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슙 외 : 화무십일홍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27.

몽블랑11 2017. 7. 11. 23:50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27.

w.몽블랑




*



남준은 정국의 명에 따라 윤기의 집에 도착했다. 몇 달 만에 눈앞에 마주한 대문은 익숙하면서도 생소했다. 출근 시간이 지났으므로 석진은 궁에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알 수 없는 기대감에 밭아진 숨을 고르며 남준은 대문을 두드렸다. 일단은 안에 윤기가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계십니까.”



대답이 없었다. 남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조금 더 세게 대문을 두드리며 계십니까! 하고 외치던 중, 대문은 어이없게도 끼익, 소리를 내며 힘없이 열리고 말았다.



“…….”



혹시 제가 힘이 지나치게 들어가 문을 부숴버린 것은 아닌지 걸쇠를 확인한 남준은 그것이 멀쩡함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이 턱없이 조용했다. 남준이 이 집의 집안으로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집 앞까지 석진을 데려다 주고 그가 들어가는 뒷모습을 확인하며 제 집으로 돌아왔던 탓이었다. 집의 구조를 몰라 주변을 둘러보던 남준은 ‘부제학어른 계십니까!’ 하고 외쳤으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때 방문이 하나 열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남준의 고개가 그쪽을 향해 스르륵 돌아갔다. 그리고 천천히 열리는 문이 남준에게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보여주었다.



“…그대가… 어떻게….”



석진이었다. 방안에 앉아 핏기가 없이 투명해진 얼굴을 한 것이 남준의 눈에 박혀 들어왔지만 너무 놀라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석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그리고 그렸던 서로의 얼굴만을 바라보다 남준이 묵묵히 그 발걸음을 옮겨 석진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석진을 안는다. 석진은 그제야 제 눈앞의 사람이 실제라는 게 느껴져 불규칙한 숨을 급히 들이켰다. 귓가로 남준의 낮은 목소리가 퍼졌다.



“…왜 이렇게 야위었습니까.”



품에 안긴 사람이 제 기억보다 작았다. 키도 작지 않으면서 안긴 몸이 가늘었다. 안 그래도 부서질 것 같던 사람이었는데. 눈에 익숙하던 옷이 남아보이더라니. 남준이 석진의 몸을 더 꽉 그러안자 석진은 푸스스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님의 장례를 치르고… 조금 아팠습니다.”

“…….”

“많이 나아져서 어제까지 출근할 만큼 괜찮았는데, 오늘은 그대가 오는 걸 몸이 어찌 알고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은가 봅니다.”



석진의 말에 남준이 쓴웃음을 보였다. 어리광으로 이렇게까지 아파할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다 석진이 제 속을 감추기 위한 말인 것을 모를 수 없었다. 제가 없던 사이 가족을 잃고, 이렇게 야위기까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남준은 하필 그런 시기에 곁에 있어주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아무 말 없이 남준은 석진의 등을 쓰다듬었다. 석진은 그런 남준의 손길을 받다 조심스레 몸을 떼어 나지막이 남해의 현재 전세에 대해 물었다.



“남해는 어찌 되고 있습니까.”

“자세히는 말할 수 없으나, 나쁘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쁘지 않다….”



석진이 남준의 말을 곱씹는 것을 들으며, 남준은 문득 제 자신이 이곳에 왜 와 있는 건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부제학께선….”

“윤기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마도 출근을,”

“아니요. 오늘 부제학께선 출근하지 않으셨습니다.”



윤기가 출근하지 않았다는 말에, 석진이 놀란 얼굴로 멍해졌다가 자리에서 급히 일어섰다. 갑자기 일어선 탓에 비틀거리는 것을 남준이 잡아주려 했지만, 석진은 그 시간조차 낭비라는 듯 벽을 짚어가며 윤기의 방 쪽으로 향했다.



“…….”



벌컥, 하고 문을 열었지만 윤기의 방은 비어있었다. 이부자리 또한 어제 개켜놓은 그대로였다. 언제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았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석진은 그 자리에 붙은 듯 멈춰섰다. 그런 석진의 뒤를 따라온 남준이 텅 빈 윤기의 방을 보고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급히 궁으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부제학의 집에 가보라던 정국의 하얗게 식은 표정이 생각난 남준이 뒤를 돌아서려는데, 석진이 다급하게 그 손목을 붙들었다.



“지금 궁으로 돌아가시면, 정랑께선 언제 남해로 돌아가십니까.”

“…오늘 중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지금 이대로 가시면, 또 그대를 볼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렇게 기약 없이, 나는 또 기다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석진이 수많은 말을 삼켰다. 남준도 입을 다물었다. 석진이 서운하고도 아픈 얼굴을 했다. 자신이라고 떠나고 싶어 떠나는 바 아니니 석진이 이런 얼굴을 하면 더더욱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제 손목을 간절히 붙든, 석진의 하얗게 질린 앙상한 손이 더욱 그렇게 만들었다.



“어떤 마음으로, 얼마나 기다렸는지… 정녕 모르십니까.”



석진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남준은 모를 리 없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기다렸을 석진을 생각하면, 남준은 온전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말을 잇지 못한 채 서 있던 남준은 결국 조심스러우면서도 단호하게 제 팔목을 붙든 석진의 손을 떼어 냈다.



“지금은 가봐야 할 곳이 있습니다.”



제 빈 손을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석진의 흔들리는 동공을 똑바로 마주한 남준이 굳건한 눈빛으로 석진을 향해 한 글자 한 글자 못을 박았다.



“남해로 출발하기 전, 다시 이곳에 들르겠습니다. 저녁 즈음이 될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남준은 급하게 자리를 떴다. 석진은 그런 남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속이 참으로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석진에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해져 있었다. 윤기가 사라졌다면 그것은 때가 온 것이고, 이제 석진에게 주어진 일은 명백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남준은 무사할 수 있을까. 윤기를 돕는 일이 남준을 사지로 밀어넣는 일이 될지도 몰랐다. 모든 것은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는 운명의 굴레 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엉키어 석진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제 행동으로 인해 남준이 무사하지 못하다면, 그렇게 된다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윤기가….



“흐, 으읍… 우욱.”



석진은 토할 것 같아 기둥을 붙잡은 채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먹은 것 없는 속만 치받아 올라와 뱉을 것도 없이 독한 헛구역질만 남기고 사라졌다. 칼 같지 못한 제 마음 때문에 허한 속만 고생 중이었다. 자신도 윤기처럼 황제의 피를 타고 났더라면 이렇게 무르지 않고 한 가지만 바라보고 행동할 수 있었을까.



“하… ㅎ, 하학… 퉤.”



위액인지 타액인지 모를 것을 마당에 뱉어낸 석진은 엎드렸던 몸을 비틀거리며 일으켰다. 실없는 웃음이 흘렀다. 둘 다 지켜내면 된다.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제겐 저보다 중한 목숨 둘이었다.



*



“전하, 부제학께선 댁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정국은 가만히 듣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이내 정국에게서 기다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남준은 그런 정국에게 물었다.



“정말 친히 출정하려 하십니까.”



정국은 굳은 얼굴로 그렇다, 하고 대답했다.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윤기는 남해로 끌려갔을 것이다. 그곳에 그들의 근거지가 있고 그들의 시작점 또한 그곳이었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도성에 발이 묶여 있는 이 시간들이 정국을 조바심 나게 했다. 이럴 거였다면 아예 윤기를 제 궁에 가두어두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 차마 그러지 못한 제 어설픈 선의(善意)가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이렇게 된 이상 윤기가 더 큰일에 말려들기 전에, 어쩌면 더 큰일을 ‘일으키기’ 전에 윤기를 제 품으로 빼앗아 와야 했다. 윤기를 살릴 수 있을 때 일이 끝나야 했다. 그래야 윤기가 안전했다. 정국의 머릿속엔 오직 그것뿐이었다. 다른 생각은 없었다.



“전하를 움직인 것은… 무엇입니까.”



갑자기 던져진 남준의 질문에 정국이 무어라? 하고 되물었다.



“정호석이 전하께 가져다 드리라 한 밀서입니까.”

“…….”

“그것은 누굴 구하기 위함입니까.”

“…….”

“그것이, 정호석을 위함은 아니지 않습니까?”



남준은 정국을 오롯이 신뢰하지는 않았다. 결정적인 때에 정국이 아무도 지켜줄 수 없다 생각했다. 그것은 남준이 가족과 가문을 잃어가며 얻었던 뼈아픈 진실이었다. 숨어만 살던 호석이 어찌 남해에까지 출정을 와서 직접 밀서를 건넬 만큼 정국을 돕고 있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정국은 나중에 호석이 위험에 빠지면 또 그를 구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럴 거라면 정국은 자신도, 호석도 건드리지 않는 게 맞았다. 자신이야 궁에서 일하고 있는 이상 징집된 것에 대해 무어라 말할 수 없다 쳐도, 호석을 데려온 것은 안 될 일이었다. 정국이 예전 일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더더욱 그래야 할 것이었다.



남준의 삐딱한 불신의 시선이 정국을 향하자 정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호석을 위한 건 아니었지.”

“왕이란 자리는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정호석은 진사 시험도 치지 않은 채 집에 은둔해 살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 사람을 갑자기 데려와 전장으로 몰아넣은 것도 모자라, 그런 중한 일을 맡긴 건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이 전쟁과 이 밀서는,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겁니까.”



결국 남준은 호석에 대한 얘기가 하고 싶었나 보다. 하긴 갑자기 전장에 나타난 호석을 보고 남준도 놀라기도 많이 놀랐을 터였다. 그러나 정국은 남준에게 그 모든 것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할 순 없었다. 제가 지키고 싶어하는 것이 위험해질 텐데, 그럼 이 전쟁도 이 밀서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지고 만다.



“더 이상 잃지 않으려고.”

“…….”

“더 이상 그 누구도 잃을 수 없어. 너도, 정호석도, 그리고… 그 누구도.”

“…그 말을 제가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라고 전하께서 잃고자 하여 잃으신 것이 아니었는데.”



남준의 말에 정국의 시선이 내리깔렸다. 남준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그는 정국을 향해 이렇게 항의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정국은 차마 그 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수그러지고 만다면, 그건 남준에게 더한 실망감을 안길 뿐일 것이었다.



“나는 그때와 다른 상황에, 그리고 다른 위치에 있다. 지켜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나를 조금은 믿어줄 수 없느냐.”

“…….”



남준은 대답이 없었다. 믿어달라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정국에게 남준은 쉬이 대답을 주지 않았다. 정국은 문득, 자신과 친구의 연을 이어가 달라 호석을 찾아갔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호석도 남준도, 그리 마음이 모질지 못한 것을 알고 있다. 이미 많이 변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정국은 그리 믿고 있었다. 남준은 오랜 침묵 후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는 아직 전하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장엔, 전하를 믿고 있는 많은 이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정호석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군주가 되어 주십시오.”

“…알겠다.”

“그럼 저는 먼저 남해로 가 기다리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물러서려는 남준에게 정국이 물었다.



“자네는 언제 남해로 출발할 예정이지?”



뒤로 돌아섰던 남준이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늦어도 내일 아침 동이 트기 전엔 출발할 것입니다.”

“오늘 출발하기엔 자네도 피곤하겠지.”

“…그럼 전 이만.”



남준에겐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굳이 그걸 정국에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



해가 지고 길에 사람들이 사라져 간다. 해가 산 뒤로 넘어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즈음, 남준이 말을 타고 석진의 집에 도착했다.



남준이 문을 두드리고 석진이 대문 밖으로 나왔다. 남준은 그대로 길을 떠날 것처럼 말의 고삐를 쥔 채 석진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으나, 석진은 그런 남준의 모습에 애달픈 얼굴을 했다. 거부하는 듯 했으나 망설이던 남준이 결국 석진의 손에 이끌려 집안으로 말과 함께 들어가고 대문이 닫힌다. 그러자 몸을 숨긴 채 석진과 남준을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얼굴을 가린 남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성공한 것 같습니다.”

“…그래.”

“언제까지 잡아둘 수 있을지 모르니 도중에 마주치지 않으려면 지금 출발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마.”



천으로 얼굴을 가린 윤기가 재환과 눈짓을 나눴다. 그래, 그게 좋겠지. 고개를 끄덕인 윤기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이내 말의 옆구리를 세지 않게 차자 말이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남해로 가 전열을 가다듬고 정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려면 꽤나 서둘러 달려야 했다. 도성을 벗어나자 윤기와 일행은 일제히 말을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갈 길이 멀었다. 말을 타고 족히 이틀은 달려야 할 길이었다.



자신을 구하러 올, 혹은 자신을 치러 올, 은막 뒤의 연인과 맞설 시간이 피부로 느껴질 만큼 가까워졌다. 이 전쟁의 끝은 어떻게 나 있을까. 윤기는 행복한 결말 같은 건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모두 헛된 꿈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헛된 꿈을 완전히 놓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윤기는 어리석은 제 자신을 억지로 누르며 괜히 이랴! 하고 말을 한 번 더 재촉할 뿐이었다.



*



+)

너무 오랜만에 왔네요 8ㅅ8 죄송합니다 8ㅅ8 왜 여전히 정신이 없는 것 같을까요 뿌에엥

지난 편에 화무십일홍 카테고리에 넣지도 않고 올려서 ㅋㅋㅋㅋ 하뜌도 없었네요 ㅠㅠ ㅋㅋㅋㅋㅋㅋㅋ

그래두 댓글 남겨주신 쭝님과 오뜨님 감사합니다! 8ㅅ8♥

요즘 노잼인 거 같아 걱정인 몽블랑입니다 8ㅅ8 ... 뭐 언제라고 그렇게(?) 빵 터지게 재미가 있었겠느냐만은.. ㅇㅅㅇ(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