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슙] House of Cards 03. : 민윤기 이야기 1
House of Cards 03.
w.몽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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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 이야기)
꿈인가. 나는 꿈을 꾼 걸까.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깜박여 보지만 나는 알 수 없었다. 어젯밤 입을 맞춰온 것이 정말 그였는지, 아니면 내가 너무나도 그를 원한 나머지 혼자서 만들어낸 환영인지.
민유정의 결혼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와봐야겠다 결심한 건 사실, '오빠'라는 직책에의 책임을 부모님께 보이는 것에 불과했다. 정말로 민유정의 신랑 같은 건 관심도 없었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제와 민유정도 내게 그런 관심을 바랄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제게 관심이 있다면 제발 내 인생에 관심 꺼달라고 머리 숙여 부탁한다면 모를까.
그런 민유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주목을 받으며 자란 부모님의 기대주였던 나는 우리 가족을 부서뜨렸던 경험이 있고, 그로 인해 붕괴 직전까지 갔던 나의 가족을 위해 나는 내가 빠져주기로 했었다. 해외로의 유학. 그간의 수많은 수상 경력과 나의 포트폴리오는 다행히도 나의 해외 도피를 도와주었고 해외로 가겠다던 나를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이 집의 검은 양은 누가 봐도 훤하게 나였으니까. 가족 중 누구의 배웅도 없이 혼자 게이트를 빠져나가던 그날은 이제 내겐 조금 빛바랜 기억이었다.
10년이었다. 자그마치 10년. 강산도 변한다는 그 10년. 너와 나 모두 서로를 놓았을 거란 믿음에 한 톨의 의심조차 하지 않게 만든 그 시간. 그런 내가 민유정 옆에 선 김남준을 처음 봤을 때, 내가 받은 충격의 깊이를 너는 알까. 그를 오랜만에 보아서 받은 충격이 아니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인 듯 되살아난 미친 마음 때문에. 그리고 그리도 충격을 받은 나 때문에. 일순간 어지럽다 생각할 정도였다.
어째서 하나도 변하지 않은 걸까. 그를 향한 마음은 내 마음 어느 구석에 머무르며 이렇게 그대로였을까.
나를 보고 놀란 것은 김남준도 마찬가지였다. 내 눈을 피하며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던 것은 그만의 표현이었다. 백미러로 나를 힐끔거리며 나와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하던 것도, 전부 다.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지 않을 너인데도 너는 내게 너를 숨기려 했다.
가장 화가 났던 건 민유정이 친구 장례식에 갔던 날, 단 둘만 남았다는 말에 나를 쳐다보는 그 표정이었다. 과거를 되새기는 그 표정이 나와 사뭇 비슷해서, 그게 미칠 듯 화가 났다. 나를 앞에 두고 어떻게 슬픈 표정을 할 수 있지. 어떻게 그립다는 표정을 할 수 있지, 넌. 나를 그렇게 버려놓고. 내 모든 걸 가져가 한순간 바닥으로 패대기쳐 버린 네가. 너는 그럴 자격이 없지 않나. 우리의 기억이 네게 아름다울 이유는 없었다. 만약 네게 그런 기억이라면, 너는 내게 그래선 안 됐다.
우스웠다. 너는 그때 어떤 마음으로 나를 그리 대했으며, 어째서 이번에는 그리 모질지 못하게 나에게 여지를 남기는가. 심지어 남의 남자가 된, 이 판국에.
그가 남의 남자라고 절실히 깨달았던 건 지난 번 있었던 그와 민유정의 소리 때문이었다. 평소 밤에 작업하는 걸 즐기는 탓에 늦게까지 깨어있던 내가 잘못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라고 두 사람의 인기척을 듣고 싶었던 건 절대 아니다. 벽에 누군가 부딪히는 소리에 무슨 일인가 하고 문을 열었던 나는, 열린 방문 틈으로 겹쳐진 두 사람의 인영을 보고 다시 닫아버렸다. 찰나였지만 나는 보고 말았다. 서로를 감싸 안아 한 치의 공간도 없이 완벽히 겹쳐진 검은 실루엣을. 빠르게 치솟은 심장 박동에 숨이 가빴다. 다시 작업을 하려고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봤지만 하얗게 변해버린 머릿속과 심하게 떨려오는 손은 이미 내게 말하는 바가 있었다.
저쪽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서도 나는 한참 후에야 일어섰다. 방을 나서면서도 혹시라도 내가 더 듣고 말까봐, 나는 두려웠다. 더 이상은 안 됐다. 더 이상 민유정의 것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더 이상 민유정의 삶에 거치적거려서는 안 됐다. 패딩을 집어든 나는 집을 나갔다. 그들과 한 공간에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그게 이미 모순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밖으로 나온 내가 갈 수 있는 곳이라곤 미술관뿐이었다. 번호 키를 누르고 카드를 대어 시큐리티를 해제하고 안으로 들어가 미술관 안에 마련되어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 불을 켜니 뜻밖에도 안엔 팀의 막내 정국이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자고 있었다. 등받이에 머리를 얹은 채 의자에 길게 늘어져 잠이 든 그는 갑자기 켜진 형광등에도 조금 얼굴만 찌푸리더니 계속 잠을 이어간다. 원래 잠을 잘 깨지 않는 건지 아니면 며칠 동안 이어진 작업에 고단한 건지. 사무실이 그리 따뜻한 편이 아니었는데도 저렇게 정신없이 자는 걸 보니 안쓰러워 그의 위에 패딩을 덮어주고 온풍기를 가동시킨 뒤 나는 내 컴퓨터를 켰다. 잠이 오지 않으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작업뿐이었다.
세 시간 정도가 흐르고 나도 슬슬 작업을 마무리하려고 할 때쯤, 갑자기 정국에게서 '으응?' 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가 윗몸을 벌떡 일으켰다. 뭔가에 놀라서 일어난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은 아직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윙크를 하듯 한 쪽 눈만 간신히 떠내고 있었다.
'뭐, 뭐지.'
뭐가 뭐냐는 거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파티션에 팔을 얹고 '뭐가.' 하고 물었다. 갑자기 나타난 나의 모습에 놀랐는지 정국이 놀란 얼굴로 오, 오셨어요, 하며 튕기듯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는 여전히 눈을 제대로 못 뜨고 내게 물었다.
'감독님이 이거 켜셨어요?'
이거랑 이거, 하며 정국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건 온풍기와 형광등이었다. 내가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그제야 제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그랬구나, 한다.
'저는 제가 이거 켜고 잤는 줄 알고요. 이게 켜져 있으면 전기세가 많이 나오니까… 제가 밤새 켜놨으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놀랐어?'
'네. 아, 다행이다.'
잘생긴 놈은 잘생긴 걸 아는지, 그가 예쁘게도 웃었다. 기지개를 쭉 펴더니 감독님 커피 한 잔 드실래요? 하고 물어온다. 어째 잠을 자기도 좀 어려울 것 같던 차에 차라리 반가운 말이어서 고개를 끄덕이니 그가 종이컵에 믹스 커피를 타왔다. 이것도 드세요? 하고 조심스레 묻는 그의 말에 당연하지, 하고 푸스스 웃었다.
'감독님 유럽에서 오셨다고 하셔서, 그, 에스프레소, 막 그런 거 드실 것 같아서요.'
'아냐. 난 단 커피 좋아해.'
'아, 저도요. 다행이다.'
하고 웃는 어린 얼굴에 나는 그에게 몇 살이냐 물었다. 약간 머뭇거리던 그는 조금 어렵게 말했다.
'스무살이요.'
'어리네. 그렇게 어린데 어떻게 여기 들어왔어. 인턴? 뭐, 요새 열정 페이라고 하던가? 돈 안 받고 일하는 거. 그런 거야?'
'아, 아뇨. 저 미술관 직원이예요.'
'정직원이야? 대학생 아니고?'
'아, 정직원도 맞는데 대학생이기도 하고…. 아트스쿨에 일찍 입학해서 이번이 마지막 학기거든요. 학교가 해외에 있어서 이번 학기는 휴학했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자랑을 길게 늘어놓지는 못해도 얘기를 합쳐보면 대학을 조기입학, 조기졸업할 수재였다. 그의 실력이 궁금해 혹시 지금 포트폴리오 있어? 하는 말에 정국이 머뭇거리며 책상에서 USB를 찾아 건넨다. 웃으며 컴퓨터에 꼽으니 '19970901 전정국' 이라는 파일이 보인다. 파일을 열고 사진들을 살펴보는 동안 그는 옆에서 조금 긴장한 듯 숨을 죽였다.
'현대미술 전공?'
'예.'
'으음.'
그의 포트폴리오엔 그만의 분위기가 녹아들어 있었다. 일정 시간동안 한 가지 일을 하다 보면 사람마다 창작품에 그 분위기가 녹아들기 마련인데 그가 회화를 하든, 사진을 찍든, 영상을 찍든, 조형물을 설치하든, 그의 작품들엔 밝은 색채 속에 포근함이 있었다. 인간의 긍정적인 면에 대한 무한한 신뢰. 어둠에도 항상 한줄기의 빛이 있었다. 그의 작품들을 살펴볼수록 나와 하도 달라 오히려 더 빠져들고 있었다. 산뜻한 색채감, 밝음, 희망, 불빛. 하나 같이 나에겐 없는 것들이었다. 나의 작품들은 회색빛이었고, 어두움을 품고 있었으며, 밝게 보여도 어느 한 구석엔 반드시 그늘이 져 있었다. 빈틈없이 하늘 가득한 먹구름 사이로 비치는 희미한 서광을 포착하는 것이 정국이라면, 나는 그 곁의 빛줄기 하나 없이 우울한 잿빛으로 물든 바닷가를 찍는 것이었다. '네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우울해져. 난 그게 좋아.' 하고 내가 찍은 영상을 바라보던 뒤통수가 생각날 때쯤 정국을 향해 고갤 들었다.
'다르다.'
'…….'
'나랑 정말 다르네.'
'…어….'
'따뜻하다.'
내 말에, 그가 자신의 작품들처럼 웃었다. 봄바람 같이. 그는 그게 굉장히 잘 어울렸다.
그 이후로 우린 많은 얘길 나누며 친해졌다. 구김없이 밝은 정국의 모습은 한없이 시린 겨울바다 같은 내 안에 한줄기의 따뜻한 바람이 되곤 했다. 그런 것들이 좋아 곁에 두었다. 대작을 걸어도 술이 센 편이어서 항상 먼저 취하고 마는 건 나였다. 그런 나를 업어 집에 데려가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실 김남준을 지울 수 있으면 누구라도 옆에 두고 싶었다. 민유정과 김남준이 결혼을 했고, 그들이 부부라는 사실이 불현듯 속을 헤집어 놓아 마음이 소용돌이쳐 혼란스러움을 걷잡을 수 없는 날엔 정국의 집을 빌렸다. 내가 가질 수 없는 부부라는 이름이 나를 괴롭게 만들어 혹시 집으로 들어갔다가 일을 쳐서 새로운 죄책감을 만들지도 몰랐기 때문에.
나는 내가 다치는 게 두려웠다. 내가 다쳐 누군가를 또 다치게 만드는 나였기에. 끝을 보고야 마는 칼끝처럼 예민한 성격은 내게 부메랑처럼 돌아와 나를 찌르는 저주받은 운명 같았다. 그런 나는 나만 불쌍해했다. 남을 향해 칼날을 겨누는 이에게 동정표를 던져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실은 내게 당연하면서도 아팠다.
어제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나를 제 무릎에 재워주던 정국도 분명 나를 잘 모르는 게 분명했다. 차라리 이렇게 해서라도 곁에 있게 해주는 이가 있다면, 나를 계속해서 숨기고도 싶었다. 그러나 얇은 유리잔 같은 내 신경이 과연 언제까지 버텨줄 지는 나도 모를 일이었다.
계속해서 공명하다 어느 순간 파삭, 하고 깨어져 버린 그 유리잔처럼, 어느 순간 나도 그리 될까봐 두려웠다. 김남준이 있으면 난 그렇게 될 수도, 그리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젠 결론이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되어선 안 된다. 민유정. 내게 모든 걸 빼앗겼고 그도 모자라 내가 잡아먹을 뻔 했던 그 아이의 인생을, 내가 또. 또 망쳐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며칠 만에 돌아온 이 집엔 어째서. 또 너와 나, 단 둘인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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