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슙 : DADDY (完)

[국슙] DADDY 05.

몽블랑11 2016. 11. 25. 21:14

[국슙] DADDY 05.

w.몽블랑



*



「몸 괜찮아?」

「머리 안 아프냐」

「난 미치겠어」

「(이모티콘)」



아침부터 석진에게서 온 메시지를 밀린 일로 점심시간이 지나고서야 확인한 윤기가 입가에 미소를 띤다. 석진이 첨부한 이모티콘이 귀여움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이모티콘의 결제 방법조차 모르는 윤기는 막연히 석진이 이런 것들을 어디서 받았나보다 생각했다.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이모티콘을 보며 석진에게 잘 어울린다고도 생각했다.



「나도 아침에 아팠어」

「두통약 사 먹었어」



아침에 숙취가 덜 깼을 그 시점을 생각하니 오늘 아침 일이 떠오르며 또 정국이 떠올랐다. 한숨부터 나오는 일에 윤기는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요 근래 석진과 너무 술을 마셨나. 집에 늦게 들어가는 일이 잦았나. 그러고 보니 좀 그런 것도 같았다. 그래서 정국이 많이 서운했나. 그런데 이렇게 마신 적이 꽤 여러 번인데 도대체 왜 어제…? 영문을 알 수 없는 윤기가 눈을 깜빡이다 이내 생각을 접었다.



어쨌든 당분간은 석진과의 술자리를 좀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정국이 원하지 않는다면, 많이 서운한 거라면, 당분간은. 석진만큼 편하게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없긴 하지만… 윤기는 노력은 해보기로 했다.



*



지민이 오랜만에 학교에 왔다. 오랜만이라고 해봐야 이틀 빠지고 사흘째 되던 날 얼굴을 보인 것이지만, 정국에겐 무언가 반가울 정도였다. 며칠 전보다 살이 내린 것 같은 얼굴이, 밝지 않은 표정이 꽤나 호되게 앓았던 것 같다. 태형이 지민의 감기가 심하게 지나갈 거라고 얘기해주긴 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핼쑥해진 것을 보니 마음이 쓰였다.



“몸 좀 괜찮아?”

“으응. 이젠 뭐.”



그런데 방긋이 웃는 지민의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안 보인다. 김태형. 정국과 지민만 붙어 있으면 말도 나누기 전부터 사이에 끼어 ‘나도 껴줘!’ 하며 서는 태형이기에, 이쯤이면 와서 이야기에 끼어들어야 하는데 그가 없었다. 교실에 없나? 정국이 고개를 돌려 휘휘 둘러보자 태형은 제자리에 있었다. 말 그대로 제 자리에. 아무렇지 않게 야, 김태형, 하고 부르려는데 지민이 정국의 팔을 붙든다.



“부르지 마.”



정국이 지민의 눈을 바라보자 지민이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저었다. 부르지 마, 태형이. 고개를 숙인 채 다시 한 번 작게 말하는 지민의 말에 정국이 왜? 하고 물었다. 지민의 내리깐 속눈썹 밑의 까만 눈동자가 제 갈 길을 잃고 헤맸다. 통통한 지민의 입술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댔다.



“김태형이랑 싸웠어?”



그 말에 놀랍게도 지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약간의 망설임을 두고. 그러고 보니 오늘 태형이 저 자리에서 움직인 적이 없었다. 평소라면 교실 구석구석을 누비는 사람이, 화장실을 다녀올 때 빼고는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새삼스레 다가온 놀라운 사실에 정국이 눈을 크게 뜬다.



“왜 싸웠는데?”

“…사실 싸운 건 아니고 내가, 내가 태형이한테 잘모태써.”



박지민이 김태형한테 잘못을 했다고? 정국은 그것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지민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고 다니는 걸 별로 못 봤다. 정국이 아는 지민은 그럴 성격이 못됐다. 심지어 태형에게? 상대가 태형이 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긴 한다. 태형은 지민이 무슨 잘못을 하든 절대 화를 내지 않는다는 부분에서 말이다.



그런데 지민이 잘못을 해서 태형이 화를 내고 있다니. 이 말을 정국이 곧이곧대로 믿기는 좀 어려웠다.



“무슨 잘못을 했는데. 아니 것보다, 많이 잘못했어? 김태형한테 사과해. 너라면 받아줄걸?”

“사과 못 해.”

“왜?”

“사과하지 말래써.”

“누가.”

“태형이가.”



이게 뭔 얘기야. 수수께끼 같은 지민의 말에 정국의 표정이 이상하게 찌그러졌다. 그런데 지민의 표정이 이상하다. 금세 얼굴을 확 꾸기더니 이내 고개를 숙인 지민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박지민, 너 울어?!”



당황한 정국의 말에 지민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안 우러, 안 울, ……. 정국은 태형을 돌아봤고 온몸에 힘을 넣고 앉아있던 태형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태형이 나가고 얼마 안 되어 수업 종이 울렸고, 태형은 그 시간 이후 무단결석으로 처리되었다.



그리고 방과 후, 제 배를 잡고 식은땀을 흘리며 열을 내는 지민을 정국이 집으로 데려다 주어야 했다. 태형이 자리에 없어서, 먼저 알지 못해서, 정국은 그때까지 지민이 아픈 것도 몰랐다. 지민을 업고 그의 집까지 걸으며, 정국은 지민과 태형의 사이가 무언가 크게 어긋났음을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



분명 며칠 전 말도 했는데, 도대체 어디서 뭐가 잘못된 걸까.



정국은 삐딱하게 서서 또 다시 석진의 품에 기대어 집에 도착한 윤기를 쳐다보았다. 술냄새가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정국에게까지 훅 끼쳐올 정도였다. 인사불성이 된 윤기는 의식이 없었고, 대신 정국의 삐딱한 시선은 모두 석진이 받았다.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은 석진이 ‘윤기 좀 받아줄래?’ 하고 어색하게 말했다. 석진의 표정은 만화였다면 보노보노땀이라도 하늘로 솟을 것 같았다.



윤기가 며칠 전 메시지로 말했었다. 정국이 자신이 술 마시는 걸 싫어하는 것 같으니 당분간 좀 자제해야겠다고. 윤기가 하는 말들에서 정국에게 마음을 쓰는 게 느껴져 석진 또한 알겠다 했다. 아마 윤기는 석진과 둘이서 하는 술자리였다면 분명 멀쩡한 정신으로 집에 갔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팀 내의 회식이었고 팀장이 떠난 윤기네 팀의 과장은 2차 술자리를 가졌다. 그 밑의 직급들은 자연히 쫓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도를 넘은 주량에 윤기가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붙들고 연락한 게 석진이었다. 정말 안 되겠다 싶어 술자리 도중에 도망쳤으나 잡히는 택시도 없고 오늘따라 차도 놓고 갔던 윤기가 연락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석진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윤기는 빌딩 벽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고 잠이 들어 있었다. 석진이 도착하기 전 무슨 일이라도 당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집으로 데려온 게 석진인 만큼 정국은 또 다시 윤기와 석진이 술자리를 가졌다 오해할 것이었고, 석진은 그런 오해를 피하고 싶었다.



“정국아, 오늘은 아저씨랑 대디랑,”

“…말씀 안 하셔도 돼요.”



석진에게서 윤기를 넘겨받아 그의 허리를 단단히 붙들어 안은 정국이 말했다.



“아저씨랑 대디한테 화내는 게 버릇없는 일이라는 거, 저도 알아요. 그건 어른들 일이니까, 아저씨랑 대디가 하고 싶은 대로 하시는 게 맞잖아요.”

“어… 정국아?”

“지난 번 이후로 많이 생각해 봤어요. 대디가 저 키우느라 그동안 친구 만난 적이 없었어요. 일만 했어요. 대디도 많이 외로웠을 거예요. 아저씨가 대디랑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말의 속도가 빠르진 않았지만 석진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제 말만 한껏 쏟아놓은 정국이 석진이 어버버하고 있는 틈을 타,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하고 현관문을 닫았다. 문을 닫고도 현관에서 바로 발을 떼지 못한 정국은 제 가슴께에 잠이 든 숨을 뱉어놓는 윤기를 안아들고 그의 방으로 향했다.



언제나와 같이 침대에 그를 눕히고 윤기의 옷가지를 정돈해 준 정국이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올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옅은 불빛에 비친 윤기의 하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국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술을 열었다.



“사실은 대디가 나만 봐줬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그건 이기적인 거니까, 내가 그만할게요.”

“…….”

“그게 맞는 거죠.”

“…….”

“그런데 나 욕심내고 싶어요, 대디.”



정국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윤기의 입술에 천천히 제 입술을 맞대었다. 상상했던 보드라움이 닿아와 정국은 눈을 감고 잠시 숨을 멈췄다.



몇 초가 흘렀는지 모른다. 그 몇 초가 정국에게 얼마만큼의 시간 같았는지도 모른다. 제 담력이 허락하는 시간만큼 입술을 갖다댔던 정국이 다시 조심스레 입술을 뗀다. 정국의 감은 눈이 파르르 떨렸다.



정국은 가팔라진 숨을 고르며 천천히 눈을 떴고, 꽤 서두르는 걸음으로 윤기의 방에서 나와 방문을 닫고 문고리를 잡은 채 방문에 기대어 섰다. 하아. 한숨을 내쉰 정국의 입에서 다시 단말마의 한숨 같은 말이 뱉어졌다.



“…망했다.”



그에게 닿으면 조금은 해소될 줄 알았던 갈증이,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제 속도를 모르고 미친 듯 질주하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정국의 표정은 이미 울상이었다.



*



태형은 지민의 집 앞에 서 있었다. 벌써 며칠 째 학교에 나오지 않는 것이 걱정되어 참다 참다 뛰쳐나온 발걸음이 이곳에서 멈췄다. 정국에게 들은 바로는, 지민이 그날 걷지도 못해서 자신이 집까지 업어서 데려다 줬다고 했다. 그리고는 자신은 무슨 일인지 몰라도, 태형더러 지민과 잘 해결해 보라고 했다.



‘네가 화를 내니까 애가 아무것도 못 하잖아. 집에 가는 내내 내 등에서 울었어. 태태가 나 안 보겠지? 나한테 뭐 이런 거 물어보더라. 그래서 왜 널 안 봐, 이랬는데 내가 미우니까, 그러잖아. 뭔 소린지 알 수가 있어야지.’

‘…….’

‘좀 가봐. 내가 아무것도 몰라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박지민이랑 얘기 좀 해봐. 네가 잘 알잖아.’



정국의 말에 태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 태형을 두고 정국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겠다는 듯 나 간다, 하고는 제 집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멍청하게 멈춰선 태형은 정국이 전해준 지민의 말들만 머릿속에서 뱅뱅 맴돌 뿐이었다.



‘태태가 나 안 보겠지?’

‘내가 미우니까.’



그렇게 홀린 듯 지민의 집 앞까진 왔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 아픈 건 아닌지. 불러낸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정하지 못했다. 그저 몸이 시키는 대로 왔을 뿐이다. 제가 벌인 일들의 후폭풍이 제가 견디기엔 너무나 거셌다.



얼마 전 감기기운이 남은 지민이 심심하다고 칭얼대기에 태형은 지민의 집으로 향했다. 지민의 방에서 그와 놀던 태형은 맹맹한 지민의 목소리를 듣다 충동적으로 키스했다. 정말 충동적이었다. 앞뒤 생각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눈앞에서 짹짹대듯 말하는 지민을 계속해서 귀엽다고 생각하다가 그만, 저도 모르게 벌어진 일이었다.



입을 맞추는 도중 정신이 들어 화들짝 놀라 제가 먼저 몸을 떼자 지민이 덩달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뭐야?’

‘…….’

‘태형아…?’



태형의 눈을 바라보는 지민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상황을 잘 얼버무릴 만한 변명도 생각나지 않았다. 태형에게 허락된 답은 하나뿐이었다.



‘좋아해.’



태형의 말에 지민은 충격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 태형의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지민은 한 번도 태형을 그런 상대로 생각해본 적도 없는 모양이었다. 태형은 제 마음이 이렇게까지 커지는 동안 지민은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태, 태태, 나는… 미안, 나….’

‘사과하지 마.’

‘…태태….’

‘나 사과 받을 말 한 적 없어. 난 그냥, 네가 좋다는 거야. 나한테… 사과하지 마.’



거절하는 것 같아 겁나니까. 차마 그 뒷말은 하지 못했다. 그대로 지민의 방을 뛰쳐나와 저희 집으로 향했다. 그 자리에서 정강이를 까이지 않았으니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생각보다는 지민이 보여줬던 그 표정만이 남아 태형의 마음속에 생채기를 냈다.



그래서 미웠는데. 어째서 조금도 몰랐냐고, 원망스러웠는데.



다음 날 학교에서 일부러 지민 쪽은 쳐다보지도 않던 태형의 귀로 정국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박지민, 너 울어?’



그 전부터 지민이 정국에게 웅얼거리는 말이 전부 저와 관련된 이야기일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돌아보지만 않았다 뿐이지 온갖 신경은 모두 지민을 향해 있었는데, 그 정도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지민이 울고 있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지민에게로 갈 뻔 했다.



그러나 가서 무슨 말을 할까, 하는 생각이 벌떡 일어난 태형의 몸을 그 자리에 멈춰 세웠다. 저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에게 뭐라고 말을 해줄까. 원래 저렇게 마음 약한 줄 알면서, 말을 뱉어 버린 건 제 자신이었다.



결국 태형은 도망쳤다. 교실 밖으로 나간 태형은 그날 밖만 하루 종일 헤매다 집으로 갔다. 밤 늦게서야 들어온 태형에게 부모님은 어딜 갔다 온 거냐고 물었지만 태형은 ‘운동.’ 하고 말았다.



그 후로 잠도 잘 못 자고 밥도 잘 못 먹었다. 지민이 학교에 나오지 않으니 더욱 더 그랬다. 그런 태형을 유심히 보던 정국이 태형의 등을 떠밀었고, 못 이기는 척 태형은 지민의 집까지 오고 말았다.



지민의 집 앞에서 얼마쯤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해가 다 지고 가로등 불빛이 밝아올 즈음, 태형은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익숙한 차에 굳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는 지민과 그의 어머니에 시선을 고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