로 제 품에 안긴 아이를 더 꽉 안았다. 그 모습에 윤기의 웃음소리는 조금 더 커졌다. 지민에게 윤기의 그 천진난만한 웃음은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윤기는 고개를 숙이고 교태전을 떠나려했다. 그런 윤기에게 지민이 다급히 그를 붙잡듯 말을 꺼냈다.



“음인과 양인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까.”



나가려던 윤기가 지민을 향해 돌아섰다.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잘은 모릅니다.”

“아주 희미하지만… 당신에게서 전하와 같은 향기가 납니다.”

“글쎄요. 지난밤 전하와 함께한 증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윤기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며, 오히려 지민을 비웃으며 교태전을 나섰다. 그러나 윤기는 모르고 있었다. 제 향에 미미하게 섞인 정국의 향의 존재를, 그 의미를. 주변에 음인, 양인이라곤 찾기 힘들었고 그에 대해 무엇이라 배운 적도 없었다. 윤기조차 각인으로 정국에게 묶여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은, 이 너른 궁에서 지민 딱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지민 또한 윤기에게 이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지민이 할 수 있는 하나의 작은 복수였을 지도 몰랐다.



*



+)

안녕하세요, 게으름뱅이 몽블랑이에오 ^ㅁ^! 이야아 어느 새 이렇게 일주일 가까이 흘러버릴 줄 몰랐지 뭡니까! (석찌 톤)

죄송합니다. 두 손 들고 벽보고 반성할게오... 집에 생각하는 의자도 하나 살까봐오... 크흡. 근데 이렇게 가끔 손이 느린 타임이 와요... 저번주처럼 빠른 타임도 오는가 하면 또 이런 때도 오고 그러는 거겠조? 아마도 ㅇㅅㅇ...


어... 윤기가 저희가 못 보는 사이에 po승진wer을 했습니다.(정5품->정3품) 물론 그건 다 전하가 이케이케 해서 자기 곁으로 끌어올린 겁니다 흫하핳! '갑자기 홍문관 부제학이라뇨 ㅇㅅㅇ?' 하고 의문을 품으신 분들을 위해 이렇게 또 쓸데없는 설정풀이를... 핳하^ㅁ^


지난편에 하뜌! 하뜌하뜌! 눌러주신 분들과, 댓글 남겨주신 세라피나님, 지민럽님 감사해오♥ 지금 대댓 달러갑니다 후훙♡

또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야금야금 고치러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