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슙 : House of Cards (完)

[랩슙] House of Cards 09. : 민윤기 이야기 2

몽블랑11 2016. 11. 25. 20:49

House of Cards 09.

w.몽블랑



*



(윤기 이야기)



정국에게서 만날 수 없겠냐는 연락이 왔다. 미술관에서 만나도 이상하지 않은데 굳이 불러내는 건 할 얘기가 있다는 거겠지. 이번엔 무슨 말일까.



지난 번 프리오픈 때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고소공포증이 생겼다 하던 너를 뒤로 둔 채 다시 한 차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조금 피곤해 하던 나에게, 정국은 어느 정도 정리된 것 같으니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는 한산한 곳에 가서 쉬겠냐며 물었다. 사람들에 치이는 것에 지쳐 그러자고 했던 게 내 결정적인 실수였던 걸지도 모른다.



정국은 정말 사람들의 발길이 적은 복도로 발을 옮겼고 나는 그를 따라 빈 사무실로 들어갔다. 의자가 없어 책상에 기대어 서자 따뜻한 물 한 잔을 내미는 그에게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항상 뭔가를 원할 때 먼저 알아봐주고 다가와 줬던 정국은 부하 직원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다 마신 물잔을 받아가는 듯 하며 내 팔을 잡고 갑작스레 입을 맞추지만 않았다면.



허리를 숙여 키스하는 정국 때문에 뻣뻣하게 굳은 몸과 머리는 한동안 제 기능을 못한 채 멈춰 있을 뿐이었다. 촉촉한 입안을 맴도는 부드러운 움직임에 멍해지던 몸이 정신이 들었다. 입안을 돌아다니는 익숙하지 않은 이질감에 힘을 주어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에게 잡힌 팔에 아릿한 고통이 느껴질 정도로 그는 더 힘을 줘 나를 꽉 잡았다. 피곤해진 몸과 지쳐버린 체력으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싶어 온몸에 힘을 풀고 눈을 감자 허락이라 생각한 듯 정국이 품으로 더 가까이 당기며 입을 맞춰왔다.



키스가 길었다. 그의 숨도 내 숨도 가쁠 만큼. 숨을 고르며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뭐라고 말해야 지금 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될까. 나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가벼운 일처럼 장난스레 말했다.



‘너. 이거 월권이야.’



그러나 그는 받아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좋아해요.’



그의 말에 결국 정색하고 말았다. 직접적이고 진지한 그의 표정과 말투에 웃으며 농담하려던 기분도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그만해.’

‘대답해 주세요.’

‘그만하라고 했어.’

‘형은 마음 없었어요?’

‘너 갑자기 왜 이래.’

‘갑자기 아니에요.’



뭐라 더 말하려던 정국이 입을 다물고, 역설적이게도 그런 표정에 지금까지 정국의 행동들이 모두 떠올랐다. 내 뒤에서 나를 위하던 그 모든 행동들. 그의 말대로 정말, 갑자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대답을 달라는 듯한 태도는 당황스러웠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난 이런 뜻 아니었어.’

‘그렇게 말한다고 자유로워지지 않아요.’

‘내가 자유롭자고 하는 말이 아니잖아. 너 지금 굉장히 일방적이고 폭력적이야. 이건 아닌 것 같은데.’

‘…….’

‘내 말 틀려?’

‘…맞아요. 미안해요. 겁나서 그랬어요.’



정국은 희한한 사람이다. 소년과 남자, 두 가지의 양면을 모두 갖고 있다. 그는 적재적소에 그 양면을 모두 보일 줄 안다. 이번엔 소년이었다. 나를 잡고 있던 팔을 놓고는 눈썹을 늘어뜨리고 풀이 죽은 표정으로 나를 본다. 가엾을 만큼. 애처로울 만큼. 그러나 입가에 묻어있는 짜증이 그가 어리지만은 않음을 보였다.



‘뭐가 겁이 나는데.’

‘그 사람 옆에서 형이 웃고 있는 거요.’



그 사람?



‘김남준 씨요.’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정국이 너의 이름을 부를 때 불안함에 심장이 시렸다. 나는 괜찮았다. 나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도 괜찮았다. 나는 슬픔을 잘 견딜 수 있으니까. 그러나 너는 아니다. 네가 나와 얽혀 남의 입에 오르내려서는 안 된다. 네가 슬픔을 못 견딘다는 게 아니라 네가 슬픈 건 내가 많이 아프다는 말이다. 그게 나는 괜찮지가 않다.



‘남준이 옆에서 웃는 게 왜.’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하지 마요. 그거 별로예요.’

‘별로일 게 뭐 있어. 신경 꺼.’

‘어떻게 꺼요? 그렇게 다른데.’

‘다르긴 뭐가 달라.’

‘김남준 씨랑 같이 있을 때만 살아있는 것 같이 행동하잖아요.’

‘…….’

‘매일 무기력하고 세상에 미련이라고는 하나 없는 것 같이 사는 사람이, 김남준 씨만 옆에 있으면 살고 싶어 하는 사람 같이 행동한다고요, 형이.’



정국의 말에 나는 숨을 멈췄다. 나조차 몰랐던 내 모습을 적나라하게 뱉어버린 그의 말에 나는, 나는. …슬퍼졌다. 나는 슬픔을 잘 견디는 사람인데. 심장에 얹힌 그 슬픔의 무게를 이기기 힘들어 아파졌다.



*



도망치듯 정국과의 자리를 피해 나온 회장에 너는 없었다. 그 순간의 그 작은 일이 내겐 절망과 같았다. 내게 기다린다고 해줬는데. 미술관 전체를 돌아다녀 봐도, 너는 없었다. 고소공포증 탓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유정의 도움을 받으며 일어나던 낯선 네가 내게서 한 걸음 더 멀어졌다. 언제부터 너는 달라졌을까. 너는 언제부터, 내가 알던 너와 달라졌을까.



*



「제가 말이 심했어요」

「미안해요 형」

「그런데 저 진심이에요」



*



그리고 오늘이었다. 바에 앉아 술을 한 잔 시켜놓고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으니 기다린 지 얼마 안 되어 옆자리에 정국이 앉았다. 오는 길에 눈이 왔는지 패딩과 앞머리에 붙은 눈을 터는 정국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내 앞에 있던 잔을 정국에게로 밀었다. 이 술은 정국이 오면 꼭 시키기에 미리 시켜둔 술이었다. 익숙한 술에 눈길을 주며 고마워요, 하고 웃고는 한 모금 마시고서야 내 앞이 빈 걸 보고 ‘형은요?’ 하고 묻는다.



“난 오늘은 됐어. 무슨 일이야?”

“한 잔 하지.”

“용건이나 말해.”

“형 저랑 프랑스로 갈래요?”

“…어?”

“개관전 끝나면, 같이 프랑스 가요.”



‘이번에 개관전 해 보니까 아직 부족한 게 많이 느껴지더라고요. 공부 더 하고 싶어져서요. 형도 혹시 개관전 끝나고 다시 유럽으로 돌아갈 거면 같이 가면 어떨까, 하고요.’ 정국이 제 잔을 들고 천천히 흔든다. 내가 프랑스?, 하고 되묻자 그는 예, 하고 대답했다.



“형이 프랑스가 싫으면 다른 어떤 나라도 좋고요. 형이 가고 싶은 나라로.”

“우리 둘이, 같이?”

“예.”

“계획은 있어? 어디서 공부하고 싶다거나.”

“이제 찾아봐야죠. 형이 허락해 주면.”

“아아….”



물론 개관전 이후의 오퍼들은 조금씩 들어오고는 있었다. 해외에서의 오퍼도 있었고 국내에서의 오퍼도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규모 면에서도 오퍼의 숫자 면에서도 해외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해외로 나갈지 국내에 남을지는 아직 나조차 결정난 것이 없었다.



또, 나와 떠나고 싶다는 정국의 말도 일리는 있었지만, 그는 지금까지 봤을 때 실무 면에서 부족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국내’의 ‘개관전’이라는 데에서 오는 여러 가지 문제나 한계점들을 슬기롭게 처리한 편에 가까웠다. 머리도 영리하고, 행동도 빨랐는데.



정국의 제안이 내가 이상했던 이유 중 가장 큰 건, 이런 식으로 충동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는 그의 성격이었다. 계획성이 철저해서 이번 미술전의 플랜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써놓은 그의 다이어리와 우리의 일정이 어긋날 때마다―보통 느려질 때마다―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구겼던 그가 꽤나 기억에 남았던 탓이다.



“프랑스에 뭐 있어?”

“모르죠.”

“대학으로 갈 거야, 아니면 실무 쪽으로?”

“아직 안 정했어요. 형이 나라랑 일정 정하면 바로 알아보려고요.”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개관전 끝나고 될 수 있으면 빨리요.”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정국답지가 않았다.



“너 평소 같지 않다.”

“…….”

“또 남준이 때문이야?”



정국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포커페이스를 지닐 줄 알았다. 단지 자신의 표정을 숨기는 표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표정은 정국이 자신의 표정을 숨기고 싶을 때 쓰기 때문에, 그걸 읽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정국은 바로 그 표정이었다. 동그랗게 뜬 눈을 제 속도보다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입에 힘을 뺀 표정. 얼굴 근육 어디에도 긴장된 곳은 없었지만, 정국이 저런 표정을 할 때 정국은 보통 심란해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정답을 말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왜 그래. 한동안 남준이 얘기 없더니.”

“…….”

“말해 봐. 김남준 얘기면 내 일이기도 한 거잖아.”

“…….”

“전정국.”

“…들었어요. 형이랑 그 분 과거 얘기.”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네가 그 얘기를 입 밖으로 꺼냈다는 게 나는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나에겐 나 혼자 되새기기도 아픈 기억인데, 너는 누군가에게 말할 정도로 덤덤해졌다. 나도 모르게 주먹이 하얗게 되도록 꽉 쥐었다.



“형을 사랑하기에 자기는 가진 게 많대요. 그래서 이전에도 형을 놓았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도 가진 게 빌어먹게도 많대요.”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남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터지는 우리 얘기가 조금 많이 아팠다. 그런 나를 보지 않은 채 정국의 이야기를 계속 됐다.



“그래서 나한테 형을 잘 부탁한대요. 곁에 있어 달래요. 자긴 못할 테니까. 그래서 제가 한 번 더 물어봤어요. 사실 형 옆에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는 거 아니냐고.”

“…….”

“그랬더니 대답을 못 하더라고요. 결국엔 그런 거죠. 형이 혼자여야 자기가 편한 거죠. 형 옆에 누구 있는 게 보기가 싫으니까. 자기는 옆에 못 있어도.”

“…그래.”

“참 이기적이에요, 형의 옛날 연인.”



그래. 이기적이다, 너는. 그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굳이 새로울 것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얘길 들으며 목이 칼칼해져 와 나는 헛기침을 하며 정국의 이야기를 멈추고 바텐더에게 술을 주문했다. 차갑고 투명한 갈색 액체를 넘길수록 목이 더 탔다. 한 번에 반 잔 쯤을 비운 나를 빤히 바라보던 정국이 말했다.



“흔들리네요, 형도.”



술을 목 뒤로 넘기고 옆을 보자 고요히 시선을 내리깐 정국의 옆얼굴이 보인다. 그의 긴 속눈썹이 눈동자를 가리고 있었다. 표정도 말투도 고요한 정국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그런 사람 옆에 있으면 망가져요. 그 사람이 형을 망가뜨릴 거예요. 그러기 전에 나와 떠나요.”



그의 말에 나는 반론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네 곁에 있고 싶어 하는 이유는 몰랐다.



“정국아.”

“…네.”

“너는 나한테 왜 이러는데.”

“말했잖아요. 좋아한,”

“넌 나를 안 봐.”



그가 그제야 시선을 내게 옮겼다.



“그래서 너는 내가 언제 아픈지, 아프긴 한 지도 몰라.”

“…….”

“그래서 네가 나를 좋아해서 이런다고만은 생각하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의 아픔에 둔감한 사람은 없다. 정국에게 내가 아픈 것을 알리면, 그는 그것을 더 파고들어 왔다. 마치 그렇게 해서 너에 대한 기억을 도려내기라도 할 듯이. 내가 그게 아파 몸서리를 쳐도, 발버둥을 쳐도, 정국은 나를 보지 않았다.



“네가 어떤 마음으로 나에게 다가오든지, 그건 내게 상관없어. 너 좋을 대로 쓰다 버려도 좋아.”

“쓰다 버린다는 말은 좀,”

“김남준더러 이기적이라 했나.”

“…….”

“너는 어때. 그리고 나는 어떤 것 같아.”

“…….”

“나도 너를 보지 않으니 상관없어, 정국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나를 굴려도 난 괜찮아. 우리가 프랑스로 떠나든, 콜롬비아로 떠나든, 스페인으로 떠나든, 나는 아무 상관없으니 네 마음대로 해도 돼.”



사실 누구나 이기적이었다. 당연하게도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



정국은 떠나자 했다. 비행기는 개관전이 끝나는 다음 날의 새벽 비행기였다. 머뭇거림조차 필요 없었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 액정에 뜬 E-ticket을 바라보며 나는 상상해봤다. 내가 떠나고 나서 평화로워진 척 할 그들을. 원래 없던 사람처럼 나를 치부할 그들을. 속이 곪아도 아무 일 없던 듯 살아갈 그들을.



역겨웠다.



*



+)

중간에 진짜 민슈가씨가 트위터에서 한 말이 있죠. 그 말이 전 되게 슬프더라고요. 그래서 넣어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