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뷔/슙민] 적도(赤道) 08.
적도 08.
적도보다 뜨거웠던 너의 사랑이,
…이렇게. 형을 보는 것만으로 또 흔들리니까 다른 사람에게까지 흔들리는 게 싫다는 거다.
*
새벽 세 시. 비가 내리던 밤, 형은 거실 쇼파에 앉아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였다. 마치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같은 집에 살면서도 얼굴 본 지가 한 달도 넘은 것 같았다. 현관으로 들어서며 형을 보고 짧게 멈칫거렸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신발을 벗고 방으로 향했다. 형의 목소리가 들리기
‘어디 갔다 와.’
…전까지는.
발이 멈췄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형의 목소리에 잡아당겨지기라도 한 듯 우뚝 멈춰선 걸음에 가장 원망스러운 건 내 자신이었다. 곁눈으로 보인 건 걱정스러운 형의 표정이었다. 어떤 말로 다가가야 할까 고민하는 저 표정. 많이 무뎌졌다고 생각했던 마음은 형을 보자마자 그간의 시간이 무색하게 처음으로 돌아갔다. 형의 따스함을 원하던 그때로 되돌아가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듣기가 싫어 주먹을 꽉 쥐었다.
‘…알 바 아니잖아.’
목소리도 떨릴까 낮은 목소리로 간신히 내뱉으니 다행히도 흔들림이 없었다. 형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형이 급하게 일어서 내 손목을 붙들었다.
‘미안해.’
아아, 제발. 제일 듣기 싫었던 한 마디에 나는 눈을 감았다. 세상이 끝났으면, 하고 지나친 기도도 했다. 그러나 형은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내가 오해했어. 그러면 안 되는 거였,’
‘뭐가.’
나는 형을 향해 돌아섰다. 원망스러웠다.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왜 오늘인데. 왜 멈춰 세웠어. 숙였던 고개를 들자 보이는 형의 미안한 얼굴이, 여전히 따뜻한 손이, 아직도 그가 사랑스럽고 원망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뭐가 미안한데. 형이 뭐가 말이 심했는데.’
‘…태형아,’
‘나더러 더럽다는 말?’
‘…….’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이는 형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살다보니 형이 내 앞에서 이러는 날도 오네. 내가 형 앞에서 이러는 날도 오고.
‘그땐 화났는데,’
‘…….’
‘이젠 괜찮아.’
아직 내 손을 잡고 있는 형의 손을 악수로 바꿔 잡으며 빙긋이 웃었다.
‘나 이제 진짜 더러워, 형.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
‘나한테 지금 어디서 오는 거냐고 물어봤지. 나 지금 남자랑 뒹굴다 모텔에서 오는 거야.’
‘…….’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마.’
두 번 다시 날 비참하게 만들지 마.
잔뜩 일그러진 형의 표정에 나는 악수를 풀고 올렸던 입꼬리도 내리고 뒤를 돌아섰다. 방문을 닫자마자 부옇게 흐려지는 시야에 나는 주르륵 주저앉아 뜨거워진 눈가에 팔을 올렸다.
형이 싫어. 미워. 그런데 사실은 이렇게 붙잡아줬으면 좋겠어. 나한테 관심을 기울여줬으면 좋겠어. 예전처럼 예뻐해 줬으면 좋겠어. 그런데 아직 형의 그 말이 너무 미워…. 나한테 왜 그랬어. 이제 돌아갈 수도 없는데.
언젠가 윤기 형이 말했었다. 먼저 사랑한 사람이 패자라고.
내가 패자였다. 형에게 이렇게 말하면, 형 때문에 망가진 모습 좀 보라고 말하면 정말 통쾌할 것 같았는데, 전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형을 상처 주고자 했던 말들이 오히려 나를 상처 낸 기분이었다.
나는 도저히 어떤 짓을 해도 형을 이길 수가 없었다.
*
‘더 세게…, 하읏, 더 세게 들어와.’
‘…형 아플 거 같은데요. 아니 이미 아픈 것 같은데.’
‘괜찮아, 그냥 들어와.’
지난번의 남자, 정국의 등을 깊이 안으며 재촉했다. 머뭇거리던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원한다면요, 하고 강하게 쳐올렸다. 그의 말대로 꽤나 높아진 고통에 신음은 올라가고 눈꼬리에 눈물이 맺혀 흘렀다. 그것을 마주보던 정국이 눈가를 쓸어주며 짧게 키스했다. 흐윽, 하지 마, 그런 거. 작게 속삭인 말에 결국 정국이 움직임을 멈췄다. 왜…. 하고 형광등에 부신 눈을 가늘게 뜨니 정국이 제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올렸다. 꽤나 화가 난 표정이었다.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지금 뭐하자는 거예요.’
‘…뭐가.’
‘아까부터 해달라는 게 이상하잖아요. 아프게 해달라, 심하게 해달라, 욕해 달라 때려 달라. 뭐 하루아침에 취향이라도 바꿨어요?’
‘…….’
‘뒤도 풀어주지도 못하게 하고, 어디 쓰다듬어 주지도 못하게 하고. 내가 지금 형 고문하자고 여기 있어요?’
완전 기분 나빠요. 나 그냥 씻을래요. 정국이 안에서 급하게 빠져나감에 하윽, 하고 나도 모르게 짧게 소릴 냈다. 그것이 신경 쓰인 듯 정국이 돌아봤지만 나는 정국이 빠져나간 그대로 누운 채 손끝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귓가로 정국의 한숨소리와 함께 욕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형에게서 버려진 나를 나조차도 버리고 싶은데 쉽게 버려지질 않아서 큰일이었다. 더 다치고, 더 힘들어야했다. 그렇게 하면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들이 없어졌다. 비척비척 옷을 주워 입었다.
아직 쉽게 움직이기는 힘들었지만 천천히 옷을 입고 모텔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주위의 술집으로 아무데나 들어갔다. 잊을 수 있는 고통이 없다면 술이라도 좋았다. 어디서 약이라도 판다면 약이라도 하고 싶었다. 현실을 잊어버리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바의 구석에 앉아 보드카를 주문하니 얼마 안 있어 조그마한 잔에 맑은 술이 들이밀어졌다. 입 안으로 털어 넣으니 속으로 뜨거운 액체가 흐르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스트레이트로 들어간 술에 속이 아팠다. 이게 며칠 째 계속되는 음주 때문인지 식사를 거른 탓인지 모르겠다. 그저 아픈 대로 가슴을 문질렀다. 마스터에게 한 잔을 더 주문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정국.’ 전화번호를 준 적도 없는데 사진까지 착실히 저장되어 울리는 화면에 픽 웃었다.
‘여보세요.’
- 어디에요? 갑자기 없어지면 어떡해요?!
‘…미안해.’
- …데리러 갈게요. 어디에 있어요. 멀리 안 있죠?
‘오늘은 그냥 들어 가. 나 다른 사람 만났어.’
- 거짓말 하지 말아요. 안 알려주면 내가 찾을 거예요. 어차피 멀리 안 있는 거 알아요.
‘정국아.’
처음으로 불린 제 이름에 당황하는 기색이 전화기 너머로도 느껴졌다. 어느 새 이름까지 외워진, 생각보다 어리고, 생각보다 어른스러운, 정국아.
‘네가 뭔데.’
한순간에 정국에게서 들리던 모든 소리가 멈췄다. 까맣고 동그란 눈으로 행동을 멈췄을 정국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그려졌지만 나는 멈추지 못했다.
‘넌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봐.’
미안해. 내가 못나서. 나는 이제 나를 상처주는 것, 남을 상처주는 것. 그것밖에 모르게 된 것 같았다. 이 말들이 모두 정국에게 상처가 될 거란 걸 알면서도, 이렇게 독하게 내뱉는 말들을 멈추지 못하는 내가 혐오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정국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너 아무 것도 아니라고. 어떻게 하든 아무 느낌도 없다고. 난 그냥 다 잊어버리고 싶을 뿐이야. 거기에 너를 이용하는 것뿐이니까 자꾸 나 헤집지 말고 그냥 가. 넌 나 아니라도 주위에 사람 많잖아. 감정놀음 하고 싶으면 나 말고 다른 사람 찾아봐. 나 같은 사람 괜히 뒤흔들어놓…’
- …른 사람한테 안기는 거, 알아요.
나를 상처 내듯 정국에게 신랄한 말들을 퍼붓고 있는데 조용한 정국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나는 뭐? 하고 되물었다.
- 형은 한 번도 내 이름 불러준 적 없어요. 항상 남준이란 사람이었지. 침대에서 때마다 눈 감는 거 그것 때문이죠. 눈앞에 있는 게 그 사람이 아니라 나라서.
내가 정국을 우습게 봤던 걸까. 어리다고 아무 것도 모를 거라 생각했던 걸까. 그렇다면 나는 큰 실수를 했다. 모든 걸 알고 있는 아이를 기만한 것에 가까웠다. 화를 내고 있지도, 감정에 휘둘리고 있지도 않은, 그래도 어떤 감정에 가깝냐고 묻는다면 그나마 따뜻하고 슬프다고 대답할 만한 목소리로 정국은 조근조근 말했다.
- 궁금하기도 했어요. 눈 감는 걸로 봐선 나랑 닮지는 않은 것 같은데, 나랑 공통점은 있는 것 같고…. 어떨 땐 그 사람을 한 번 봤으면 좋겠다 싶기도 했어요. 비슷하게라도 해주게요. 대신이라도 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 하고. 그런데 어차피 그럴 수가 없잖아요. 나랑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니까.
‘…….’
- 형이 눈뜰 때마다, 내 얼굴을 확인할 때마다 보이는 절망스러운 표정 때문에 사실 나 좀 힘들었는데. 그것까진 몰랐죠? 숨기느라 고생 좀 했는데, 내가 연기 좀 되나 봐요.
‘전정국.’
-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난 형한테 누구 대신이라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몰랐던 것도 아니고… 난 이젠 괜찮은 것 같아요. 내가 누군가의 대신이라도. 사람 이렇게 좋아해 본 게 처음이라 나도 어떤 게 나은 방법인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 대신해 줄 수 있는 게 나란 것만도 고마우니까요.
‘…….’
- 그리고 형 말대로 나 주위에 사람 되게 많은 거 알죠? 나 마성의 게이잖아요, 크하하. 형한테 막 원하거나 그러지 않을게요. 그냥 옆에 내가 있다는 것만 오늘 알아주면 돼요. 그러니까 많이 슬퍼하지 마요. 오늘처럼 있는 힘껏 자신을 상처 내려는 건 제일 하지 말고요.
마지막 정국의 목소리에 나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처음엔 따뜻함만을 원했던 마음이, 이제 형이 주는 따뜻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 마음대로 마음이 향하는 곳을 형에게서 정국에게로 옮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수백 번을 생각했다. 그때 언제 바 안으로 들어왔는지 테이블 맞은편에 앉는 정국이 시야로 들어왔다. 샤워하자마자 나를 찾아 나온 듯 머리는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 핸드폰을 든 채로 그는 웃으며 볼에 흐르는 내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냈다.
‘울지 마요. 왜 이렇게 서럽게 울어….’
핸드폰과 귀로 동시에 들어오는 정국의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불 같이 서러워졌다. 뭘 알고 그러는 것인지 모르고 그러는 것인지, 정국은 자꾸 마음을 날 것 그대로를 보이게 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옆으로 온 정국은 울음소리를 죽여가며 우느라 숨을 몰아쉬는 나를 바라보고는, 조심스럽게 내 어깨를 자신의 품으로 기대놓고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 커다란 손이, 그 체온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모르겠다. 순간적으로 정국에게 흔들렸다고 생각할 정도로.
내가 울음을 그쳐가자 정국은 손가락으로 내 고개를 들어 천천히 얼굴을 살펴보았다. 여기저기 빨개졌을 얼굴을 까만 눈동자에 가득히 담아내는 게 부끄러워 시선을 피하자 정국이 눈웃음을 보였다.
‘형 지금 몬생.’
‘안 못생겼어.’
‘아니에요, 못생겼어. 근데 귀엽게 못생겼어요.’
‘…하나도 안 좋아.’
‘귀여우니까 우리 다시 올라가서 하던 거 할래요?’
우리 아까 하다만 일 있잖아요, 하면서 정국이 싱긋싱긋 웃었고 나도 픽, 하고 웃음이 새버렸다. 정국이 장난스레 ‘웃는 건 허락의 뜻인가?’ 하며 밝게 웃는 게, 정말 보기 좋았다. 정국의 그 웃음이, 그 미소가 정말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