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슙 외 : 화무십일홍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26.

몽블랑11 2017. 6. 27. 12:05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26.

w.몽블랑




*



평소 같은 밤길이었다. 풀마다 이슬이 맺힌 촉촉한 새벽의 길은 스산하리만치 고요했지만 윤기는 그 고요함이 제 피부 같이 느껴졌다. 그건 아마도 제 향의 탓일 지도 몰랐다. 정국과 몸을 섞고 나면 제게도 느껴질 만큼 피어오르는 제 새벽향기가 이제와 낯설다면 이상할 것이었다. 정국이 잠이 든 사이 곁을 빠져나와 궁을 나올 때쯤, 옅어져 버린 숲의 향기에 어딘가 한 곳이 텅 빈 듯 외로움을 느낄 때면 언제나 같은 하얀 달빛이 말 없는 친구처럼 은은히 제 길을 비춰주곤 하는 것이었다. 저 달빛만큼은 제 마음을 알고 있는 것 같아 윤기는 묵묵히 제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집에 다다를 즈음이었다. 느낌에 무언가 이상했다. 윤기는 평소 같은 고요함이 깨진 듯한 기분에 제자리에 멈춰섰다. 누가 있는가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해도 뜨지 않아 이제야 간신히 산골짜기만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녘의 시작 즈음에 무언가가 보일 리 만무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윤기는 주위를 둘러보다 이내 발걸음을 서둘렀다. 무언가 다른 새벽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은 찰나의 것이었다.



“읍…!”



어딘가에서 순식간에 다가와 제 입을 틀어막는 빠른 손놀림에 윤기는 소리 한 자락 내뱉지 못했다. 그리고 빠르고 정확하게 찔린 혈 자리에 그 자리에서 다리를 푹 꺾으며 쓰러진 윤기를 가볍게 어깨에 얹고 날 듯이 사라져 버리는 데에야, 윤기도 마치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인 양, 그 시간에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양, 그 자의 손에 움켜 쥐인 채 사라져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



날이 밝고부터 대전에 앉아 일을 시작한 정국이었다. 아침도 거르고 점심마저 거르려는 것을 내시들이 만류하여 간신히 몇 술 뜨고 다시 자리에 앉은 정국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내시가 정국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전하, 남해로부터 밀서가 도착했습니다. 급한 일인지 무비사 정랑이 직접 밀서를 가져와 전하를 뵙겠다 합니다.”

“…알았다.”



조심스레 다가와 제 귓가에 작게 이야기하는 내시의 목소리에 정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비사 정랑이라면, 남준이었다. 남해로 출정했던 남준이 밀서를 가져온 것이라면 그 발신자는 뻔했다. 정국은 대전에 있던 관리들을 자연스럽게 물리고 나서 환관에게 ‘정랑을 들여라.’ 하고 말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대전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은 남준에게선 급히 말을 타고 달려온 기색이 역력했다. 대문을 들어오며 그래도 대충 의관을 매만진 모양이었지만, 귀 뒤로 아무렇게나 넘겨진 머리칼과 촉촉이 젖은 이마, 그리고 아직 가라앉지 않은 남준의 숨소리가 그러했다. 남해에서 여기까지 달려왔으면서, 조금도 쉬지 않고 바로 이곳으로 온 모양이었다.



정국은 남준이 들어와 예를 올리자 대전에 있던 최측근마저 모두 내보냈다. 그리고 왕좌에서 내려와 남준의 앞에 섰다. 남준은 그제야 밀서를 허리춤에서 꺼내 정국을 향해 두 손으로 올렸다.



“정호석이 보낸 거겠지.”

“그렇습니다. 전하께 갈 밀서라며 꼭 제게 전해주길 바란다 하였습니다.”



정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밀서를 받아 꽉 묶인 매듭을 풀어냈다. 촤라락, 하고 길지 않은 두루마리가 정국의 앞으로 떨어졌다. 평소의 호석의 글씨체는 그 성격만큼 호방하고 여유로움이 넘쳐 전문가들에게서 그림과도 같은 글씨라며 호평을 받는 것이었으나, 밀서에 쓰인 호석의 글씨는 그의 급박함이라도 전하듯 심하게 흘려 쓰여 있었다. 그런 것을 정국은 잘도 눈으로 빠르게 읽어내려 갔다. 호석이 제게 알릴 것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정국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전하께 아뢰옵니다.


제가 이곳에서 지내며 지켜봐온 바, 그간 수국을 재건하려던 세력은 남해에 기지를 치고 조용히 지내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이곳의 백성들과 섞이어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곳의 백성들 또한 수국의 사람들이 언제 이 마을에 섞여 들어온 것인지 잊어버릴 정도로 융화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수국에 대한 충정이나 재건에 대한 생각을 버린 것은 아니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데, 최근 들어 그들의 동태가 수상합니다. 이곳에 있던 핵심 인물 중 몇이 사라졌으며 남은 자들의 움직임 또한 주위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찾던 것을 손에 넣은 것 같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찾던 것을 손에 넣으려 이곳을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확실히 이곳은 무언가 달라졌습니다. 전하께서 짚이는 곳이 있으시다면 조속히 손을 쓰시는 편이 좋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들이 찾던 것…?



정국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그들이 움직인다는 것은 이제 그들이 움직일 때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움직일 때가 되었다는 건 모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고, 그런 지금 그들이 찾는 것이라면 수국 재건의 핵심 축이 될 수국의 황자일 테다. 그리고 그것은 정국이 아는 한….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두루마리를 꽉 움켜 쥔 정국이 다짜고짜 남준을 스쳐지나 대전의 문을 활짝 열었다.



“김윤기… 홍문관 부제학 김윤기 오늘 출근하였느냐?!”

“…ㄱ, 글쎄ㅇ,”

“당장 가서 알아보아라!”



정국은 바깥에 그리 명령한 뒤 뒤가 빠지도록 달려가는 내시를 한 번 보곤, 다시 뒤를 돌아 남준을 향해 걸어왔다.



“홍문관 부제학의 집을 아느냐?”



남준은 잠시 뜸을 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홍문관 부제학의 집은 모르지만 예조 소속 김석진의 집을 안다. 그리고 석진과 윤기가 형제라는 것은 남준도 알고 있을 만큼 궁내에서 유명한 사실이었다. 정국은 남준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남준의 어깨를 붙든 채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홍문관 부제학이 집에 있는지 확인해. 아침에도 내게 오지 않았다. 오늘 하루 내 보지 못했으니 집에 있을 것이다. 아니, 집에 있어야 해. 만약 없다면… 만약, 없다면.”



정국의 목소리가 답지 않게 떨렸다. 남준은 그런 정국의 모습은 처음 보아서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무언가 큰일이 생긴 것이었다. 석진의 형이 정국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정국은 심하게 불안해하고 있었다. 정국의 까만 눈동자가 흔들리다 결심을 하고 바로 서는 것을, 남준은 끊임없는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나도 내일, 자네와 함께 남해로 가겠다.”



꽤나 멀찍이서 용케도 그 말을 들은 내시가 옆에서 펄쩍 뛰었다.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께서 친히 출정하시는 것은 계획에도 없던 일입니다. 어찌 그리 위험한 일에 직접 뛰어들려 하십니까! 절대로 아니 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선왕께서는 직접 전쟁터를 누비며 승리를 거두셨소. 나 역시 어릴 때부터 무술을 연마해 왔던 바이고 남해의 전쟁 전략 또한 나와 정 참모의 책략이거늘, 나의 출정이 안 될 게 무엇이 있겠소?”

“그러나 선왕전하 때의 일은 철저한 준비가 선행되었나이다. 그렇다면 전하의 출정을 준비할 시간이라도 주십시오. 이렇게 갑자기 정하시곤 서두르시다간 하시고자 하는 일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간청 드리나이다, 전하. 내시가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정국은 이를 꽉 깨물곤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한시가 급한데 출정준비라니. 전시이기에 오래 걸리진 않겠지만 정국에겐 그 하루하루가 귀했다. 하루하루가 피가 마를 것이 뻔했다.



그러나 이 자의 말이 옳았다. 정국의 어깨엔 나라가 걸려 있었고 아직 세자는 말도 하지 못할 만큼 어렸다. 출정 준비 없이 전쟁터를 나간다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 정국은 탐탁찮은 목소리로나마 내시에게 되물었다.



“그럼 출정준비는 언제까지 끝마칠 수 있겠소.”

“3일은 꼬박…”

“이틀.”

“예?!”

“이틀 후면 떠날 수 있게 준비하라 이르라.”

“하지ㅁ,”

“전하! 홍문관에 다녀왔습니다!”



내시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대전 밖에서 홍문관에 다녀온 또 다른 내시의 목소리가 그의 목소리를 썩둑 잘라내 버린다. 정국의 관심이 홍문관에서 돌아온 내시에게로 쏠렸다.



“무어라더냐.”

“부제학께선 오늘 출근하지 않으셨다 합니다.”

“어떤 사유라도 있다더냐?”

“그것이 지금껏 연락 한 번 없이 무단결근 중이라 홍문관에서도 당황해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던 분이라며….”



정국은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남준을 향해 돌아섰다

.


“어서 가보시오. 그리고 최대한 빠르게 내게 소식을 주시오.”



남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마구간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정국은 대전으로 들어가 왕좌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시들과 궁녀들은 정국의 시야를 벗어나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정국의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가라앉아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까지 느껴졌다.



차라리 아팠으면 좋겠다. 너무나도 아파서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고 집에 누워 있었으면 좋겠다. 윤기가 아프기를 바란 것은 정국으로서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면 윤기의 부재가 설명되지 않음에, 불안함과 초조함이 정국을 감싸고돌았다.



*



윤기는 천천히 눈을 떴다. 푹신한 침상에서 눈을 뜬 윤기는 제 근처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놀란 기색도 없이 태연한 표정으로 윤기에게 예를 갖췄다.



“일어나셨습니까, 마마.”

“…마마라니.”



저를 부르는 호칭에 윤기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마마는 왕족에게만 붙는 호칭이었다. 그걸 윤기에게 붙인다는 건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윤기는 저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을 떠보는 것일까. 윤기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얼굴로 차근차근 말을 뱉었다.



“나는 이 나라의 왕족도 무엇도 아니오. 당신이 누구든 내게 마마라 부를 이유는 없소.”

“송구하오나, 도성에 계시는 그분은 제 전하가 아니십니다.”



남자의 눈길이 곧았다. 쌍꺼풀 없이 시원하게 트인 눈이, 그 안에 자리한 새카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윤기의 눈을 직시하고 있었다.



“제가 모시는 전하는, 오직 제 앞에 계신 한 분뿐인 줄 아뢰옵니다.”



남자가 한 쪽 무릎을 꿇고 정식으로 예를 올렸다. 윤기마저 잊어버릴 뻔 했던, 수국 방식의 예였다. 나이도 어린 자가 저것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마지막까지 의심의 끈을 놓지 않던 윤기의 귀로, 믿을 수 없는 이름이 들려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자마마. 저는 정윤환 호위의 둘째 아들, 정재환이라 합니다.”

“정윤환 호위…의 아들이라고…?”



그 이름을 잊어버릴 수는 없었다. 윤기를 구하기 위해 제 아들을 희생시킨 황가의 호위. 충정으로 제 아들을 바쳐 황가의 핏줄을 지켜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제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그 무거운 죄책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제 손으로 죽음을 택했던 아버지. 그리고 그 희생을 밟고 살아남은 제 자신.



윤기는 항상 생각했다. 자신의 목숨은 이미 끝났었다고. 제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호위와 그 아들의 목숨 값이라고. 한 번도 윤기는 제 자신으로 살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으로 인해 인생을 보상받아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눈앞에 서 있었다.



남자는 일어서서 옷장 깊숙이에 있던 상자를 꺼내어 왔다. 그리고 조심스레 멈춰버린 윤기의 앞에 내밀었다. 윤기의 흔들리는 시선이 천천히 남자에게 묻는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남자는 착잡한 얼굴로 윤기를 향해 말했다.



“…형이 저들에게 도륙을 당할 때 입고 있던 옷입니다. 유해는 수습하지 못하였으나, 아버지의 친구들이 옷만이라도 가지고 장사를 지내라며 가져다 주셨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장사를 지내고 태웠어야 할 것인데, 그러면 제게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어서… 깨끗이 빨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

“다른 이들에겐 그저 찢어진 어린아이의 옷일 것이나, 황자마마시라면 그 옷의 무게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상자를 열자 곱게 개켜진 하얀색 비단 옷이 나타났다. 윤기가 떨리는 손으로 옷을 들어 올리자 커다랗게 칼로 찢긴 부분이 아래로 툭 떨어져 내렸다. 그 옷을 보자마자 생각이 났다. 그 옷을 입고 있던 아이가. 그리고 그 옷이 막을 새도 없이 처참한 붉은색으로 물들던 그 순간이.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은 그 옷에서 윤기는 그날의 짙었던 피비린내와 뜨겁던 화마와 간절한 비명소리를 생생하게 떠올렸다.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아직도 생생한 그 광경의 한 조각이 직접 손에 만져지자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남자는 그런 윤기의 숨소리를 들으며 주먹을 쥔 채 감정을 가린 눈을 했다.



“마마께 아픈 기억이실 것을 잘 알면서도… 항상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옷을 보던 제 마음을 진정으로 알아주실 수 있는 분은, 세상에 황자마마 단 한 분뿐이시니까요.”



외롭고 텅 빈 남자의 목소리에 결국 윤기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미안하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목이 메었다. 심장에 긴 바늘이라도 꽂아 넣고 쑤시는 것처럼 아파 숨이 막혔다. 남자와 윤기는 그 숨 막히는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자 버텨야 했다. 두 사람의 앞에 할 일이 놓여 있었다. 죽어간 그 모든 이들을 위해. 그 모든 넋들을 위로하기 위해.



*



+)

정신이 하뚜 없네요.. 다음 편이 제 시간에 올라올 수 있을지는 오리무중입니다 ㅠㅠ

아마 어려울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열심히 써서 올리도록 할게요 ㅠㅅ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