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슙] House of Cards 06.
House of Cards 06.
w.몽블랑
*
더 이상 그곳에서 민윤기를 보고 싶지 않았다. 금방 끝난다던 민윤기의 말도 그때는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다. 갑자기 자리로 돌아와 그녀에게 집에 가자고 말하는 나에 황당하단 표정을 짓던 유정이었지만 그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금방 온다던 그는 자정이 넘은 지금까지도 집에 들어오지 않은 채였다.
아예 일찍이 잠에 들어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이 시간이 되도록 민윤기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생각은 점점 더 의식을 깨워놓았다. 결국 먼저 잠이 든 유정을 옆에 두고 나는 캄캄한 거실로 나와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켰다. 의미 없는 시선을 던지며 채널을 바꾸던 나는 생각에 빠져 이내 그것마저 멈춰버렸다.
도대체 이 새벽까지 민윤기는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걸까. 내가 그를 만나지 못했던 그 시간들 사이에, 결국 정국은 그에게 고백하고 서로 만나게 된 걸까.
민윤기도 정국을 퍽 아끼는 듯 했고 정국이 민윤기를 좋아하고 있음은 이미 그의 입으로 들은 사실이었으니 둘이 그렇게 되었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입 맞추는 장면만 생각나면 나는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과 거칠어지는 숨을 누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럴 권리도, 이유도 없는데도.
그를 밀어내는 것이 맞았다. 술에 취해 잠든 그에게 더 이상 빠져들고 싶지 않다 말한 것은 내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 빠르게 빠져들고 있다는 나에 대한 반증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민윤기와 무언가를 시작할 수는 없었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했다.
그와 함께 하기엔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잃을 것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주제에 내 의지로 이길 수 없을 만큼 그를 원했다. 그의 주위에 누가 있는 꼴도 보지 못했다. 지금 내가 정국에게 하는 건 이전에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나에게 ‘사람 되었다’ 할 정도의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입맞춤은 나를 이전의 나로 되돌리려 할 정도로 위험했다. 두 사람을 찢어놓고 그대로 민윤기를 내 품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를 가두고 남의 입술로 더러워진 그를,
삑삑.
현관이 열리는 소리가 나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민윤기는 신발장으로 들어와서는 제대로 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기 그대로 앉아 한숨을 푹 내쉬더니 천천히 그의 운동화를 손으로 벗기기 시작했다. 미술관에서 입던 정장은 평소 민윤기가 입고 다니던 옷으로 바뀐 상태였다. 정장이 불편했던 걸까. …옷을 굳이 갈아입고 올 정도로?
“민윤기.”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께에 서서 그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미동도 않았다. 다시 한 번 더 불러봤지만 똑같았다. 잠이 들었나 싶어 쭈그려 앉아 그의 얼굴을 살폈다. 끼쳐오는 술 냄새만큼 풀어진 표정이었지만 잠이 들어있지는 않았다. 민윤기, 하고 다시 부르려 했을 때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민윤기 아니야.”
“응?”
“날 그렇게 부른 적 없었어.”
뭐라 입을 떼려던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고개를 수그린 채 조용한 집안에서 나만 들릴 정도의 크지 않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해왔다.
“항상 ‘윤기야’ 라고 불렀어. 내가 그림을 그리겠다고 밑이 보이는 구름다리에 앉아 달라 했을 때도 내가 원하는 자리에 편하게 앉아줬을 만큼 고소공포증도 없었어. 내가 기다려 달라고 하면 항상 내가 말한 자리에서 아무 말 없이 언제까지고 기다려줬어. 그게 김남준이야.”
“…….”
“그게 내가 사랑했던 김남준이야.”
그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췄다. 그의 일렁이는 눈동자가 밤빛에 빛났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넌 누구야.”
“…….”
“나에게 꼭꼭 민윤기라 부르고, 고소공포증이 심하고, 내가 기다려달라고 말해도 먼저 가버리는, 넌 누구야.”
그가 입술을 물어 울음을 삼켰다.
“남준아. 나, 네가 낯설어.”
“…….”
“네가 사무치게 그리워.”
“…….”
“이제 난 널 탐내면 안 되는데.”
미치도록 헷갈리던 나는 마지막 말에 정신이 들었다.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민윤기가 전정국과 어떠한 사이인지를.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도 나를 흔들어? 민윤기가 원망스러웠다. 왜 너는 내게 이런 말들을 꺼내놓는 건지. 우리의 추억들을 꺼내놓으며 나를 사무치게 그리워한다는 너는, 어차피 다른 사랑을 시작한 너는 왜. 나를. 조금씩 화가 치밀어오를 쯤, 민윤기의 입술 사이로 우스운 말이 샜다.
“나는 변하지 않았어. 변한 건 너잖아. 그런데 왜 내가 아파야 하는 거야.”
“변하지 않았다고? 네가?”
나는 그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올렸다. 그는 보기에도 아픈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알겠다.
“사람 갖고 노는 주제에 불쌍한 얼굴하고 혼자 피해자인 척 하지 마. 가증스러우니까.”
내뱉듯 뱉어버린 말에 그의 입술이 파들거렸다. 너는 내가 네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아는 것이다. 내가 네게 휘둘리는 게 놓고 싶지 않을 만큼 재밌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복수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 편이 좀 더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 생각하니 속이 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입맛이 썼다. 민윤기의 모든 것들이 가식적으로 다가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하자 그가 급하게 나를 붙들었다. 간절한 그의 표정에 나는 그를 떼어내려 하고 그는 내 옷을 더 꽉 붙들었다.
“남준아.”
“놔, 이거.”
“남주,”
“남의 걸 탐내는 취미는 좋지 않아. 우리, 그런 건 하지 말자.”
“…….”
그 말에 나를 붙들고 있던 그의 손이 툭, 떨어졌다. 허무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였으나 더 이상 나를 붙들지는 못했다.
*
그때 내가 그의 바닥까지 봤다고 생각했던 건 내 착각이었다.
*
이젠 정말 정신을 차릴 때였다. 나의 결혼생활이 이대로 망가져 버릴 순 없었다. 미술관 개관 후에 민윤기는 자주 집을 비웠기 때문에, 둘만 남은 집안에서 나는 다시 유정에게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이전에 우리가 끊긴 대화를 다시 이어나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유정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오늘 저녁 밖에서 함께 하지 않겠냐고 묻자 잠시 말없이 텀을 두던 그녀는 그러겠다 해주었다.
그녀의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로 데리러 나가자 그녀는 말없이 내 차에 올라탔다. 기다리는 동안 추웠죠, 하고 묻자 그녀는 ‘아니에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차 안을 흐르는 무거운 침묵. 오랫동안 끊어져 있던 대화의 물꼬를 트기란 쉽지는 않았다.
식당에 들어가 예약된 자리에 앉자 곧 식사가 도착했다. 둘이서 밥을 먹으면서도 아무 말이 없는 것이 이제 이상하지 않게 된 우리. 그녀의 말대로 우린 많이 변했다. 이 관계를 돌려야 한다.
“당신 말이 맞아요. 나 고등학교 때부터 민윤기 알고 있었어요. 내가 당신한테, 거짓말 했어요. 미안해요.”
나의 말에 젓가락에 파스타를 감던 그녀의 손이 멈췄다.
“고등학교 때 민윤기와 나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있었어요. 당신도 알 거예요. 당신 오빠를 둘러싼 소문이었으니까.”
그녀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오빠가 게이라는 소문, 말이죠.”
“네. 그 상대가 나였어요. 그래서 공항에서 당신 오빠 처음 만났을 때부터 불편했어요. 집을 따로 구하지 않고 우리 집에 들어온다고 하니까 더 그랬고요. 당신이 민윤기 동생인 걸 알았을 때 당신까지도 불편해졌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 소문을 알고 있었을 테니까. 신경이 날카로워졌어요.”
“…….”
“모르는 척 지나가고 싶었어요. 내가 숨기면 당신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요. 멍청하죠. 주위 학교까지 퍼진 흉흉한 소문이었는데 당신한테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말은 어떻게든 도는 법인데 말이에요.”
미안해요. 고개를 숙이자 그녀가 젓가락을―그녀는 포크를 쓰지 못한다―식탁에 내리고 물을 마신 뒤 냅킨으로 입술을 닦는다. 그리고는 한참을 말이 없던 그녀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나 역시도, 당신이 오빠와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해서 예민해졌던 것 같아요. 내가 당신한테 너무했을지도 몰라요. 아마 너무했을 거예요. 나도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
“오빠가 게이라는 소문, 같은 학교 사람이 모를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당신이 모른다고 했을 때까진 믿었어요. 소문에 둔할 수도 있지. 공부만 했으면 모를 수도 있지.”
“…….”
“그런데 얼마 전에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났어요, 나. 장례식장에 갔던 날에요. 거기서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게 되어서 요즘 가끔 만났어요. 원래 친구들끼리 있으면 우리 오빠 얘긴 잘 안 해요. 모두 다 알고 있는 소문이라서. 그런데 이번엔 내가 궁금해서 친구들에게 물어봤어요. 혹시 그때 우리 오빠 소문에 대해서 기억 나냐고요.”
“…….”
“그때 한 친구 입에서 당신 이름을 들었어요.”
‘민윤기와 사귄다고 소문났던 사람 이름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녀의 말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소문이란 것이 고약해서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누군가 그에 관해 물어보기만 하면 누군가의 머릿속에는 바로바로 튀어나올 정도로 기억에 남아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지나간 시간만큼 ‘옛날 얘긴데 뭐.’ 하는 말로 소문을 퍼뜨린다는 양심의 가책은 가벼워지고, 소문을 나누는 사람이 많을수록 양심의 가책은 더 더 가벼워져 종래엔 팔랑팔랑 깃털처럼 공중에 부유해버리는 것이었다.
“흔하지 않은 이름인 줄 알면서도 오빠 학년에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둘 있길 바랐어요. 그런데 당신 졸업 앨범을 뒤져봐도 김남준이라는 이름은 당신 하나더라고요.”
“…….”
“그때부터 불안했어요.”
“내가 정말 민윤기와 사귀었을까 봐요? 전혀 아닌ㄷ,”
“아니요. 예전 일은 예전 일일뿐, 내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당신이 거짓말을 한 이유. 그게 날 불안하게 했어요.”
내가 거짓말을 한 이유가 그녀를 괴롭혔다, 라.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씩 고조되고 있었다.
“차라리 안다고 말하고 아니었다고 말해주는 게 아니라 나에게 숨기려 드는 당신 때문에 난…, 난 별별 상상이 다 들었어요. 당신이 민윤기를 신경 쓰고 있는 것도 느껴졌기 때문에, 내가, 내가 불안했던 건…. 당신이 혹시라도 민윤기와 사귀었던 거라면, 예전에 가졌던 마음이 아직까지도 이어지는 게 아닐까, 끝난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현재의 일이 아닐까, 하는 게 제일 불안했어요.”
나는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녀의 물잔에 물을 채워주었다.
“나와 그는 안 좋은 소문에 얽혔던 것뿐이에요. 그런 일 없어요. 진정해요, 여보.”
그녀의 옆자리로 옮겨 떨리는 작은 등을 토닥이며 물잔을 건네자 그녀는 잔을 받을 생각도 없이 내 품으로 와락 안겨들었다.
“내가 받는 스트레스가 어떤 건지 당신이 몰라서 그래요. 난 사실 민윤기가 싫어요. 미칠 듯이 미워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만큼. 이런 내가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민윤기가 싫어요. 내가 민윤기로 인해서 당신을 의심하게 되는 이 상황도 너무 싫어요. 그 동안 민윤기 안 봐서 너무 편했는데, 왜 이제와 한국에 들어온 건지. 나는 왜 민윤기와 한 집에서 있어야 하는 건지, 도대체 형제가 뭔지 모르겠어요….”
신경쇠약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그녀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나는 물컵을 내려놓고 다시 그녀의 등을 토닥일 뿐이었다.
*
그때 학교에서 돌던 소문이 죽인 건 민윤기 뿐만이 아니었다. 그 피해는 그들의 가족까지도 해하였다. 유정은 민윤기가 그때 당시 끊임없는 자살시도를 했다고 말했다. 틈만 나면 죽으려는 시도에 매진하는 그를 부모님도 모자라 그녀까지 그를 감시해야 했고, 유정과 둘만 있을 때엔 자살을 막으려는 유정에게 칼까지 들이밀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그때 자신의 눈앞에서 빛나던 칼끝을 잊어버릴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런 그녀에게는 선단 공포증이 있었다.
몇 개월 후, 민윤기가 유럽으로 떠나겠다고 했을 때 그의 가족들은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가족이라고 한들, 몇 개월 동안 지속되는 지독한 스트레스 상황과 긴장 상태에는 결국 지쳐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아이러니 하게 그러면서도 가족이기에 놓을 수 없었던 것이었고.
이렇듯 민윤기는 고등학교 때 가족을 한 번 파괴 직전까지 몰고 갔던 모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