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뷔/슙민] 적도(赤道) 04.
적도 04.
적도보다 뜨거웠던 너의 사랑이,
형이 그렇게 떠나고 나는 멍하니 몇 시간을 앉아있었던 것 같다. 박지민도 생각하고, 민윤기도 생각하고, 내가 민윤기한테 했던 말도 생각하고, 박지민이 나한테 했던 말도 생각하고… 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넘어갈 때쯤 집에 들어섰던 걸 보면.
‘많이 늦었네? 어디 갔다 왔어?’
‘아니요… 일이 있어서요.’
‘표정이 안 좋은데.’
형의 걱정하는 표정이 보였지만 형은 윤기 형과 친구였기 때문에 섣불리 고민을 털어놓기도 어려웠다. 순전히 나 때문에 우리 집에 와 있는 형인데 말도 못해주고, 집에나 늦게 들어오고, 하는 생각에 괜히 미안해져 와 가방을 방에 놓고 옷을 갈아입고 쇼파에 앉은 형의 옆에 가만히 앉았다.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형이 내가 옆에 앉자 결국 픽 하고 웃었다. 그런 형과 눈을 맞추며 제가 좀 귀엽죠? 하고 씨익 웃자 형도 결국 소리 내서 웃었다.
‘저녁은. 먹었고?’
‘아직 안 먹었어요.’
‘그럼 너 기운도 없으니까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진짜요?’
‘응.’
외출복으로 갈아입으러 가는 형이 방으로 들어가면서 ‘가서 대학 얘기도 해보고.’ 하는 말에 아, 대학… 제발 그것만은…. 하고 애원하자 형이 픽,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형이 데려간 곳은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평일 디너라도 사람이 꽤 많았다. 대학생이면 다 이런 데 데려올 수 있나. 대학생이라도 좀 비싸지 않나…, 하면서도 형이 가져다 준 것들을 먹고 스테이크도 먹고. 나도 모르게 배가 고팠는지 끊임없이 우물대다 형과 눈이 마주쳐 헤- 하고 웃어버렸다. 형은 그게 웃겼는지 같이 웃었다.
형은 생각보다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웃어주는 순간순간이 따뜻했다. 형과 있으면 안심되는 기분이었다. 뭐랄까. 엄마와만 살았던 내가 비어있던 아빠의 자리가 만약 비어있지 않았다면 이런 느낌일까, 하고 생각할 정도로.
형은 대학에 대해 조언해주러 온 말이 사실이었는지 성적표와 배치표, 그리고 나의 적성 검사를 들고 이런 것 저런 것에 대해 상담해주었다. 형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원서를 내는 한 달 넘는 시간동안 형과 많이 친해질 수 있었다. 드디어 말도 놓을 수 있었고. 반말을 시작할 때 씨익 웃던 형은 내가 말을 놓길 꽤 기다려왔던 눈치였다.
그동안 지민과 윤기 형에게서의 연락은 없었다. 하루 종일 연락하던 윤기 형에게서 연락이 없는 게 이상하고 허하긴 했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둘이 다시 잘 되었나보다 하고. 그렇게 생각했다.
*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된 건 어느 날 갑자기 박지민이 우리 집으로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려 다른 날보다 추웠던 날. 하루 종일 하늘이 어두워 거실 등을 켜지 않으면 집 전체가 어슴푸레한 새벽의 색이 되는 그런 날이었다.
현관 벨소리가 울려 누구시냐 물어보며 든 인터폰에 머리칼이 젖은 지민이 비쳤다. 이런 날 왜 젖었지…? 하면서도 문을 여니 입고 있는 까만 목도리와 회색 코트까지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다, 색이 엷어지다 못해 푸른 듯한 입술로 덜덜 떨고 있는 녀석이 보였다. 매일 나던 그 풋풋한 비누 향기는 찾아볼 수 없었고 다만 무거운 비 냄새가 녀석을 감싸고 있었다. 그 행색에 너무 놀라서 ‘야!’ 하고 소리를 지르자 방에 있던 형까지 뛰어나올 지경이었다. 형은 나와 똑같이 놀라 문간에서 멈춰섰다. 놀란 우리 형제를 버려진 강아지처럼 쳐다보던 녀석은 나오다 말다 하는 목소리로 우리에게 물었다.
‘…ㄴ, 나… 잠깐… 들어가도 돼…?’
그 말을 듣자마자 나와 형은 일단 들어오라 했다. 그러자 떠느라 잘 걷지도 못하는 녀석이 신발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제 코트에서 떨어지는 물을 보더니 거실로 올라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형이 일단 따뜻한 물로 씻고 오는 게 좋겠다며 안으로 잡아끌었지만 지민은 어디서 난 힘인지 버티며 고개를 저었다.
‘이 말만 하고… 갈게.’
‘가긴 어딜 가. 가도 잠깐 쉬었다 가.’
‘나… 진짜로… 윤기 형이랑 헤어졌어.’
그 말에 나와 형 둘 다 행동을 멈췄다.
‘나온다고 했거든…. 한 시에 나랑 만나기로 했는데… 만약에 마음이 변했다면… 나오기로… 했는데, 그래서…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오지 않았어…. 더 기다려 보려고 했는데… 그때처럼 혹시 올까봐….’
시계가 9시를 넘기고 있던 시간이었다. 뒤죽박죽 내뱉는 말이었지만 대충 녀석과 윤기 형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형이 뒤에서 조용히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너무 힘들어…. 그때랑 달라서…. 흐읍…. 기다릴 수가 없어. 이제 그만 하고 싶어…. 그만 사랑할래….’
‘…야….’
언제부턴가 울먹이는 녀석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만하고 들어오라고 하려던 차, 김태형, 하고 녀석이 나를 불렀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녀석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내 눈과 눈을 맞췄다. 그 눈에 시리도록 초점이 없어서 나는 약간 오한이 들었다.
‘윤기 형… 받아주면 안 돼…?’
‘…….’
‘형도 많이 힘들었을 테니까…. 강요하면 안 되지만, 흐으… 내가 못 하는 걸, 너는 할 수 있으니까….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녀석이 털썩 무릎까지 꿇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 녀석을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할까. 친구에게 들은 말로 이 녀석은 부잣집 외동아들이랬다. 주위사람에게 귀여움만 받고 자랐다고 했다. 언제부터 녀석은 사랑의 슬픔을 배웠을까. 하지만 나는 녀석의 말을 들어줄 자신이 없었다. 윤기 형에게 마음이 가면… 그러면 어느 정도 해피엔딩이겠지만, 만약 아니라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걸까.
나대로의 생각에 빠져있는데 형이 뒤에서 어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앞으로 뛰어나왔다. 축 늘어진 지민이 바닥으로 스러져 내리고 있었다. 작은 몸을 한 팔로 받아낸 형이 그 자리에서 녀석의 푹 젖은 코트와 목도리를 벗겨냈다. 의식이 없는 녀석의 얼굴은 아까와는 다르게 볼이 발갛게 상기된 채 숨을 색색 몰아쉬고 있었다.
‘태형아, 욕실에 따뜻한 물 좀 받아주고 갈아입을 옷 좀 가져와. 얘 씻겨서 눕혀야 할 거 같다.’
‘응.’
욕조가 어느 정도 차자 형이 녀석을 안아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나는 문간에 속옷과 겉옷을 놓고 외투를 걸쳤다. 약국에 다녀와야 했다. 아무래도 오늘 밤엔 해열제가 필요할 것 같았다.
*
침대에 눕혀놓은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앓기 시작했다. 체온을 재어보니 평균선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해열제도 먹여보았지만 그리 잘 듣지는 않았다. 물도 잘 넘기지 못하는 판에 약을 소화시키기 어려운 듯 했다. 끙끙대며 열에 들떠 헛소리까지 하는 녀석을 보다 못한 나와 형은 녀석을 데리고 응급실에 가기로 결정했다. 형이 둘 다 갈 필요 없다며 내가 집에 있길 바랐고 형은 차를 몰아 지민을 응급실로 데려갔다.
응급실에서 링거 좀 맞고 나아져야 할 텐데, 하는 생각에 나도 방으로 못 들어가고 거실 쇼파에 앉아있다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였다. 아직 밖은 깜깜했다. 왜 잠을 깨었나 했더니 형 방에 있던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형 건가…? 했지만 못 보던 폰인 걸로 봐선 지민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화면에 뜨는 ‘민슈가.’ 가끔 윤기 형을 ‘슈가’라고 부르는 것 같았는데….
‘여보세요.’
- 박지민, 너 어디야.
확인도 안 하고 급하게 내뱉는 윤기 형의 목소리에 헛웃음이 났다.
‘형 나야. 김태형.’
- …박지민 전화를 왜 네가 받아.
지민이 아닌 내가 전화를 받아서 그런지 형은 약간 화가 나 있었다. 그런 윤기 형의 목소리는 오히려 내 화를 돋웠다.
‘지금 박지민 어디 있는 줄 알아?’
- 어디 있는데.
‘응급실에 실려 갔어.’
- 응급실에? 왜?
‘도대체 형 걔한테 뭐라고 했길래… 뭐라고 해야 애가 빗속에서 사람을 8시간을 기다려?’
형에게서 말이 없었다. 비오는 바깥에서 8시간이나 기다린 멍청한 박지민이 제일 큰 잘못이지만… 그래도 형이 나빴다. 이렇게 늦게 연락을 줘서는 안 됐다. 이렇게 혼자 놔둬서는 안 됐다.
- …병원이 어딘데.
병원 이름만 내뱉곤 차갑게 전화를 끊고 더 잘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아예 씻고 응급실로 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새벽의 응급실, 그곳엔 잠든 지민과 함께 형, 그리고 윤기 형까지도 와 있었다. 윤기 형은 지민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제 와서…? 하고 생각한 나는 윤기 형이 잡은 지민의 손을 내가 빼버렸다. 내가 온 줄도 몰랐던 형과 윤기 형이 놀란 얼굴로 날 쳐다봤고, 내가 씩씩대고 서 있자 형이 나를 응급실 밖으로 내보냈다. 그런 나를 알 수 없는 얼굴로 쳐다보던 윤기 형은 다시 지민의 손을 잡았다.
형에 의해 밀려나 응급실 문이 닫히고 형은 나를 응급실 접수처 한 켠에 마련된 의자에 앉혔다. 거칠게 앉고 괜히 형의 눈치를 봤지만 형은 화가 나 보이진 않았다. 다만 조용히 생각할 뿐이었다. 몇 분이 지나 내가 진정이 되었다고 생각하자 형은 예의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태형아. 지민이가 많이 신경 쓰여?’
‘불쌍하잖아.’
‘불쌍하지. 지민인 마음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지?’
‘응.’
‘윤기 하는 게 너무하게 느껴져?’
‘엄청.’
‘…형이 보기엔 태형이 네 위치가 잘 가늠이 안 돼.’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들자 형이 말을 하기 어렵다는 듯 검지로 이마를 슥슥 문지른다.
‘그러니까, 음…. 말로 하기 좀 어렵긴 한데…. 네가 윤기보다는 지민이한테 신경을 더 많이 쓰고 있는 것 같아. 윤기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보단 지민이 입장에서 더 많이 생각하고. 그래서 혹시… 지민이 좋아한다거나….’
‘그게 아니고….’
으음.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형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형에게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어서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형은 내가 말할 수 있도록 조용히 기다려 주고 있었다. 그런 형의 옆얼굴을 힐끔힐끔 보다가 난 결심한 듯 숨을 들이켰다. ‘나 윤기 형한테 고백 받았었어.’ 하고 형의 눈치를 보게 됐는데 형은 생각보다 덤덤하게 ‘…응.’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난 윤기 형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었거든. 오히려 좋은 형이라고 생각했는데 날 좋아한다니까 좀 부담스러웠어. 그랬는데 박지민이 윤기 형 아직 진짜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난 될 수 있으면 윤기 형이랑 박지민이 잘 됐으면 했는데….’
‘윤기가 부담스러웠고 아직 지민이가 마음이 있는 것 같아서 둘이 잘 되었으면, 했다고?’
‘응. 근데 그게 잘 안 된 거잖아, 지금….’
‘어제 지민이가 그렇게 말했었지.’
‘거기다 나한테 윤기 형 잘 부탁한다고 했잖아.’
‘…….’
‘이제 그냥 다 복잡해….’
형의 어깨에 이마를 댄다. 그냥 이렇게 기대어서 지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형도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형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가만히 있었더니 새벽 내내 제대로 오지 않던 잠이 이제 쏟아지는 것 같다. 오히려 나보다 형이 잠은 못 잤던 것 같은데…. 괜히 미안해서 슬며시 머리를 들려고 하니 형이 다시 머리를 갖다 어깨에 기대어 준다.
‘졸려?’
‘응….’
‘좀 자도 돼. 나도 좀 잘까봐.’
그럼 그럴까. 느리게 끄덕대다 나는 잠이 들었다. 어렴풋하게 형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게 느껴졌던 것 같다.
*
박지민은 그대로 폐렴을 얻어 얼마 간 입원 후에야 퇴원할 수 있었다. 폐렴으로 그친 게 다행이었다. 그날 형과 나는 녀석한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줄 알았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만든 주범인 윤기 형은 아무래도 입원 기간 내내 박지민의 곁을 지켜주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박지민이 퇴원한 다음 날의 졸업식, 윤기 형은 나에게 다시 고백했고 우린 사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지민은 그날 교육청장상이 예정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졸업식에 나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