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뷔] 나비 2. (完)
※ 수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를 만나는 3년 동안, 내가 그를 만난다는 사실이 아마도 고향 집에까지 퍼진 모양이었다.
*
생각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다. 부모님과 지속적으로 연락해 왔고 편지와 물건 등을 전달하러 고향집과 나의 집을 왔다갔다하는 사람이 그를 눈치 채지 못했을 리도 없었다. 나는 근래에 그만큼 숨기지 않고 그를 만났다. 그와 있는 것이 당연했고 함께 있는 것에 익숙했다. 그에 대한 마음은 다른 색으로 변해갈 뿐 조금도 빛바래지 않았다. 그것이 나조차 신기할 만큼.
문제는 집에서 소식을 들은 아버님이 펄쩍 뛰셨다며, 결혼 자리를 알아봐 놓았다고 당장 집으로 올라오라 하시는 것이었다. 아침에 인편으로 온 편지엔 구구절절이 아버님의 분노의 크기와 행동과, 어머님의 절망과 슬픔, 눈물, 그리고 아버님께서 결국 홧병으로 자리에 누우셨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혼례를 치르지 않으면 어머님께서 나를 잡으러 서울로 내려오실 기세였다. 이미 혼례 날짜와 며느리감을 구해놓으신 두 분께 나의 상황은 전혀 상관이 없었다. 아버님의 편지엔 결혼을 하지 못할 거면 당신께서 죽기 전에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가라는 말이 적혀 있어 심장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내라니….
열흘 후로 날짜가 적혀 있는 편지를 읽고 난 후부터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나 때문에 자던 그가 깨어 ‘형님…. 아직 안 잤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도 ‘나 때문에 깼구나. 먼저 자.’ 라는 말밖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잠에 들지 않았다. 졸음에 겨운 눈을 하고도 그는 눈을 뜨려 노력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나는 그의 머리를 넘겨주며 ‘왜.’ 하고 물었다.
“무슨 고민 있어요?”
“…아니다, 아무것도.”
“…….”
“어서 자.”
“형님은 내가 밤에 잠도 못 자고 고민에 빠져 있어도 혼자 잠들 겁니까…?”
그의 말에 나는 푸스스 웃어버리고 말았다.
“난 잠자리가 예민하니 아마 못 자겠지.”
“나도 못 자겠습니다.”
“넌 원래 잘 자잖아. 다시 잘 수 있을 거다.”
“오늘은 형님 때문에 다 깼어요.”
말이 아주 거짓말은 아닌 듯, 마주보고 있는 그의 눈동자에 서린 잠이 꽤나 달아나 있었다. 낭패라고 생각했다. 내가 입을 다물자 그는 ‘내가 알면 안 되는 겁니까?’ 하고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 말에 나는 더 생각에 잠겼다. 그가 알면 안 되는 것은커녕 알아야 하는 것에 훨씬 가까웠으니까. 내 표정이 더 굳어지자 그는 자기 한쪽 팔로 머리를 베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내가 한숨과 함께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아침에 집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누가 어디 아프시답니까?”
“…혼처를 구해놓았다 하더라. 열흘 후에 식을 올릴 것이니 그 전날까지 도착하란 말이 쓰여 있었다.”
“…….”
이번엔 그가 말이 없어졌다. 갑작스런 말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형님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솔직히 말하면.”
“…….”
“나는 가기 싫다.”
낮아진 나의 목소리. 그리고 아무런 대답이 없는 그. 그의 침묵에 나는 조금 조급해졌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까,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시끄러운 속과는 달리 아무렇지 않은 척, 나는 그에게 물었다.
“너는, 내가 어찌했으면 좋겠니.”
“…….”
“……태형아.”
“…….”
그는 고집스레도 말이 없었다. 뭐라도 한 마디 해주면 좋으련만, 그는 정말 아무 말도 없었다. 모든 걸 놓친 듯한 허한 얼굴로 그저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미 나를 놓은 듯, 그는 붙잡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하….”
결국 나는 이부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에게서는 어딜 가냐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코트 한 벌만 입고 차갑게 눈이 얼어버린 길을 나섰다. 갈 곳은 없었다. 그저 정해진 곳 없이 헤맬 뿐이었다.
나비. 그래, 나비가 되어라 배웠다고 했던가. 어느 꽃에도 앉지 않는 나비가 되어라 했던가. 그래서 너는 이렇게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건가. 그렇다면 너는 상당히 성공했다. 나는 잡히지 않을 너를 쫓아 이산저산을 뛰어다니느라 지친 아이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 너는 다시 나의 손에서 날아가 버렸다.
술집에 들어가 담배를 안주삼아 소주 됫박을 마시고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다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던 중 얼음길에 넘어져 코트에 눈이 묻은 것을 툭툭 털어내다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 했다. 내 꼴이 한심하고 우스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네게 뭐였을까. 너는 내게 뭐였을까. 우린 서로에게 젊은 날의 한 장으로 남을 기억일 뿐이었던 걸까.
집으로 돌아오니 그 또한 나가고 없었다. 보기도 껄끄러웠는데 차라리 잘 되었다 싶어 코트를 벗어 방바닥에 내팽개쳐두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쉽게 잠이 오지는 않았다. 눈만 깜박이며 시간이 간다. 머릿속을 떠도는 온갖 잡생각들이 수면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직 한 시간이 채 안 지났을 무렵, 방문이 열리더니 그가 들어왔다. 나는 급하게 눈을 감고 숨소리를 내어 자는 척을 했다. 눈을 감아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방으로 들어와 자신의 코트를 걸고 방바닥에 있던 나의 코트도 옷걸이에 거는 듯했다. 그리고는 이불에 눕지 않고 책상에 앉았다. 불빛도 스미지 않은 어두컴컴한 방에서 한참을 앉아있던 그. 그런 그에게서 숨죽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흐으…. 흡, …하아…. 흐윽….”
그가 숨을 삼키는 소리와 떨리는 호흡, 그리고 소리를 죽이느라 목을 눌러 쉬어버린 울음소리까지. 나에게 등을 돌린 채 책상에 앉아 울기만 하는 그의 모습에, 가끔 가슴이 아픈 듯 제 가슴을 자그맣게 치는 것에, 나 또한 명치를 맞은 듯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왔다. 일어나서 그를 위로할까, 수도 없이 고민했다. 이미 자는 척 같은 건 뒷전이 되어버린 후였다. 그러나 나에게 들킬까 숨어서 우는 그는 이미 답을 내버린 것과 같았다.
우리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그가 숨어서 우는 것을 나는 모른 척하는 것. 그리고 내가 깨어있는 것을 그가 모른 척 하는 것. 단지 그것이었다.
*
우리는 그 후로 며칠 간 서로 말이 없었다. 그는 짐정리를 시작했다. 조용히 떠날 준비를 하는 그가 괘씸해 서로가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보란 듯 정리해 쓰레기통 속에 넣어버렸다. 그리고 쓰레기통은 어느 날 비워져 속이 휑하니 비어있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허무했다.
*
어느 새 함께 있을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내일 새벽이면 나는 그 방을 떠나야 했다. 그와 함께 있던, 그 수많은 추억이 스민 그 방을. 더 이상 그와 나의 집이 아닌 그 방을.
“형님, 내일 떠나는 날이죠?”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내가 퇴근하자 며칠 만에 말을 걸어왔다. 실제로 아무 일도 없지는 않다는 것은 휑뎅그렁한 방과 한쪽에 정리된 그의 짐이 보여주고 있었다. 떠나는 사람은 너일까, 나일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웃었다.
“그냥 떠나면 아쉬울 것 같아서 내가 송별회 준비했어요. 시간이 없어서 많이 못했는데….”
그가 씌워두었던 덮개를 치우자 좁은 밥상에 무언가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겉절이에, 전에, 잡채에, 불고기, 그리고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하얀 쌀밥. 하나 같이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이고, 내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들이 차려진 밥상에 나는 말을 잃었다. 도대체 넌, 넌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한숨과 함께 굳어진 나의 표정에 그가 눈치를 본다.
“마음에… 안 들어요? 혹시 밖에서 먹고 왔어요? 그냥 난, 내일 아침도 못 먹고 떠날 것 같아서 준ㅂ,”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가는 몸을 품에 꽉 껴안았다. 그를 더 이상 놓고 싶지가 않았다. 놀란 듯 안겨온 몸에, 익숙한 살냄새가 났다. 그 사라져 버릴 듯한 익숙함에 더 간절해진 나는 그의 귓가에 부서지듯 말했다.
“말해. 떠나지 말라고. 나더러 가지 말라고 해. 가지 말라고, 한 마디만 해주면 곁에 있을게.”
“…….”
“제발 김태형, 그렇게 말 좀 해….”
나는 이제 그에게 애원하는 지경에 가까웠다.
“그럼… 안 갈 거잖아요.”
“…….”
“형님 같은 사람 내가 붙들고 있어서, 못 가잖아요….”
품 안에서 잘게 떨기 시작한 그의 몸을 더 꽉 안았다. 흐윽, 하고 품으로 파고드는 몸이 안쓰러웠다. 결국 먼저 우는 것도 너인데. 네가 이렇게나 우는 이유는 너도 날 사랑하고 있음일진대, 너는 나를 붙잡지 못한다.
“…우리 만주로 가자.”
“…….”
“만주로 가서, 우리끼리 살자.”
네가 나를 붙잡지 못한다면, 내가 너를 붙잡겠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그를 앞에 두고, 나는 그의 머리를 붙들어 입을 맞췄다. 입술에 닿는 그의 젖은 입술 사이로 찾아들자 그는 숨 쉴 틈도 없이 혀끝으로 애달프게도 매달려왔다. 아직도 마르지 않는 그의 눈물이 입술 사이로 스며들어 그와 나를 적셨다.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상을 옆으로 치우고 내 코트를 바닥에 깔아 그를 위에 눕히고는 그의 셔츠를 젖혔다. 마른 어깨에 입을 맞추자 그는 부끄러운 듯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여린 목선에 혀를 굴리니 그에게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치듯 보인 그의 복잡해 보이는 표정에 다른 생각이 들지 못하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의 바지 버클을 풀고 안으로 손을 넣어 그의 것을 잡자 나의 차가운 손에 놀란 듯 그가 고개를 젖히며 하학, 하고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를 냈다. 미안함에 입을 맞추며 천천히 손 안의 것을 굴리자 문득 문득 그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낸다. 그는 관계를 할 때 목소리를 내는 편이 아니었다. 누구의 신음소리보다도 더 짜릿한 것은 내겐 그가 색색거리며 내뱉는 밭은 숨소리였다. 그가 나를 안고 가쁘게 내뱉는 그의 숨이 귓가에 닿으면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순간순간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풀린 눈으로 시선을 맞추며 혀를 굴려내는 그는 여간 야한 것이 아니었다.
미끄러워진 것에 속도를 올려 문지르자 그는 흐윽,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에 제 것을 쏟아냈다. 그가 가슴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숨을 고르는 사이 질퍽해진 손가락을 뒤로 옮겨 넣자 그는 온몸을 긴장시키며 약하게 신음을 흘렸다.
오래 풀어주지 못하고 급해진 내가 바지 버클을 풀려고 하자 그가 그것을 돕는다. 그리고는 바닥에 나를 앉히고 나의 중심부로 입술을 갖다 댔다. 그의 따뜻하고 질척한 입 안에 감긴 순간 나도 모르게 입에서 터진 헉, 소리와 함께 머리를 뒤로 젖히다 벽에 쿵, 하고 뒤통수를 박았다. 아야…, 하는 내 소리에 그가 웃는 게 느껴지는 게 기분이 이상했다. 얼마 간 혀를 굴리던 그가 입을 떼더니 이번엔 허벅지 위로 올라앉는다. 나는 그가 하는 양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었다.
“으흑….”
한 손으로 나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나의 위로 내려앉는 그는 조금 아픈 듯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그 찡그린 얼굴마저 내게는 너무 아름다워서 황홀할 지경이었다. 끝까지 모두 앉은 그는 잠시 후들대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나를 보며 언제나처럼 빙긋 웃었다. 그 순진한 웃음이 오히려 마치 요부 같아서 나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그는 조금 나아진 듯 제 속도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움직임이 조금 벅찬 듯 금방 숨이 거칠어졌다. 학학대며 차오르는 숨을 넘기기 바쁜 그의 허리를 붙잡고 그의 움직임에 맞춰 체중을 덜어주자 그가 땀에 젖은 머리를 넘기며 웃는다. 그에 머릿속의 무언가가 나가버린 내가 아예 그의 허리를 붙잡고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빨라진 속도에 맞춰 그가 흔들린다.
“하아, 하아…, 빨라요, 으으응… 천천히, 천, 흑… 천천히….”
그럴 수 있었으면 그래주고 싶을 정도로 그의 얼굴은 간절했지만, 이미 내 의지를 벗어난 일이었다. 본능에 맡긴 몸짓을 그도, 나도 멈출 수 있을 리 없었다.
“아…, 응, 으응, 우읏….”
“하아, 힘들면, 내 목 안아, 후….”
“하아, 하아, 학, 으응….”
그의 밭은 숨소리가 쉴 새 없이 귓가에서 터진다. 숨소리, 자신도 모르게 내는 낮은 신음소리, 품에서 흔들리는 몸과 나를 바라보는 시선. 어떤 것 하나 빠지지 않고 그의 모든 것, 모든 순간이 사랑스러워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죽을 듯 뇌까렸다. 그에게 닿든 닿지 못하든,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그런 말이 들렸던 순간이 있었던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통과 쾌락을 견디고 있었을 뿐. 정성을 다해 안겨오면서도 그는 아무런 말도, 대답조차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불안해 결국 묻고 말았다.
“같이, 가는 거지, 우리. 응?”
“으응, 하아, 하아….”
“태형아.”
“응, 네, 흐으, 네에….”
다행히도 대답을 해준 그 덕분에 나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힘들어 하는 그를 바닥에 눕혀 끝으로 몰아붙이자 그가 바들바들 떨기 시작해 나는 자세를 낮춰 그를 품에 안았다. 그의 몸을 품에 가득 안은 채 얼마 지나지 않아 나 또한 파정했다. 숨을 몰아쉬던 우리. 이게 우리의 마지막이 아닐 거라는 것이 내 최대의 안심이었다.
*
그와 나는 자리를 정리하고 나서야 다 식어버린 밥상머리에 앉을 수 있었다. 울렁이는 감정으로 도대체 이게 무슨 맛인가 싶은 식사가 입으로 들어가고 있었지만 간신히 그에게 고맙다는, 맛있다는 인사는 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절하듯 잠이 들어버린 우리는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
역까지 바래다 준 그는 나에게 도시락을 건넸다.
“열차가 열 시간을 간대요. 가면서 먹어요.”
“고마워. 잘 먹을게.”
나의 대답 후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이런 말을 했었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결혼 축하해요.”
“…그런 말 하지 마.”
“…미안해요.”
나는 그의 그 말에 상당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에게서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싫을 줄 나조차도 몰랐다. 나도 모르게 딱딱하게 나간 말에 그는 바로 사과했다. 그리고 우린 찾아온 잠시 간의 침묵을 버텼다.
“오늘 밤에 봐. 배 타는 곳에서 기다릴게.”
“그럴게요.”
“꼭 나와. 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네.”
열차가 도착 예정 시간보다 조금 늦게 왔고 나는 열차에 올랐다. 그리고 창문으로 가 플랫폼에 서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기차가 출발하려는지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무거운 철차 위. 우리는 멀어지는 열차와 플랫폼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어두운 얼굴이, 흔들다 느릿하게 떨어지는 그의 손이, 먼저 뒤돌아서 버리는 처진 어깨가, 어딘지 모르게 불안했다. 마치 끝을 말하고 있는 듯한 그의 얼굴. 내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나는 착각이길 바라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주역에 도착한 나는 마치 납치되듯 집으로 끌려갔다. 사람 되라고 서울에 보내놨더니 하는 짓이 기생, 그것도 남자 기생과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는 아버지의 불호령이 마당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집안 가재도구들로 몇 대 얻어맞고 나는 쪽방에 가둬져 도망가지 못하도록 사람들에게 감시를 당했다. 이마 한 쪽이 이상하게 쓰리다 싶어 손을 대보니 뜨끈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마 아까 내게 던져진 물건들 중 하나가 잘못 맞은 것일 거다. 가족들에게서 이런 대우를 받은 적이 없던 터라 손에 묻은 피를 보고 헛웃음마저 터졌다.
날이 밝자 감시하는 부모님들과 친척들 사이에서 나 자신조차 현실감이 없는 혼례를 올려버리고 말았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혼란과 죄책감에 신부 자리에 서 있는 아가씨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와 나의 혼례는 물 흐르듯 치러져 폐백까지 끝나 있었다.
식이 다 끝나고 복작대는 연회자리를 빠져나가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이 사람 저 사람이 주는 술을 마다하지 못하고 들이킨 것이 이유인지 핑그르르 도는 머리를 잡고 벽을 붙들고 서 있자 그제야 누군가가 먼저 방에 들어가서 쉬라며 나를 한가진 곳으로 밀어내 주었다. 이제야 간신히 틈이 생긴 것이다.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조심스레 방을 나섰다. 어질어질한 머리가 거슬렸지만 이때가 아니면 도망칠 시간이 없었다.
연회장이란 곳이 의외로 도망치기가 힘들었다. 오늘의 주인공이 나여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쓴웃음이 났다. ‘오늘의 주인공’이라니. 그리고 생각했다. ‘내일의 주인공’도 내가 아닐까. 물론 전혀 다른 의미로 말이다.
도망쳐 나온 길거리는 한산했고 나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아니, 무거웠다. 아니… 잘 모르겠다. 온갖 것들이 뒤숭숭한 기분이었다. 집안에서 크게 일을 쳐본 게 처음이라서 이런 건지, 불안하기만 한 그의 선택 때문인지. 발걸음이 가는 대로 쫓아가다 보니 역이었고 나는 약속장소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달렸고 몇 시간 후 나는 강에 부는 바람을 맞으며 그와 떠나기로 한 선착장에 섰다. 살을 에는 칼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선착장에 마련된 대기실로 들어와 시계를 보니 아직 그와 만나기로 한 시간은 조금 남아있었다.
실내로 들어왔는데도 손이 시려와 양 손에 들었던 짐을 놓고 별 생각 없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뭐가 손에 잡힌다. 슥 빼보니 잘 접힌 종이였다. 코트는 집으로 올라갈 때도 입었던 옷이지만 그때는 도시락이며 가방이며, 주머니에 손을 넣을 수가 없었다. 여기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넣어두었던 종이라기엔 지나치게 깨끗한 상태에 나는 종이를 폈다.
“…….”
그의 글씨체였다.
⌜언제쯤 이 편지를 보게 되실지 모르겠지만 얼굴을 보고는 말씀드리기가 힘들어 종이에 적습니다. 그 추운 곳에서 나를 오래 기다리시지 않고 편지를 찾으셨길 바랍니다.
나는 형님의 시가 너무 좋습니다. 나에게 보여준 그 모든 보석 같은 글들이 빛을 보길 바랍니다. 분명 형님은 크게 될 수 있겠죠. 그렇지만 내가 곁에 있어서는 형님이 날아갈 수가 없습니다. 남자랑 사랑하는 사람을 어느 문단계가 받아준다고 하겠어요. 그것도 기생인 나를. 형님을 미친놈이라고, 정신 나간 놈이라고 하며 손가락질이나 할 겁니다.
난 그런 거 못 보겠습니다. 나 같은 것 때문에 형님이 다치는 게 싫어요. 내가 형님을 날아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다는 죄책감, 나는 견딜 자신 같은 거 없습니다.
내가… 형님을 놓겠습니다. 나를 미워하셔도 좋고 원망하셔도 좋습니다. 돌아오셔도 나는 그 자리에 없어요. 나를 한 때의 추억으로 기억하시고 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젊은 날 곁에 그런 사람이 있었지, 하고 살아가시면 나는 그걸로 족합니다. 그리고 나도 그리 살겠습니다.
많이 아프지 않길 바랍니다.
1949. 12. 02.
태형 드림.⌟
툭, 하고 다 읽은 편지가 떨어졌다. 그를 기다리던 내 희망처럼.
밤이 지나도록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도 발걸음은 떠나지 못하고 나는 한참을 대기실에서 그를 기다렸다.
*
나는 그가 있는 서울로 내려가는 대신 평양길을 택했다. 그가 있는 서울은 모두 그와 같아서. 갈 수 없었다는 말이 맞겠다. 언젠가 흔한 사랑 이야기처럼 우리의 이야기도 세간을 떠돌길 바라며, 그렇게 흐려질 듯 사라지지 않길 바라며, 나는 기록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