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뷔국] 막장드라마 01.
[랩뷔국] 막장드라마 01.
w.몽블랑
세상은 변한다. 변한다는 사실 말고는 모든 게 변한다. 과학은 발전하고 사람들의 의식도 변화하며 그에 따른 사회 현상들도 달라진다.
그중에서도 작금의 생명과학 기술이란 실로 놀라운 것이어서 남자도 임신과 출산이 가능해졌다. 임신과 출산에 있어 현재 수수께끼란 없었다. 여자와 남자 사이에 아이를 갖는 것은 물론, 남자가 아이를 임신하는 것, 또한 동성 간의 임신도 가능해진 세상이 되었다. 그로 인해 여자와 남자는 아이를 갖는 데 있어 모두 똑같은 권리와 똑같은 의무를 동시에 지게 되었다. 이것은 기존의 성 역할을 뒤집어엎는 센세이셔널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일반적이지는 않듯 현재로서도 다들 생긴 대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많았다. 그것이 비용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여자가 출산하는 것이 남자가 출산하는 것보다 안전했고 비용도 훨씬 적었다. 그렇기에 ‘다수의’ ‘일반적인’ 부부들은 ‘전통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달랐다. 게이 부부인 이 두 사람에게는.
그들이야말로 이 새로운 첨단 과학을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집단이었다. 그러나 그 신세계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이 모든 것이 귀찮고 왜 하필 이런 빌어처먹을 좋은 세상에 태어났나, 싶은 사람도 있기 마련인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부부였을 때, 문제는 발생했다.
*
“우리 애기 갖자.”
아직 땀에 젖은 나신으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정국의 귓가에 태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고르고 있던 차에 들려온 지겨운 이야기라니. ‘우리 애기.’ 하도 여러 번 들어 귀에 못이 박힐 듯한 말이었다. 흘끗 쳐다본 태형의 얼굴이 귀엽게도 웃고 있어 정국은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수건을 들고 욕실로 들어가는 정국의 등에 대고 태형이 한 번 더 말했다.
“애기! 애기 갖고 싶따아!”
무표정의 정국의 얼굴 뒤로 쾅, 하고 닫히는 욕실 문을 바라보던 태형의 얼굴에서 점점 웃음기가 사라진다. 이젠 아기 얘기만 해도 정국이 짜증을 내는 것 같아 가장 기분 좋을 때 최대한 귀엽게 말해 보려고 했지만 이젠 그도 안 먹히는 모양이다.
부부라는 이름 아래서 산 지도 벌써 2년. 연애까지 합치면 함께 지낸 지 벌써 4년이다. 게다가 정국의 사랑은 흔히 말하는 유통기한보다도 짧은 것 같았다. 예전엔 저 연하의 무뚝뚝함도 파릇파릇해서 좋았는데, 그것도 다 예전 일이 된 것 같다. 물론 정국에게 자신의 애교 또한 그럴 것이라 생각하던 태형은 어느 새 우울함에 한숨을 포옥 내쉬고 말았다.
“…애기이… 갖고 싶따…. 진짜아.”
이이이. 베개에 폭, 얼굴을 묻어버린 태형은 엎드린 채 떼를 쓰듯 침대 시트 위에서 버둥거렸다. 그래봤자 날아올 건 침대를 어지럽혀 놨다는 정국의 잔소리일 걸 알면서도, 받아줄 사람 없는 떼쟁이라도 되고 싶었다.
*
회사에 출근한 정국은 제 메일함부터 열었다. 어제 퇴근 이후로 쌓인 메일부터 체크하기 시작한다. 영업사원인 그는 오늘도 잡힌 외근을 확인하고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리님, 가시죠.”
정국의 말에 ‘뭔데.’ 하고 느릿하게 묻는 상사의 초점 없는 눈빛에 정국이 ‘외근입니다. 자세한 건 가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알았어.’ 설렁설렁 대답을 하며 하품을 하고는 커피잔을 들어 여유롭게 마시며 자신의 컴퓨터를 느릿느릿 체크하는 상사를 보던 정국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거래처와의 약속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저렇게 게으름을 떨 때면 화가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었다. ‘저 먼저 나가 시동 걸고 있겠습니다.’ 하는 정국의 말엔 대답도 없었다. ID카드를 출입구에 대고 찍으며 열리는 문에 정국이 작게 욕을 짓씹었다. 아, 시발.
*
터무니없이 가격을 내려달라는 거래처의 말에 정국은 스트레스가 쌓였다. 말도 안 되는 가격을 제시해놓고 ‘이 정도는 해줘야지 우리가 또 거래를 하지.’ 하는 거래처 주임의 말에 정국은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나 더 어이가 없던 건 ‘사무실에 전화해 봐.’ 하는 제 상사인 대리의 말이었다. 이게 말도 안 되는 얘기란 걸 모르는 건지 관심이 없는 건지 ‘말은 해볼 수 있잖아.’ 하고 말한다.
전화하면 욕 먹을 텐데.
그러나 거래처 사람들은 이미 ‘저 정도 가격에 해줄 수 있나보네’, ‘저 새끼가 엄청 뻗댄 거네’ 하는 눈으로 정국을 쳐다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해대는 거래처와 빨리 전화해 보라는 상사의 눈치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피해 핸드폰을 꺼낸 정국이었다.
- 네, 영업팀 과장 김승철입니다.
“과장님, 저 전정국입니다.”
- 어, 무슨 일이야.
“지금 거래처와 만났는데 가격을 거기서 좀 더 낮춰달라고 해서요.”
- 얼마나.
그쪽에서 제시한 가격을 들은 과장에게서 말이 없다. 정국도 덩달아 입을 다물었다. 이 침묵의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 전정국 씨.
“네.”
- 전정국 씬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 제정신으로 물어보는 거야 지금?
“대리님께서 전화라도 한 번 해보라고….”
- 병신이냐?
정국이 눈을 감았다. 귓가로 과장의 혈압이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과장은 가끔 팀장과 싸우면 막말이 더 심해지곤 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오늘 자신은, 잘못 걸린 것 같았다.
- 니넨 도대체 거래처랑 만나서 뭘 하는 거야. 어? 그쪽을 설득해야지 가격 깎자고 나랑 통화를 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그러라고 돈 주는 줄 알아? 제발 돈값을 해, 돈값을! 도대체 하나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에이!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꽉 쥔 정국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잠시 차가운 벽에 기대어 서서 눈을 감는다. 숨을 천천히 고르던 정국은 이내 눈을 반짝 뜨고 한숨을 내쉰 후 다시 거래처와 상사가 기다리는 테이블로 걸어간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
“나 왔어.”
거래처와의 미팅으로 기가 빨려 지친 정국이 현관으로 들어서자 거실에서 태형이 ‘응. 왔어.’ 하고 말했다. 평소보다 심드렁한 듯한 태형의 태도에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소파에 앉아 티비에 시선을 고정한 그는 아이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 또 애야. 항의하는 듯한 태형의 태도가 거슬렸지만 집에서까지 싸우고 싶진 않았다. 불평을 꾹 참으며 정국이 말했다.
“밥 줘.”
“식탁 위에 있어. 먹어.”
“넌. 안 먹어?”
“난 먼저 먹었어.”
“그래서 안 먹는다고?”
“어.”
“집에만 있는 사람이 뭐가 배고프다고 먼저 밥을 먹어?”
“뭐?”
태형이 바로 치고 들어오는 것에 정국은 속으로 아 망할 말실수, 하고 생각했다. 결혼 전부터 멀쩡히 회사 생활하던 태형을 그만두게 했던 게 자신이었다. 이제 와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식은 밥을 식탁에 차려놓고는 먹든지 말든지의 태도로 소파에서 티비만 보고 있는 게 괘씸해 자신도 모르게 말이 비뚤게 나가고 말았다. 그에 태형은 바로 말꼬리를 붙들고 물어왔다.
“집에 있는 사람은 배고프면 안 되냐? 꼭 너 퇴근하실 때까지 꼬박꼬박 기다리다 같이 밥 먹어야 돼?”
“아, 그만그만. 내가 미안해. 그만해.”
“그만하라고? 나는 할 말도 못해? 네가 그만하자 그러면 내가 그만해야 돼? 왜. 네가 벌어다 준 돈으로 먹고 사는 식충이 같은 인간이라?”
“무슨 말을 또 그렇게까지….”
“그럼 네 말뜻이 도대체 뭔데!”
“아, 왜 소릴 질러!”
시끄럽게, 진짜…. 짜증이 뚝뚝 묻어나는 정국의 표정에 태형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식탁에 앉았던 정국이 들었던 젓가락을 소리나게 탁, 하고 내려놓자 소파에 앉아있던 태형도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아버렸다. 아무도 없는 거실에 티비에서 나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흐른다. 정국은 제 머리를 벅벅 헝클어트렸다. 스트레스라곤 풀 구석 없는, 무엇하나 제 맘대로 되는 것 없는 현실이었다.
*
다음 날이 되자 태형은 신문의 구직란을 들고 길을 나섰다. 전날 정국에게서 들은 말이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자신을 집에 기르는 개라도 된 것 마냥 취급했다. 주인이 올 때까지 밥도 먹지 말고 기다려야 하는 개. 아니, 집안일도 해주고 욕구도 풀어주니 그것보단 나은가. 쓴웃음을 짓던 태형이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 스스로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무심코 손에 들린 신문에 시선을 주던 태형은 이내 맥이 탁 풀어졌다. 이제 와 구직을 한들 의미가 없었다. 사실 일을 구하고 싶지도 않은 게 그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한창 태형이 회사에 적응하느라 힘들어할 때쯤 정국이 회사를 그만둬도 된다고 했을 때, 태형은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엔 누구나 실수하고 어려워한다고 생각했고, 누구에게나 적응기간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이 저지른 실수들로 아무리 상사에게 혼나도 내일은 열심히 해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보게 된 것이 동성 부부 사이의 ‘임신과 출산’에 관련된 다큐멘터리였다.
여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 부부 모두 임신과 출산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중 더 어려운 쪽은 아무래도 남자와 남자 쪽이었으며, 특히 아이를 갖고 있어야 하는 쪽은 더욱 더 힘들었다. 아이가 뱃속에 있는 내내 응급사태였다. 항상 유산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당연했고 뱃속의 태아와 연결되어 있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상반응들로 인해 삶과 죽음을 오락가락할 정도로 힘들어진 경우엔 끝내 유산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경우에도 불구하고 태어나 품에 안긴 아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수술을 통해 꺼낸 아이를 품에 안겨주자 tv 화면 속 부부의 표정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수많은 고생과 고통 끝에 얻은 그 환희와 감동이. ‘고생했어, 아가.’ 마취가 아직 제대로 깨지 않아 기운이 없는 남자가 아이의 이마에 조심스레 입을 맞춘다. 만지면 깨질 듯 연약한 아이를 향한 남자의 눈빛엔 그러나 벅차오르는 사랑스러움이 가득했다.
태형은 순간 반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아이의 존재에. 그 사랑스러움에. 아이와 눈을 맞추는 남자의 애정, 그것이 부러웠다. 저런 존재를 자신도 갖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아이를 좋아하던 태형에게 ‘자신의’ 아이란, 반드시 가져보고 싶은 존재였다. 그게 정국과의 아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태형은 정국을 졸랐다. 좋은 기색을 내비치지 않는 정국에게 배짱 좋게 ‘나 사직서도 냈어.’ 라고까지 말을 해도, 정국의 반응이란 ‘그래, 잘했네.’ 였다. 아이에 대한 건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 정국을 태형이 소파에 붙들어 앉혔다. 손을 붙들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자 그제야 정국은 ‘왜 그래.’ 하고 물었다.
‘정국아, 나 애기 갖고 싶어서 사직서 낸 거야.’
‘애기는 무슨. 지금도 정신없어.’
‘응, 너 바쁜 거 알아. 내가 낳아서 내가 키울게. 나중에 생각하면 애기 키우는 게 좋대. 애들 커가는 재미도 그렇고. 거기다 생각해봐, 너랑 내 아이. 진짜 예쁠 거야.’
‘태형아.’
희망과 꿈에 부풀어가는 태형의 눈을 바라보던 정국이 조용히 태형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어 태형은 정국을 향해 고갤 돌렸다. 정국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똑바로 태형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정국의 눈동자에서 이유 모를 적대감이 흘렀다.
‘난 아기 싫어.’
‘…….’
‘내 인생에 애 같은 건 없었으면 해. 절대로.’
‘…….’
‘설령 그게 너와 내 애라도.’
단호한 정국의 말에 태형의 표정이 굳어진다. 정국은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의 까맣고 깊은 눈이 그렇게 말했다. 그의 굳은 입술이 그렇게 말했다. 이유를 묻는 태형에게 정국은 고개를 저었다. 이유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의 단호한 말에 태형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태형은 이내 고개를 숙이고 정국과 말을 섞지 않았다. 그건 정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두 사람의 아기에 대한 대화는 끝이었다. 지금껏 눈치를 보며 아기 얘기를 꺼내는 태형이지만 정국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이대로라면 언젠가 자신도 정국도 폭발할 게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자신은 아이가 갖고 싶었고 그 부분에 있어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다만 정국이 왜 그렇게까지 아이에 대해 부정적인지, 그 이유 정도는 들어보고도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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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막장드라마 클리셰를 하나씩 넣을 거예여^ㅁ^ 루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