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뷔/슙민] 적도(赤道) 02.
적도 02.
적도보다 뜨거웠던 너의 사랑이,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벌써 고등학교에서 치룰 수 있는 시험이 몇 번 남지 않았고 그만큼 스트레스도 머리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아침 등굣길도 그랬다. 풀리지 않은 스트레스, 피로와 함께 멍한 얼굴로 학교를 가는데 누군가 앞길을 턱 하니 막는다. 약간의 짜증과 함께 올려다보니,
‘어, 윤기 형….’
지난 번 형을 데려다 준 윤기 형이었다. 이번이 두 번째로 만나는 것인데도 형은 내가 생각보다 반가운 듯 광대가 확 올라간다. 형의 웃는 얼굴에 낯을 가리는 나도 빙긋이 웃었다. 형 또한 싱긋싱긋 웃으며 오랜만이라며 인사한다.
‘학교 가?’
‘네. 형은 어디 가요?’
‘나? 난 시험 기간이라 밤새고 이제 집에 가.’
씻고 또 바로 나와야 돼. 미치겠다, 이게 사는 거냐? 너는 공대가지 마라, 하고 피곤에 쩐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형 집이 이 근처에요?’
‘어. 그러니까 저번에 김남준도 데려다 주고 그냥 가지. 안 그러면 니네 집에서 잤을걸.’
‘아… 몰랐어요. 어딘데요?’
윤기 형이 말해준 집은 집에서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바로 아파트 바로 옆 단지였다. 생각보다 너무 가까워서 그동안 왜 안 놀러왔냐고 했더니 우리 집 동과 호수가 헷갈려서 찾아갈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형한테 물어보지 그랬어요.’
‘그러니까. 내가 물어봤는데 자기 이제 거기 없다고 안 알려주잖아 미친놈이.’
내가 지 보러가는 줄 아나, 하고 궁싯대던 윤기 형은 그래서 집이 몇 동 몇 호야? 하고 물어보다가 말해주려던 찰나 아냐아냐, 하며 고개를 젓는다.
‘나 분명히 잊어버릴 듯. 나중에 되면 반드시 잊어버린다. 심지어 어제 밤을 새서 한 번 자고 나면 너 만난 것도 잊어버릴지도 몰라. 그냥 카톡으로 알려줘. 전화번호로 추가하게 여기 전화번호 찍어주고.’
케이스도 꼭 형 같이 화려하고도 깔끔한 걸로 들고 다닌다는 생각을 하며 전화기를 받아 핸드폰 11자리를 찍어 형에게 돌려주니 바로 내 핸드폰으로 전화가 온다.
‘그거 내 번호.’
이렇게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나서는 형도 나도 자주 연락하는 편이 되었다. 처음에 사람을 사귈 때 낯은 가려서 얼굴대고 이야기하긴 힘들지만, 이러한 메시지로 연락하는 것은 편했다. 윤기 형은 마치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눈 뜨고부터 잠들기 전까지 이런저런 학업 고민부터 별 거 아닌 말들과 농담들이 카톡창을 빼곡히 채웠다. 가끔은 형의 얘기도 나오는 날도 있었고. 윤기 형은 형과 대학교 동기지만 과가 달라 동아리 활동으로 만난 사이라 그렇게 자주 만나고 있지는 않다고 했다. 또 어떻게 귀신 같이 아는지 학교가 끝나는 시간이면 가볍게 전화도 걸어오곤 했다. 집까지 가는 동안 형도 나도 웃으며 있을 수 있는 그런 얘기들을 해주곤 했다. 이렇게 잘 맞는 사람도 오랜만이다 싶게 생각될 만큼 형은 나를 잘 알고 있었고 잘 파고들어왔다. 오히려 형보다 더 빨리 친해진 것 같다.
*
시간이 흘러 수능이 끝나고 출석일수를 채우러 등교를 하던 느긋한 어느 날은 그런 윤기 형에게서 데리러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실제로 얼굴을 본 건 몇 번 없어 반가운 마음에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정말 데리러 올 거예요?]
[ㅇㅇ]
[나 언제 끝나는지 앎?]
[ㅇㅇ]
[손가락 부러짐?]
[ㄴㄴ 바쁨]
카톡으로 이렇게 바쁜 게 와닿긴 처음이다. 픽 웃으며 액정을 끄곤 배치표를 책상에 두고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이 수많은 대학 중에 나는 어딜 간단 말이냐아아아…. 미간이 팍 찌푸려진다.
원래 만날 때 시간은 내가 하교하는 시간대로 해주었는데, 오늘은 형이 시간을 정해서 알려주었다. 종례시간보다 좀 늦은 약속 시간 때문에 교실에서 시계만 쳐다보다 약속 시간이 되자 가벼운 가방조차도 사물함에 넣어버리고 뛰쳐나왔다. 형이랑 오늘 하루 뭐하고 놀지, 하는 생각에 싱글싱글 웃음이 나왔다. 그때 교문으로 꺾어지는 모퉁이를 도는 형이 보였다.
‘형! 윤기 형!’
‘어, 먼저 나와 있었어?’
하며 웃는 얼굴로 내 어깨에 팔을 턱 얹고 어깨동무를 한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방금 나왔는데 형 바로 오던데요.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딱 맞춰왔지, 하며 교문에서 막 벗어나려던, 그때였다. 형이 뒤에서 오던 누군가에게 어깨가 잡아당겨져 배에 주먹질을 당한 건.
‘이 나쁜 자식아아!!!!’
녀석은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형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나는 놀라서 센 주먹질에 꼴사납게 바닥으로 쓰러진 형을 부축했다. 무슨 일인지 파악도 잘 되지 않았다. 형을 때린 녀석은 나와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명찰도 나와 같은 색이었다. 같은 학년…? 하지만 모르는 얼굴이었고 이름은 한자로 써 있는 통에 금방 읽을 수가 없었다. 녀석은 때린 건 자신인 주제에 씩씩대면서 눈은 곧 눈물이 흐를 듯 물기로 가득했다. 나가떨어진 형은 한 손으로는 나를, 다른 한 손으로는 배를 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녀석은 결국 굵은 눈물방울을 뚝, 하고 떨어뜨렸다. 그러나 윤기 형은 그런 녀석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섰다.
‘가자, 태형아.’
‘…어? 어, 네.’
오히려 놀란 건 녀석이었다.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윤기 형에 녀석이 어어, 어… 하며 걸어가는 우리 뒤를 한두 걸음쯤 쫓아온다. 할 말도 많고 사연도 많은 얼굴이었지만, 많이 쫓아오지 못하고 시선을 떨군 채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 슬퍼 보이는 체념에 그 녀석에게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아 나는 모퉁이를 돌 때까지 녀석을 쳐다보고 있었다.
윤기 형은 그날 대낮부터 술집으로 들어갔다. 열려 있는 술집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무나 잘 보이게도 교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는 술집을 찾기 쉽진 않았지만, 나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고 들여보내준 집이 한 곳이 있었던 것이다. 형은 정말로 술만 마셨다. 술이 나오자마자 유리컵에 소주를 따라서 세 잔을 연속해서 마시는데 나는 형이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릴까봐 전전긍긍해야했다. 불안한 눈으로 형을 쳐다보고 있으니 잔을 내려놓은 형이 나를 보며 웃었다.
‘태형아.’
형이 어지러운 듯 관자놀이를 짚는다. 어, 핑 돈다, 하는 형의 말에 나는 더 불안해졌다. 혀도 약간 누운 발음이다. 형은 간신히 나와 눈을 맞추고 입을 열었다.
‘사람 마음 참 뜻대로 안 돼.’
‘…….’
‘나도 안 아프고 화 안 내고 좀 편하게 살고 싶은데, 그게 안 돼.’
‘…….’
‘아가, 넌 돼?’
‘…그런 거 몰라요.’
형은 모른다는 나의 말에 박수를 치며 웃었다. 나는 형이 왜 웃는지 모르고 같이 웃었다. 금방 사그라들었지만.
‘몰라? 아직 어려서 그런가. 나랑 별 차이 안 나는데. 그치?’
‘…….’
‘왜 하필 그때 나타난 거야. 응? 태형아. 이 귀여운 녀석아.’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형은 그때부터 별 말 없이 술만 들이켰다. 처음처럼 유리잔에 따라 원샷하는 일은 없었지만, 무언가에 쫓기는 듯, 빨리 술에 취하고 싶은 듯 해 보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한 채 가만히 형의 앞자리를 지켰다.
가끔 형은 핸드폰을 꺼내 사진첩을 열어보기도 했고, 가끔은 카톡을 열어 누군가와의 대화를 읽기도 했다.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한 자리를 지키던 형은 고개를 들고 풀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가자, 이제.’
지갑을 꺼내며 일어나려던 형이 의자와 함께 우르르 넘어졌다. 그렇게 마셨는데 멀쩡히 일어나는 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덕분에 손에 들고 있던 지갑 속에 있던 것들이 쏟아졌다. 형이 넘어지는 소리에 술집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우리에게 쏠렸다가 내 교복에 한 번 더 시선이 모인 후 찜찜한 표정으로 사라졌다. 형, 잠깐 앉아 있어봐요, 하고 형을 다시 의자에 앉히고 돈을 꺼내 술값을 지불하고 지갑 속에 있던 것들을 대충 손에 챙기던 중, 아까 형을 때렸던 녀석의 증명사진이 보였다. 그것도 한 장이 아니라 꽤 여러 장. 중학교 때로 보이는 사진부터 현재의 얼굴까지, 보니 형의 지갑 속의 사진은 그 녀석뿐인 듯 했다. 그리고 다시 떠오르는 그 울던 슬픈 얼굴. 시원찮은 기분으로 형의 지갑에 대충 사진을 챙겨 넣고 형을 등에 업었다.
집까지 별로 멀지 않은 거리였는데 형을 업고 걷자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처음엔 형네 집에 편하게 데려다 주려고 걷던 것이 10분이라도 가까운 우리 집으로 형을 옮기고 있었다. 도어락을 열기 위해 번호를 누르는데 다 누르기도 전 삐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 형.’
‘…오랜만이네.’
김남준이었다. 나도 그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보며 그는 문을 열어주고 나는 윤기 형을 업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비어있던 형의 방에 짐들이 들어온 게 보였다. 방학해서 집으로 들어온 듯했다. 나는 들어온 그대로 내 방으로 윤기 형을 데려가 침대에 눕혔다. 불편할까 겉옷과 양말 등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주고 문을 닫으니 다리에 힘이 풀려 주르륵 주저앉았다. 그런 나를 쫓아다니며 도와주던 형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윤기랑 같이 와?’
‘아 오늘 만나서 놀기로 했었는데… 윤기 형이 너무 많이 마셨나봐요.’
‘너도 마셨어?’
‘아니요. 아니죠. 교복 입었는데 어떻게 마셔요.’
하고 웃으니 형도 그렇네, 하고 마주 웃는다. 왜인지 경직된 얼굴을 하고 있던 형이 웃으니 조금 분위기가 편해졌다.
‘형은 오늘 방학한 거에요?’
‘방학한 지는 좀 됐는데 이제 네가 대학교 원서 쓸 기간 다 됐잖아. 그래서 이런 것 저런 것 좀 얘기해볼까 하고…. 도움이 됐으면 해서.’
‘아… 성적 쪽팔린데.’
‘어차피 밝혀질 텐데 뭐.’
형이 개구지게 웃었다. 그렇게 웃는 건 또 처음 봐서 신기해서 나도 마주보고 웃었다. 그러다 문득 교복이 땀에 젖은 게 느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씻고 올게요.’
‘응. 저녁은 먹었고?’
‘아 못 먹었는데. 형은 먹었어요?’
‘나 지금까지 너 기다렸는데.’
‘정말요? 그럼 씻고 같이 먹어요.’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형을 향해 웃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
그날 새벽이었다. 무슨 소린지에 잠이 번뜩 깨어 침대에서 일어나 멍하니 앉아있는데 거실에서 누군가 소근대는 소리가 났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형과 윤기 형이었다. 시곗바늘은 새벽 세 시. 윤기 형을 내 방에 재웠지만 일찍 학교 가는 나 때문에 서로 불편할 수 있으니 날더러 자기 방에서 자라는 형의 말에 나도 납득하고 형 방에서 내가 자고, 내 방에서 형과 윤기 형이 자고 있었다. 그런데 둘 다 이 새벽에 거실에 나와서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침대 있는 자리에선 들리지 않아 방문으로 와서 살며시 방문을 열었다. 가까이에서 들은 두 사람의 대화는 둘 다 꽤 격앙된 목소리를 꾹 눌러 참고 있었다. ‘미쳤냐고.’ 형이 먼저 말했다.
‘너 지민이 두고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이러려고, 고작 몇 년 사귀려고 나한테 오픈하고 이해해 달라고 그렇게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굴었냐?’
‘어떡하라고 지겨운데. 어떻게 해야 걔가 다시 좋아지는지 나도 좀 알고 싶다고. 어젠 태형이랑 만나서 나가는데 와서 욕을 하더라.’
‘뭐? 너 태형이랑 만나?’
‘…….’
‘태형이 왜 만나냐 너.’
‘…….’
‘…너 진짜 미쳤구나.’
‘태형이는 몰라. 내가 자기 좋아하는 거.’
……몰랐다. 형이 ‘나’를 좋아한다니. 윤기 형이 나를 ‘좋아한다’니. 이렇게 엿듣게 될 줄은 몰랐지만 엿들어서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거실에 있는 형도 마찬가지인 듯 말없이 윤기 형을 보다가 어이가 없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태형인 안 돼. 어디까지 왔는지는 몰라도 그만해. 걔 그런 애 아니야.’
‘너무 많이 왔어. 이제 내 손을 떠났어. 나 그만 못한다.’
‘그만하라고. 그런 애 아니라고.’
‘그런 애가 어떤 앤데? 남자 좋아하는 애 아니란 거냐? 그럼 너랑 나는 그런 애고?’
‘야 그런 말이 아니라……’
이건 또 무슨……. 형도 게이란 거야?
아…….
그냥 문을 닫아야겠다. 더 이상 충격 받고 싶지가 않다. 더 알고 싶지도 않다, 저 둘의 사정. 너무 충격이 커서 오늘 하루가 다 꼬이는 것 같다. 이 새벽까지 지나고 나면 꼬인 하루가 풀려 있을까. 잠자리까지 이렇게 방해받고 나니 기가 빨린 느낌이다. 이 형도 게이, 저 형도 게이라니. 이런,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