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슙민/국뷔] 인어공주 이야기 17.
[슙민/국뷔] 인어공주 이야기 17.
상태가 안정됨에 따라 일반 병실로 옮겨진 지민은 도통 깨어날 줄 몰랐다. 깨어나서 잘 먹고 잘 쉬어야 상처도 하루빨리 아문다고 했는데, 매일매일 잠만 자는 지민은 그저 말라만 갔다. 그걸 매일매일 와서 오늘은 깨어날 거라는 희망고문에 시달리다 돌아가는 정국도 점점 수척해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푸석해진 얼굴로 밤늦게 돌아가려는 정국을 붙든 건 석진이었다.
“이봐요, 전정국 씨.”
“…뭡니까.”
피곤에 찌든 정국의 얼굴이 석진을 바라본다. 석진이 붙든 게 꽤나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석진은 그런 정국의 표정을 무시한 채 제 할 말을 이어나간다.
“요즘 잠은 좀 자요?”
“네, 잡니다.”
“근데 얼굴이 왜 그래요. 밥은 먹어요?”
“…….”
“일도 안 하고 이렇게 병원에만 있어도 됩니까?”
“…선생님이 상관할 바 아니지 않습니까.”
“왜 요즘은 김태형 씨랑 같이 안 다녀요?”
“…하…. 그만 합시다.”
태형의 얘기에 결국 짜증스럽다는 얼굴로 손사래를 친 정국이 돌아서려는데 석진이 다시 정국을 붙든다.
“내가 정말 할 말이 있어서 불렀어요.”
“뭡니까. 빨리 말씀하세요.”
“지금 지민이의 경우 의식을 찾지 못하는 것에 불과할 뿐 몸 상태는 나쁘지 않은 편이에요. 앞으로 조금만 더 몸이 나아진다면 집에서 요양하는 것도 괜찮고요. 그런데 그런 사람 눈뜨기만 기다려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막말로 지민이는 영양제라도 맞고 있지만 지금 전정국 씨는 밥도 제대로 안 먹고 다니잖아요.”
“…….”
“우리도 정해진 시간마다 회진 돌면서 환자 봅니다. 이쪽은 우리한테 맡기고 당신은 당신 일을 하는 게 어때요.”
석진의 말이 끝나자 정국이 빤히 그를 바라본다. 석진은 패기 있게 말은 다 뱉어놨지만 사실 정국이 한 대 치기라도 할까봐 좀 긴장한 상태였다. 아무 말도 않고 바라보기만 하니 더 그랬다. 석진은 ‘아무래도 내가 말을 잘못했나봐…!’ 하고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정국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의외였다.
“그거… 선생님이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까?”
“네?”
“누구한테 들어서 전해주는 말 아니고?”
석진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정국이 피식 웃는다.
“선생님이 나를 걱정을 다 해주고 별일이네요.”
“…….”
“내가 여기 하루 종일 있어서 부담스러우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긴 조폭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병원 입장에서 보기 좋진 않겠죠.”
“…….”
“가끔 오겠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 지민이 형 깨어나면 꼭 연락 주세요.”
가볍게 목례를 한 정국이 뒤돌아간다. 석진은 그런 정국의 뒷모습을 응시한다. 이상하게도, 그의 뒷모습에 연민이 생겨난다. 절대 불쌍해질 수 없는 사람임에도, 그래서 석진은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조금 불쌍했다. 정국이 모습을 감추고 나서 석진의 뒤로 태형이 나타난다. 석진은 갑자기 나타난 태형에 조금 놀란 듯 주춤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아, 태형 씨.”
“이런 부탁 드려서 죄송합니다. 제가 이사님께 직접 드릴 수 없는 말씀이라 선생님께 부탁드렸습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네.”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 그럼.”
태형이 목례를 하고 정국이 간 길로 걸어 나간다. 그런 태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석진에게서 그런데, 하고 태형에게 하지 못한 말이 결국 입술 밖으로 샌다.
“김태형 씨, 당신도 많이 말랐어요. 그거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네….”
씁쓸한 얼굴로 석진이 돌아서 걷기 시작한다. 괜히 입맛이 쓴 밤이었다.
*
○○서 강력1팀 사무실 안. 듬성듬성 출동을 나간 자리를 빼곤 꽤나 빼곡이 앉은 형사들이 취조와 대질심문, 그에 따른 서류작업 등 다양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엔 윤기도 있었다. 윤기는 눈에 불을 켜고 서류를 읽다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서류에 눈을 처박고 양쪽 귀를 막은 채 팔꿈치를 책상에 괴곤 골똘히 생각 중이었다. 그런 윤기가 이상했던지 김 형사가 윤기를 툭, 친다.
“아, 깜짝이야.”
“야 뭔 생각하냐.”
“아 선배님, 지금 열심히 작전 짜는 중 아닙니까. 아….”
윤기가 인상을 쓰며 툴툴거리자 김 형사는 ‘작전’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한 듯 ‘뭔데. 내가 들으면 안 되는 거냐, 어?’ 하고 묻는다.
“예. 아직 안 됩니다.”
“이 새끼, 치사하게. 내가 준 자료 보고 있으면서 아이고 선배님 제발 도와주십쇼 하고 넙죽 절은 못할망정… 같이 해, 인마!”
“아이고 선배님 제발 꺼지십쇼.”
“이 새끼 말본새 봐라.”
윤기가 보던 서류를 가져가려고 김 형사가 뻗는 손을 쳐내며 에헤이, 하고 훠이훠이 손을 내젓는 윤기에도 김 형사는 끈질겼다. 자꾸만 몸을 붙이며 귀찮게 굴다 윤기가 여전히 말을 듣지 않자 팔 안쪽에 목을 넣고 조르기 시작한 김 형사의 행동에 결국 윤기는 항복을 외쳤다.
“아 얘기할게요! 합니다, 해요.”
“아, 새끼. 진작 그럴 것이지. 넌 진짜 독한 놈이야.”
“하이고. 누가 할 말을.”
“그러니까 우린 형사가 천직이라니까.”
“말이나 못하면.”
“그래서. 어쩔 건데.”
윤기는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김 형사 앞으로 BH 인더스트리의 사업 자금을 정리한 표를 들이밀며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색이 다른 형광펜으로 마킹이 된 곳 중 빨간 펜으로 한 번 더 체크된 부분을 가리키며 윤기가 입을 열었다.
“여기 말이에요. 이게 BH 인더스트리 초반에 사업 시작할 때 자금 들어온 것들인데, 지금 표시된 데가 전부 유령회사란 말이에요. 조사해 보니까 그냥 명의만 덜렁 있거나 사무실 하나만 있는데 그나마도 비어있는 회사들인데, 여기 보면 지금 투자금이 엄청나잖아요. 근데 이 회사들이 이런 투자금을 낼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안 돼. 혹시나 해서 내가 다 세무표 뽑아봤어요. 역시나 안 돼. 그런데 이게 보면 다 언제쯤 들어온 돈이냐. 전정국이 이 회사에 대표이사로 앉았을 때쯤의 일이란 말이죠.”
“어. 그래서.”
“내 생각엔 이게 전정국이 회사 이름을 빌린 것 같은데 그럼 어떻게든 전정국이랑 연줄 있는 회사들일 거 아니에요. 아무리 조폭이라도 무턱대고 어떤 사장한테 가서 ‘야 인마 니네 회사 이름 좀 빌리자.’ 하고 그러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어. 연기하지 말고 설명을 해.”
“씁, 그 한마디를 못 들어주네…. 그래서 내가 여기 이 유령회사들의 대표들 이름을 전부 뒤졌단 말이에요. 어떻게든 전정국이랑 연결된 사람이 있을까 하고. 근데 오늘 아침에 내가 잭팟을 찾았다 이거예요.”
하며 윤기가 한 이름에 빨간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친다. ‘정일찬’이었다. 그걸 본 김 형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 이 새끼. 양강회 대가리 아냐?”
“그니까. 혹시나 해서 사업자 등록증 확인해 보니까 같은 사람 맞더라고요. 보면 정일찬이 회사가 투자금액이 제일 커요. 그리고 꾸준하고. 다른 회사는 몇 년 안 지나서 자금이 끊겼는데 여긴 최근까지 투자를 하고 뭐 주식 배당금 식으로 이자도 받아가고 그랬던 걸 보면, 내 생각엔 돈은 다 여기서 나온 것 같애.”
“돈이? 이 많은 게? 양강회도 끽해야 그냥 조직폭력배인데 이 정도 돈이 어디서 샘솟냐.”
“아, 형님. 우리 양강회 몇 번 잡았잖아요. 왜 잡았는지 기억 안 나요?”
윤기의 말에 김 형사가 무언가에 맞은 듯 아! 하고 소릴 지른다.
“마약?!”
“그렇죠.”
“이야…. 돈이 이 정도가 구르려면 규모가 거의 전국구든가 아니면 아예 수출까지 했겠는데.”
“나도 그럴 것 같은데 그쪽까지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이 없어서…. 아무튼, 근데 이 마약이란 게 손 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보통 한 번쯤 대보기 마련이잖아요.”
“…그래서.”
“난 그 생각을 하는 거죠. BH 임원진이나, 아니면 적어도 전정국이는 마약하지 않을까, 하고.”
“…….”
“그냥 내 생각인데, 얜 10대에 소년원도 갔다 오고 여기 들어왔으니까 좀 무서울 것도 없었을 거 같고, 뭐 이걸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생각도 없었을 것 같아서요. 손대긴 쉽고, 그렇다고 누가 곁에 있어서 말리지도 않았을 것 같고. 근데 어릴 때 시작하면 끊기가 좀 힘들잖아요, 뭐든. 그러니까 지금까지도 뭐, 가끔이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인데… 문제는….”
윤기가 제 머리를 긁으며 쓰읍, 하는 소리를 낸다. 김 형사는 ‘왜? 뭐가 문젠데?’ 하고 물었다.
“도핑 테스트를 할 핑계가 없다는 거죠.”
“아….”
“그리고 지금 100퍼센트 마약을 하고 있다,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거니까 만약 아니라면 그것도 좀 큰일이고…. 기업 이미지 타격 뭐 이딴 걸로 고소하면 아마 벌금 때문이든 합의금 때문이든 저 거지될 걸요.”
“그렇지. 걔넨 또 변호사단이 빵빵해서.”
“누가 아니래요. 솔직히 거지되는 것도 문젠데, 그것보다 마약으로 한 번 걸리면 그 새끼들 꽁꽁 숨을 거 아니에요. 아예 기척도 못 찾게. 그럼…, 그땐 박지민 뭘로 찾아옵니까.”
걘 나밖에 구해줄 사람이 없는데. 시무룩해진 윤기는 ‘그래서 지금 길이 막혔다, 이겁니다.’ 하며 의자 위에 늘어진다. 그러다가 다시 책상으로 와서 서류를 붙든다.
“아, 뭐 꼬리라도 잡히면 그냥 그거 빌미로 꽉 잡고 쭉쭉쭉 잡아당겨서 몸체를 끌어낼 텐데 뭐가 없어….”
구시렁대면서도 서류에서 눈을 놓지 않는 윤기에 김 형사는 ‘나도 서류 한 부 복사해줘. 보다가 뭐 생각나면 나도 말해줄게.’ 하고 말했다. 그러자 윤기가 눈을 접으며 ‘고맙습니다, 선배님.’ 하고 말해 김 형사는 ‘이럴 때만 예의 차리지, 저거.’ 하며 웃는다.
사실 김 형사는 윤기가 다인을 돌려받은 후엔 이 사건에서 손을 뗄 줄 알았다. 비단 김 형사뿐만이 아니라 팀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었다. 지긋지긋하게 윤기를 괴롭힌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얼마 전 팀장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그 증거였다.
평화롭던 오후에 걸려온 전화에 처음엔 조용하던 팀장이 얼마 후 ‘민 형사 바꿔보쇼!’ 하더니 ‘민 형사 무슨 일이야?! 피라니, 어디 다쳤어?! 지금 자네 어디야?!’ 하고 물었다. 그 커다란 목소리에 팀원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 제가 아니라… 박지민이… 박지민이 총에….
‘넌. 넌 무사해? 애는?’
- 저흰, 저희는 둘 다 무사합니다. 그런데…, 하아….
윤기의 그런 목소리를 처음 들은 팀장은 긴급 휴가를 내려 윤기를 집에서 며칠 간 쉬게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팀장은 윤기의 집을 방문했다고 들었었다.
그렇게 윤기를 괴롭힌 사건이니 질려서라도 그만두겠지 싶었던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윤기는 다시 사건에 달라붙었다. 그만 사건에서 빠지라는 팀장의 말도 고집스럽게 듣지 않았다. 이유라곤 별로 없었다. 지민을 구해 와야 한다는 것, 그게 다였다. 지민과 안전가옥에서 몇 달 간 같이 지내서 정이 들어 그런 건지, 윤기는 지민을 찾아오기까지는 손을 뗄 마음이 없어 보였다. 결국 팀장도 손을 들고 윤기더러 ‘네 마음대로 해라, 네 마음대로.’ 하고 말했고 윤기는 그의 말대로 자신 마음대로 하는 중이었다. 자신이 처리해야 할 일들을 꼭꼭 해내면서도 지민의 사건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일을 처리해내는 윤기의 속마음은, 팀원들 아무도 몰랐다.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그 순간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자신의 마음이라도 전하고 싶어 하던 지민의 슬픈 고백을 듣지 않았던 이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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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기의 그림자라도 되고 싶은 태태. 꾸기는 태태가 뒤에 서 있었다는 걸 눈치챘을까요, 아님 몰랐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