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슙 : DADDY (完)

[국슙] DADDY 02.

몽블랑11 2016. 11. 25. 21:12

[국슙] DADDY 02.

w.몽블랑



*



전정국 15세, 민윤기 27세.



아이는 잘 자랐다. 또래들보다 빨리 크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픈 곳 없이, 씩씩하게도 자랐다. 그런 점에 있어 윤기는 정국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윤기는 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아버지의 의사에 맞추어 회사의 경영 수업에 들어갔다. 그로 인해 많이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 말하면 정국은 ‘대디 바빠서 그렇잖아요. 괜찮아요.’ 하고 말했다. 정국은 절대로 어리광을 부리지 않았다. 그건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래서 윤기는 그게 정국의 성격인 줄 알았다. 조용한 아이라고. 어른스러운 아이라고. 장하게도.



아이에게도 변성기가 찾아왔다. 목이 불편하다 하던 아이는 하루 이틀쯤 감기약을 사다 먹는 것 같은데도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어린 아이의 목소리에서 조금 쉰 듯하더니 몇 개월이 지나며 안정된 정국의 목소리는 윤기가 어디서 많이 듣던 것이었다. 정확히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아 윤기는 정국이 말을 할 때마다 그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리고,



“…지 않아요?”

“…….”

“대디?”

“…응, 어. 말해.”

“……?”



방금 말했어요. 오늘 덥지 않냐고요. 정국의 당황스러워 보이는 말과 어리둥절한 표정. 그러나 방금 정국의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와 판박이였던 건지 찾아낸 윤기는 더 당황스러운 얼굴로 정국을 쳐다보았다.



외모는 그를 닮지 않았던 정국이었는데, 목소리는 너무나도 그와 닮아 있었다.



그와 똑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며 그의 목소리로 말하는 정국이, 윤기는 조금 불안해졌다. 마른침을 목 뒤로 넘긴 윤기는 정국의 시선을 피하며 다시 물었다. 그러게, 오늘 덥네. 봄이 다 갔나봐. 그 불안은 정국에 대한 것이 아닌, 그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시선을 피하는 윤기에 정국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 별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 방으로 향했다.



*



오늘도 늦는다는 윤기의 메시지에 정국은 한숨을 쉬곤 교복을 갈아입고 집 한 구석에 서 있던 청소기를 꺼내왔다. 버튼을 누르자 순식간에 청소기의 소음이 온 집안에 가득 찬다. 그 익숙한 소음 속에서 정국은 이것저것 물건들을 들고 정리해 가며 집안을 치운다. 익숙한 제 일상 중 하나였다.



그런데 오늘은 언제나와 같은 윤기의 방에서 하나 달라진 것이 있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검은 가죽 커버의 수첩이었다. 그것을 힐끔 본 정국이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하던 대로 윤기의 방을 구석구석 청소하던 정국이 어느 순간 청소기를 내던지곤 윤기의 책상 앞에 섰다.



너무나 신경 쓰였다, 이 수첩이.



평소 메모를 즐기는 습관을 가진 윤기였기에 그저 공적으로 쓰는 기록일 수도 있다. 그런 거라면 제가 봐도 어차피 알아듣지 못할 것이니 열어봐도 상관없었다. 그래, 상관없잖아. 제멋대로 자기합리화를 끝낸 정국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수첩에 손을 뻗었다.



수첩을 두른 끈을 풀어내자 노트가 열렸다. 정국은 일부러 스치듯 안에 쓰인 글귀들을 빠르게 훑었다. ‘…와 저녁식사. 맛있었다. 정국이 데려…’ 그 안에서 제 이름을 발견한 정국은 저도 모르게 그의 노트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저녁식사. 맛있었다. 정국이 데려와도 좋을 듯.’



가끔씩 정국에게 외식하자며 불러낼 때 윤기는 저녁 식사가 끝난 후 바로 회사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서 정국은 음식에 대해 생각해 볼 틈이 없었다. 그저 자신을 집 앞에 내려다 준 윤기의 차가 다시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고 그날의 식사 기억은 참 허무하게도 사라졌었는데, 그간 데려갔던 곳들은 사실 윤기가 이렇게 미리미리 봐둔 곳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윤기가 데려갔던 곳은 음식이 모두 맛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조금 더 훑어본 윤기의 노트 속엔 언뜻 봐도 제 이름이 여럿 보였다. 식사 자리, 괜찮은 옷 브랜드, 심지어 구두 메이커와 모델명을 적어놓고 ‘정국이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요즘 중학생도 이런 거 신나?’ 하고 적어놓고 구두 모델명에 여러 번 동그라미를 그린 것도 있어 정국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윤기의 속마음을 보게 된 듯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모르게 붙박힌 듯 자리에 서서 윤기의 노트를 읽어나갔다. 대부분이 짤막한 윤기의 단상들로 채워져 있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내용들도 많았다. 일부러 알아보지 못하도록 쓰는 건가? …그럼 나 지금 대디 비밀 몰래 훔쳐보는 중인 건가? 정국은 괜히 들고 있던 수첩을 내렸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이내 다시 들어 읽기 시작했다. 뭐 어때. 대디만 모르면.



수첩 중간까지 쓰인 것들을 더러는 건성, 더러는 자세히 읽던 정국의 눈에 최근의 날짜와 함께 들어온 단어가 있었다. ‘목소리.’ ‘목소리가 똑같다.’ 최근의 날짜에 여러 번 반복되던 ‘목소리’의 의미를 정국은 어제 날짜의 단상에서 알 수 있었다.



‘정국이 목소리가 형과 똑같다. 정국이가 나를 부르는 게, 정국이가 내게 말하는 게, 형이 내게 말하는 것으로 들린다. 정국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영문을 모르는 정국이 표정에 죄책감이 든다. 정국이가 자랄수록 형과 닮은 곳이 늘고 있다.’



‘힘들다.’



윤기의 일기 중 정국 자신의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한 것 같은데, 그 내용은 외려 가장 알 수 없었다. 대디가 ‘형’이라고 부르는 자신과 닮은 사람은 누굴까. 자랄수록 닮아간다 했으니 자신의 아빠일까? 사실 지금까지도 정국은 윤기에게서 왜 정국을 데려와 키우고 있는 지 들은 바가 없었다.



어릴 적 딱 한 번, 너무나 궁금해진 정국이 윤기에게 왜 자신을 데려와줬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변한 윤기의 표정이 너무나 슬퍼서 정국은 두 번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리라 스스로 다짐했다. 그때 해줬던 윤기의 대답이 이해가 가지 않았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 더 물어볼 걸 그랬다. 대디는 왜 죄책감이 들까. 왜 대디는 힘들까.



수첩을 덮은 정국이 천장을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쉰다. 의미를 알 수 없던 윤기의 단상들 중, 마지막 단상은 왠지 정국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



불이 꺼진 집안을 들어서는 윤기가 열쇠 꾸러미를 현관에 걸었다. 이상했다. 퇴근치고는 늦은 10시 반이었지만, 이 시간에 정국이 자는 적은 없었는데 집안 불이 전부 꺼진 것이 희한했다. 정국이가 피곤했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윤기가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서는데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윤기야.”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어둠 속의 윤기의 실루엣이 움직임을 멈춘 채 굳었다.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순간적으로 사고를 멈춘 뇌 때문에 저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형.’ 하고 반가운 이를 부를 뻔 했다. 마른침을 삼켜 가까스로 그 소리를 눌러 삼킨 윤기는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굴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생각했다. 손끝까지 느껴질 정도로 빨라진 심장박동에 사고가 힘들었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생각해내고 나서야 간신히 이 목소리가 정국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거칠어진 발걸음으로 빠르게 걸어가 거실등을 켜자 거실 구석에 무릎을 안고 앉아있는 정국이 눈에 띄었다. 정국은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떴다가 윤기를 발견하곤 그의 눈치를 살폈다.



“너 뭐야.”



생각보다 너무나 차가운 말투라서 정국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장난이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 뭐냐고.”



윤기는 완벽한 타인처럼 말했다. 정국에겐 그렇게 들렸다.



“왜…. 왜 그런 거야.”



무언가를 항의하려던 윤기는 힘겹게 말을 삼키고 다시 물었다. 그러나 너무나 넓은 범위의 질문이라서, 정국은 대답하지 못했다. 윤기는 서 있었고, 정국은 앉아서 그런 윤기를 올려다봤다. 정국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윤기의 머릿속에 문득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방을 들어갔다 나온 윤기의 눈엔 확신이 차 있었다.



“책상 위의 내 노트 읽었어?”



윤기의 말에 겁에 질린 눈동자가 윤기를 응시한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랬는데? 하는 윤기의 질문에 정국은 이젠 울 것 같은 얼굴로 숫제 눈만 깜빡였다. 윤기에게는 이 조그마한 머리통에 든 생각이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일기를 읽고, 정국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어째서.



“잘못했어요.”

“…….”

“잘못했어요, 대디….”



정국은 어린 아이처럼 사과를 연이어 뱉더니 이내 눈에서 눈물을 쏟았다. 눈물을 그치려 투박하게 소매로 눈가를 훔쳐냈지만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정국의 눈물에도, 그 애처로움에도 윤기는 마치 자신도 어린 아이처럼 ‘뭘 잘못했는데?’ 하고 되묻고 싶었다. 네가 뭘 잘못한 줄은 알아? 하고, 상처주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도 안다. 정국에겐 잘못이 없었다. 애초에 그곳에 노트를 둔 제 자신이 잘못이었다. 정국은 제 이름이 나오는 부분이니 관심 있게 읽었을 거다. 그리고 저와 목소리가 닮은 이가 누구인지 궁금했을 거다. 그리고 한 번쯤 이런 식으로 떠보고 싶었던 것뿐일 거다.



“…하아….”



속 시원히 울지도 못하고 숨을 몰아쉬며 울음을 참는 정국의 소리 사이로 윤기의 한숨 소리가 섞인다. 몸에 힘을 풀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윤기가 등을 깊숙이 기대곤 팔목으로 눈을 가렸다. 울고 싶은 건 나인데, 왜 네가 우니. 다시 한 번 숨을 고르듯 한숨을 내뱉은 윤기가 눈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입술을 뗀다.



“아빠야.”

“…….”

“네 아빠 목소리랑 닮았어.”

“…대디?”

“나 말고, 네 친아빠.”

“…….”

“그게 궁금했던 거지?”



윤기의 물음에 정국이 다시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기는 무릎을 안고 있는 정국을 곁으로 불렀다. 이리 와. 하니 정국이 천천히 일어나 제 곁으로 왔다. 그는 소파에 앉지 못하고 바닥에 앉았다. 윤기는 그런 정국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정말 똑같아. 형…, 그러니까 네 아빠랑 네 목소리. 그래서 요즘 더 형 생각이 났어. 네가 말할 때마다, 내게 말을 걸 때마다.”

“…….”

“그렇다고 그게 네게 화를 낼 건 아니었는데.”



미안해, 정국아. 윤기의 말에 정국은 설움이 몰려오는지 흐흐흡, 하고 숨을 흩뜨리더니 이내 고개를 숙인 채 흐읍, 하고 울기 시작했다. 소년은 어릴 때부터 소리 없이 울 줄 알았다. 그러나 눈물은 허벅지로 뚝뚝 떨어져 면바지 위로 여러 개의 원을 그렸다.



윤기는 정국이 앉아있는 바닥으로 내려와 정국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정국의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하고 소년의 등을 토닥였다. 정국은 윤기의 품 안에서도 소리를 죽인 채 울었다. 숨을 죽이고 울다 숨이 가빠오면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다. 그게 안쓰러워 윤기는 정국을 더 꽉 안았다.



정국의 눈물은 전적으로 제 잘못이었다. 제 착각으로 소년에게 상처 주고 울게 했다. 어떤 상처를 가진 아이인지, 아이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잘 알면서도, 타인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그게 가장 상처받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제 상처를 들킬까 정국을 상처주려 했다. 너무나도 비겁한 짓이었다.



‘윤기야.’ 하고 자신을 부르는 그리웠던 그 목소리보다 더 놀랐던 건, 아직도 자신이 ‘그’를 잊지 못했음이었다. 그와 닮은 목소리 한 번에 발걸음이 멈춰서 움직일 수 없던 제 자신이었다. 그걸 부정하고 싶어서 정국에게 탓을 해버리는 못난 자신이었다. 이렇게나 생생한 ‘그’를 아직도 마음에 간직하고 있음이, 윤기를 놀라게 했고 슬프게 했다.



놀라서 그랬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정국을 울린 정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아픈 밤이 지나가고, 정국은 두 번 다시 윤기의 앞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윤기는 두 번 다시 제 노트를 정국이 읽을 수 있는 곳에 두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