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슙민/국뷔] 인어공주 이야기 03.
[슙민/국뷔] 인어공주 이야기 03.
퇴원 후 처음으로 석진을 만나러 간다는 말에, 드디어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말에 방방 들뜬 지민은 두다다다 소리를 내며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온다. 그 소리에 윤기가 시끄러웠던 듯 ‘아 쫌!’ 하고 소리를 지르고 지민은 입으로는 죄송해요, 하면서도 싱글벙글댄다. 그런 지민을 이해하는 윤기였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스냅백을 지민의 머리에 눈을 가릴 만큼 꾹 눌러 씌운다. 모자 아래로 눈을 내리깔아 윤기를 쳐다보며 장난을 치는 지민의 머리를 웃으며 쓰다듬어 주었다.
병원에 차를 갖다 댄 윤기가 모자를 눌러 쓴 지민을 데리고 빠르게 병원 안으로 들어간다. 간호사에게 접수를 하고 안내에 따라 석진의 진료실로 들어선다. 윤기에게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한 석진이 지민에게 웃으며 잘 지냈어?, 하고 묻는다. 모자를 이마 위로 잡아당긴 지민은 표정이 환하게 변하며 네!, 하고 대답한다. 의자를 권한 석진이 진료 기록을 넘기며 지민에게 편하게 묻는다.
“그 후로 기억 난 건 없고?”
“딱히….”
“꿈 같은 건 안 꾸고?”
“맨날은 아니고 가끔 꾸는데 그냥 이상한 얘기….”
“무슨 얘기?”
“형사님이 나와서 넌 이제 자유라고, 이제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해요. 그런데 밖으로 나가는 문 앞에서 자꾸 걸음이 느려져요. 걸어도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거나, 걸음이 엄-청 느려지거나. 그래서 너무 답답해서 잠에서 깰 때도 있고….”
“그리고.”
“어떤 땐 형사님이 뭔가 전화 통화를 하는데 제가 그걸 듣는데 가슴이 뛰어요. 불안해서 가슴이 뛰는 거 있잖아요. 속으로 형사님한테 들키면 안 돼, 라는 생각을 자꾸 해요. 무슨 전화 내용인지는 잘 안 들려요. 그러다 형사님이 돌아보면 놀라서 깨요.”
“야, 그런 녀석이 남의 핸드폰에 귀 딱 붙이고 남의 전화 듣고 있냐?”
갑자기 끼어든 윤기의 말에 지민은 윤기를 돌아보며 ‘그냥 꿈이 그렇다는 거죠.’ 하며 방글 웃는다. 그런 지민에 윤기는 떫은 표정으로 ‘웃기는….’ 하며 다시 지민의 뒤에 섰다. 지민의 꿈을 들은 석진은 음, 하고 조금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지민도 윤기도 그런 석진의 입만 바라보던 차, 석진이 조금 천천히 입을 뗀다.
“지민이가 안전가옥이 생각보다 많이 갑갑한가 보네요. 불안하기도 한 것 같고. 지민이의 경우 현재 전혀 외출이 없는 상태죠?”
“예.”
“이렇게 한 달이나 집에서만 있어봤는데 아무 것도 안 떠오르는 것도 그렇고…. 외출을 하면서 지민이에게 자극을 줘야 할 것 같아요. 바깥 생활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석진의 말에 지민이 훠오-! 하며 만세를 부르며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윤기는 앉아 인마, 하며 그런 지민의 머리를 꾹 눌러 의자에 앉혔다.
“근데… 일단은 얘가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지금 경호도 부족….”
윤기가 설명하려는데 주머니에서 전화가 울린다. 윤기는 잠시만요, 하고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들고 진료실 구석으로 갔다. 잠깐의 통화를 마치고 온 윤기의 표정이 영 좋지가 않았다. 지민은 윤기가 항상 입고 다니는 검은 가죽 재킷의 끝을 붙들고 왜요?, 하고 물었다.
“알 거 없어.”
“아 왜요오.”
“다인이 문제야.”
“다인이가 왜요? 다쳤대요?”
“아니. 그거보다 더 심각한 문제야.”
“진짜요? 뭔데요?”
“아- 이 새끼, 오지랖 하고는.”
“저 원래 오지랖 넓은가 봐요. 다인이가 아픈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니까 걱정하는 거 보면.”
지민은 아예 빠르게 인정해 버리고는 다인이가 왜요?, 하고 한 번 더 묻는다. 석진도 말을 끊지 않는 게 내심 윤기의 문제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 사람들 정말 오지랖 하고는….
“내일부터 집에 일찍 온다고.”
“에이, 그게 뭐가 문제예요? 좋잖아요.”
“맡아 줄 사람이 없어.”
워킹 대디에 돌싱남인 윤기는 입모양을 산의 능선처럼 만들고는 눈을 깜빡인다. 방법이 없었다. 빨리 매일 출근할 수 있는 도우미 아주머님을 구하는 수밖에. 그런데 그렇게 하면 그분들 월급 드려야 되는데, 그럼 이번 달 적금은…….
“형사님, 다인이… 제가 데리러 가면 안 돼요?”
“아, 그거 괜찮을ㅈ”
“안 돼.”
지민의 기대 가득한 말과 그에 동조하는 석진의 웃음이 입가에 채 피기도 전, 단칼 같은 윤기의 말이 들려온다. 지민이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윤기를 바라봤지만 윤기는 그런 지민을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젓는다.
“안 돼. 절대 안 돼.”
“그치만 다인이 당장 내일부터 일찍 온다면서요.”
“그래도 안 돼, 인마.”
“왜 안 돼요?”
윤기는 말하기 불편하다는 얼굴이었지만 지민은 왜요, 왜, 왜에- 하며 윤기를 재촉한다. 할 수 없이 윤기는 미안한 듯, 하지만 무뚝뚝하게 말을 뱉는다.
“다인이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
“나쁜 사람들이 나 쫓아다녀서요?”
“…응.”
“그럼 형사님도 같이 가면 되잖아요.”
“내가?”
“어차피 나 감시하고 보호하는 게 형사님 일인데, 겸사겸사 다인이도 볼 수 있으면 좋잖아요!”
지민의 말을 듣던 석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형사님, 지금 지민이의 상태로서는 조금씩 외출을 권하고 싶습니다. 실내에서만 있다 보니 기억을 떠올릴 자극이 적은 것 같아요. 제가 따님 일이다보니 이렇다 저렇다 말씀 드릴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현재 지민이는 외출이 권유되는 상태예요.”
“흐음….”
“형사님 제발!”
눈썹을 팔자로 만들고 눈을 커다랗게 뜨곤 입을 꾹 다문 채 기도하듯 손을 모은 지민에, 윤기는 결국 석진에게 ‘외출 권유한다는 진료 기록 좀 써주쇼.’ 하고 말했고 지민은 예이- 하며 두 팔을 들어올렸다. 석진은 그런 지민을 보며 눈을 접어 웃었다.
*
지민의 외출을 위해 서류 결재를 받으러 서에 온 윤기는 석진이 준 진료 기록과 함께 팀장에게 향한다. 윤기가 내민 서류를 읽어보던 팀장은 눈을 치켜뜨며 윤기에게 물었다.
“이렇게 진행해도 괜찮겠어?”
“…….”
“딸래미가 들어있으니까 묻는 거야, 내가.”
“뭐… 몇 주간 저쪽도 조용했던 편이고, 담당의가 추천하는 중이라서요. 그리고 저도 같이 경호 차 붙어 다닐 거니까 일단은 해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조심하고, 인마.”
“옙.”
사인을 하며 서류를 덮어 건네는 팀장에게 고맙다는 쑥스러운 말 대신 웃으며 제 코를 슥 문지르는 윤기였다.
*
윤기의 차를 타고 다인의 어린이집으로 향하는 길에 지민은 분명 신이 나 있었다. 제 의지는 아닌 것 같았지만 입꼬리가 실룩이며 올라가려 하고, 등받이에 등을 대지 못하고 반쯤 떼고 앉아서는 TV에서 듣고 외운 듯한 요즘 아이돌 노래를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며 발로 박자를 맞추는 건, 분명 오랜만에 외출을 나온 지민이 신이 났다는 증거였다.
“너도 참. 숨기지는 못하고 살겠다.”
“…네?”
혀를 쯧쯧 차며 하는 윤기의 말에 맹한 지민의 표정이 돌아온다. 그걸 보며 풋 웃어버린 윤기에 지민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저도 헤, 하고 웃었다.
차가 어린이집에 도착하자 어린이집 문 앞에 서 있던 다인이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차에서 내린 윤기를 발견하고는 입을 크게 벌려 웃으며 제 등 만한 가방을 매고 압빠아아아아- 하며 달려온다. 윤기가 아이를 향해 두 팔을 벌린 채 한쪽 무릎을 꿇고 기다리자 아이가 윤기의 가죽 재킷에 얼굴을 풍덩 묻는다.
“다녀왔습니다!”
“오냐. 잘 다녀왔어?”
“응!”
아이를 품에 안고 일어선 윤기의 품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지민을 느낀 건지 다인이 지민을 향해 시선을 준다. 지민은 목소리로만 듣던 다인을 실제로 만난 것이 퍽 반가운 모양이었다. 다인에게 안녀엉, 하며 손을 흔드는 지민을 바라보던 다인이 쑥스러운 듯 이내 윤기의 어깨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윤기가 다인과 눈을 맞추며 삼촌한테 인사해야지, 하고 말한다. 윤기를 닮지 않은 동그란 눈이 지민에게 향하고, 윤기를 닮은 입꼬리가 올라간 입술이 지민을 향해 안녀엉, 하고 말한다.
“귀여워…!”
얼굴을 이모티콘처럼 구기고는 큭, 하며 제 심장을 부여잡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지민의 리액션이 마음에 들었는지 다인이 지민을 보며 소리 내어 웃는다. 그건 윤기도 마찬가지였는지 흐뭇한 미소를 띤 채다.
*
차에 타고 나서도 뒷좌석에 앉아서 오늘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을 종알종알 읊어대는 다인의 목소리를 윤기는 운전을 하며, 지민은 대놓고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오늘 새로운 선생님이 왔는데, 엄청 예뻐어. 근데 우리 반 선생님이랑 같이 우리 반 선생님 됐어.”
“새로운 선생님이 다인이네 반 선생님이라고?”
“응.”
“좋았겠네.”
“응. 꽃도 줬어.”
“다인이가?”
“아니. 선생님이.”
“우와.”
‘이거 봐!’ 하며 가방에서 구깃해진 색종이 꽃을 백미러로 힐끔 보며 윤기가 웃고, 지민은 조수석에서 고개를 돌려 ‘우와’ 하고 대답해준다. 다인은 뿌듯한 얼굴로 다시 제 가방에 꽃을 구겨 넣었다. ‘선생님’을 ‘샌샌님’이라 발음하는 다인이의 발음이 귀여운지 지민은 가끔 ‘샌샌님’하고 다인을 쫓아했고 윤기는 그런 지민을 보며 픽 웃었다.
*
방금 옷을 갈아입은 태형이 옷매무새를 다듬으려 제 정장을 군데군데 살짝 잡아당긴다. 몸에 꼭 맞게 재단된 검은 정장이 태형의 여리하면서도 탄탄한 몸선을 보인다. 똑똑, 하고 노크를 하고 이사실로 들어가니 비서가 일어나 태형을 향해 인사한다.
“이사님 자리에 계십니까.”
“예,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들어가시죠.”
비서에게 인사를 한 태형이 그녀를 지나 ‘대표이사실’이라는 명패가 달린 사무실 문을 다시 노크한다.
“이사님, 저 태형입니다.”
“들어와요.”
태형이 사무실 문을 여니 널찍한 사무실이 나타난다. 발소리가 나지 않는 회색의 바닥재를 지나 새하얀 벽으로 시선을 옮기면, 옆으로 프레젠테이션용의 화이트보드가 서 있고 반대편엔 모던한 톤의 책장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닿아있었다. 그 안에 빽빽하게, 혹은 듬성듬성 꽂혀있는 두껍고 얇은 책들은 사무실의 분위기를 한층 고풍스럽게 만들었다. 입구에서 바로 정중앙에는 이사의 커다란 책상이 있었다. 두꺼운 원목으로 만들어져 있어 총알도 막는다는 그 책상엔, 의외로 어리고 하얀 얼굴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차가운 그 얼굴 밑으로 보이는 고급스러운 명패엔 ‘대표이사 전 정 국’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은테 안경을 쓰고 서류를 읽던 정국이 안경을 벗으며 태형을 보자 태형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손짓으로 태형을 가까이로 부른 정국이 언제나처럼 크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됐어요.”
“현재로서는 별다른 이상 상황은 없습니다.”
“그래요…. 박지민은 어때 보여요.”
“아직 기억은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확실한 거죠.”
“그렇습니다.”
“그럼 기억이 돌아오기 전에 내 앞으로 와야겠죠.”
미소를 띤 입술이나 부드러운 말투와는 달리 날카롭게 빛나는 정국의 안광(眼光)에 태형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구체적인 작전은 있어요?”
“생각은 있습니다만, 타이밍을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 그래요. 그 형사 이름이… 민윤기라고 했죠. 여전히 붙어 있던가요.”
“예. 밖에서 박지민과 떨어져 있는 적이 없어서 좀 더 기다려봐야 할 것 같습니다.”
“타깃을 바꾸는 건 어때요.”
태형이 정국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슨 말씀이신지, 하고 묻자 정국이 작게 웃는다.
“어른이 아니라… 아가를 건드리면 좀 나쁜 사람일까요?”
“…….”
“뭐, 아가는 나중에 멀쩡하게 돌려주면 되잖아요. 그쵸?”
태형을 향해 예쁘게도 웃은 정국이 안경을 다시 쓴다. 이제 업무를 볼 테니 나가라는 무언의 지시였다. 그런 정국의 정수리에 다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태형의 뒤로, 다시 정국의 한 마디가 들린다.
“조심해요.”
“…….”
“나 당신 없으면 안 되잖아.”
정국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살짝 돌린 태형이 제 오른 주먹을 꽉 쥐었다 놓는다. 나가봐요, 하는 정국의 말에 태형이 다시 돌아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하고 걸어 나간다. 정국은 태형이 나가며 소리 없이 닫힌 문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