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슙] DADDY 24.
[국슙] DADDY 24.
w.몽블랑
*
이런 상황을 자신은 바라왔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반이었다. 태형은 지민에게 제 옆의 누군가를 보란 듯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 그렇지만 한편으로 지민을 만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는. 새로운 연인과 길을 걷다 이전 연인을 만나는 건 사실 생각해본 적도 없는 선택지였다.
길의 저 만치에서 골목을 돌아 나오는 지민을 봤을 때, 한눈에 그를 알아본 자신이 멈칫거리는 게 꼴사나웠다. 태형은 자신의 옆 사람의 손을 더 꽉 잡았고, 그에 제 옆에 선 사람은 응? 하는 말과 함께 자신을 쳐다보았다. 태형은 굳은 얼굴로 앞만 보고 걸었다. 정확히는 지민만 보고 걸었다.
자신보다 더 늦게 자신을 알아본 지민은 시선을 잠깐 들더니 태형과 시선을 마주하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세운 코트 깃에 더 얼굴을 파묻었다.
건널목도 없는 외길이었다. 누구도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지민에게 태형이, 그리고 태형에게 지민이 더 가까워졌다.
지민이 제 옆을 스쳐가던 그때 태형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태형은 순간적으로 코트 깃을 잡고 있는 지민의 손목을 낚아챘다. 놀란 지민의 눈동자가 태형을 향하고, 태형은 지민의 까맣고 맑은 눈과 마주했다. 태형은 이미 제 옆에 있던 사람의 손을 놓아버렸고, 그는 조금 몸을 틀어 감정을 숨긴 눈으로 태형과 지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형이 지민의 코트 깃을 얼굴에서 내렸다.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너 이거 뭐야.”
윗볼에 푸릇한 멍자국과 눈가의 찢어진 상처였다. 부은 입술엔 딱지가 얹혀 있었다. 지민은 태형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완력을 썼다. 그러나 태형의 손에 꽉 붙들린 손목은 제 생각처럼 쉽게 빠지지 않았다. 지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짭쪼름한 피 맛이 났다.
“어제 시비가 붙어서 그래. 이거 놔.”
“시비? 너 어디 가서 시비 붙는 성격도 아니잖아.”
“술 좀 마셨어.”
“너 술 별로 안 좋아하잖아.”
“어젠 마셨어.”
“웃기지 마. 이거 그 새끼가 그런,”
“제발 나에 대해 다 안다는 듯이 말하지 좀 마!”
버럭 소리를 지른 지민의 눈에 눈물이 피어올랐다. 태형은 그 얼굴에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뺐다. 그 사이 지민은 빠르게 뒤돌아 사라져 버렸다. 태형은 멍하니 지민이 사라진 곳을 응시했다. 지민의 상처 받은 눈이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머릿속엔 놓쳐 버렸다, 는 생각뿐이었다.
“…김태형.”
“…어어.”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태형이 정신이 들 듯 깨어나 대답했다. 그렇지. 옆에 형이 있었지. 난 도대체 뭘…. 태형의 어수선한 혼잣말에 그가 됐다는 듯 태형의 어깨를 툭툭 쳤다.
“쟤가 박지민이구나.”
“…….”
“귀엽게 생겼네.”
“…형, 내가 미안,”
“네가 못 잊을 만하다.”
그의 마지막 말에 태형은 할 말이 없었다. 하아. 낮은 한숨과 함께 태형이 마른세수를 했다.
“난 괜찮아. 다 알고 시작했잖아.”
그의 말에 태형은 고개를 숙였다. 입을 꾹 다문 태형의 얼굴엔 씁쓸한 표정이 감돌았다. 그는 그런 태형의 어깨를 감싸 안고 걷던 방향으로 돌렸다. ‘가서 맛있는 거 먹자. 그럼 다 괜찮아 질 거야.’ 그의 말에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엷게 웃었다. 그리고 태형을 토닥이며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
정국은 며칠을 관찰하던 끝에 자신에게 사람이 붙어 있음을 확인했다. 누가 사람을 붙였는지야 뻔했다. 세상에 연 다 끊어진 고아를 누가 사람까지 붙여 감시하겠는가. 윤기의 아버지가 윤기에 대한 걱정이 대단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정국은 저나 윤기에게 사람이 붙지 않은 새벽의 깊은 밤을 틈타 윤기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여전히 집의 번호를 바꾸지 않고 있는 윤기가 원망스러웠지만, 만약 번호마저 바꿔버린다면 자신의 길 잃은 분노는 어떻게 표출될지 정국 자신조차 몰랐다.
조용히 윤기가 자고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침대에 앉아 자고 있는 윤기의 입술 속을 손가락으로 파고들면 윤기가 잠에 취한 눈을 떴다. 벌려놓은 입술에 정국이 물을 머금고 키스하면, 입안을 촉촉하게 적시고 난 물이 다 삼켜지지 못하고 윤기의 입가로 흘러내렸다. 윤기가 숨이 모자라 할딱거렸지만 정국은 그대로 계속해서 입을 맞췄다. 자신은 여전히 윤기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목이 마른 어린아이 같이.
정국이 떨어지자 윤기가 콜록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모자란 숨을 들이키는 윤기의 숨소리가 가냘팠다. 정국은 윤기의 입가에 흐른 물을 제 손가락으로 문질러 닦았다. 그 손길을 윤기는 거부하지 않았다.
“이게 정상은 아니잖아요, 그쵸.”
“…….”
“내가 미쳤거나 대디가 미쳤거나 둘 중 하난데 말이에요.”
“…….”
“내 생각엔 내가 미친 것 같아요. 내가 정상이 아닌 것 같아요. 세상에 누가 자기 부모를 이런 식으로 좋아해.”
정국의 목소리가 쓸쓸했다. 윤기는 정국과 눈을 맞춘 채 그를 응시했다. 그런 윤기의 눈에 비치는 자기 자신이 초라했다. 정국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도 다른 사람 만나볼 거예요.”
“…….”
“…대디 잊어볼 거라고요.”
“…부탁해.”
윤기의 말에 정국이 원망스러운 얼굴을 했다. 당차게도 다른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해놓고, 금세 또 울 것 같은 어린 얼굴을 했다. 윤기는 그게 안쓰러워 정국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런 윤기의 손에 제 볼을 문대며 정국은 슬픈 눈으로 물었다.
“왜 대디는, 나를 한 번도 잡아주지 않아요?”
“…….”
“난 지푸라기라도 필요한데.”
정국은 윤기의 한쪽 손을 잡으며 그를 품안에 넣고 다시 입을 맞췄다. 윤기는 정국의 키스에 맞춰 입술을 벌리고 그가 옷을 쉽게 벗길 수 있도록 허리를 들었다. 피로에 거칠어진 입술을 정국이 혀로 핥아내는 게 느껴져 윤기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이런 나라도, 네 쉴 곳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하으….”
정국은 신음을 내뱉는 윤기의 등과 허리에 꼼꼼히 키스했다. 품안에서 움찔거리며 혀에 닿는 살결이 달콤했다. 언젠가는 끝나야 한다는 기약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 간절함은.
나를 구해줘요. 내 구원자가 되어줘요, 대디. 안 그러면 나는… 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맞추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들에게 주어진 밤은 그리 길지 않았다.
*
윤기는 오랜만에 석진을 만났다. 펍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윤기에게 손을 번쩍 들었던 석진은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눈을 크게 떴다.
“새신랑 얼굴이 왜 그래?”
핼쑥해진 윤기의 얼굴에 석진이 꽤 큰소리를 냈다. 너 설마 다이어트 해? 라는 석진의 말에 윤기가 피식 웃고 말았다.
“무슨 다이어트야.”
“뭐 힘든 일 있어? 얼굴이 왜 이렇게 안됐냐.”
“글쎄. 메리지 블루인가.”
메리지 블루, 참 나. 호강에 겨운 소리 한다. 석진이 툴툴대자 윤기가 다시 웃었다. 그 웃음이 영 석연치 않아서 석진은 조금 의아해졌다. 윤기의 얼굴에 떠오른 건 결혼을 앞둔 신랑의 행복한 미소가 아니었다. 석진이 가만히 윤기를 응시하고 윤기는 제 품안에서 준비해둔 청첩장을 꺼내 석진에게로 밀었다.
“이거, 우리 청첩장.”
석진이 하얀색과 약간의 은색으로 디자인된 수수하면서도 화려한 청첩장을 열었다. 오, 안사람 안목 좋은데. 청첩장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는지 석진이 칭찬을 건넸고 윤기는 그냥 요새 많이 하는 걸로 했어,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너 왜 안사람 소개는 안 시켜주냐. 가만히 생각하니까 서운하네? 원래 이런 자리에 다들 데리고 나오지 않나?”
석진의 말에 윤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미안하다. 내가 소개시켜줄 친구랄 사람도 너밖에 없는데, 그 사람 오늘 바빠서 못 나왔어. 내가 지금이라도 나올 수 있는지….”
말하며 핸드폰을 드는 윤기에 석진이 손사래를 쳤다.
“어어, 아냐아냐. 그냥 해본 말이야. 안 봐도 상관없어. 어차피 결혼식날 볼 텐데, 뭐.”
“서운하게 할까봐 그러지.”
“됐어, 우리 사이에.”
사진이나 보여줘, 하는 석진의 말에 윤기가 핸드폰을 들고 사진을 찾기 시작했다. 금방 사진첩을 열어 보여줄 줄 알았더니 시간이 꽤 걸린다. 조금 뒤에야 보여준 사진은 어플에 띄워진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그녀는 언뜻 봐도 상당한 미인이었다.
“어, 예쁘다. 와…. 진짜 예쁘다. 착하게 생겼네.”
“응, 착하더라.”
“그래, 사람 착하면 됐지 뭘.”
“나한텐 과분하지.”
윤기의 말에 석진이 청첩장을 든 채 뒤로 몸을 재꼈다. 그리고 윤기를 응시한 채 두 눈을 깜빡였다.
“너 역시 이상해.”
“뭐가.”
“원래 이렇게 우울함이 땅을 파고 들어갔냐? 아니잖아.”
“메리지 블루라니까.”
“이건 정도가 심하잖아.”
“…아냐, 아무것도.”
석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냥 지금 말해라. 나 화날라 그런다.”
“…….”
“너 진짜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
“민윤기.”
“…….”
“너 이러면 나 결혼식 안 간다?”
석진의 말에 윤기가 참았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버석하게 마른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누구에게라도 쏟아내면 좀 나을까. 석진은 정국을 아는 얼마 되지 않는 제 주위 사람이었다. 석진의 눈을 바라보던 윤기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힘들다, 나.”
*
주문한 술이 사라질수록 얘기는 길어졌다. 석진은 윤기와 정국이 사귀는 것까지는 언뜻 눈치를 채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윤기의 아버지와 정국의 이모가 나타나면서 두 사람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과 윤기와 아버지와의 계약을 듣고 난 후 석진은 넋이 나간 듯 멍해졌다.
“…….”
“…….”
“넌, 그래서… 이 상황에 결혼을 하려고 한다고…?”
“응.”
“…그게 네가 하고 싶은 거야?”
“…….”
하고 싶은 것? 윤기는 생각했다.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한 순간은 별로 없었다. 해야 하는 것을 선택하는 인간형에 가까웠다, 자신은. 그런 자신에게 자유를 줬던 건 지금까지의 삶에 있어 정국 하나뿐이었다. 정국을 키우는 것이 윤기에겐 자유였고, 그를 사랑하는 것 또한 윤기의 자유였다.
“어떻게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해.”
“어떻게 해야 하는 것만 해, 넌.”
“그게 맞는 거잖아.”
“너 정국이 생각은 해봤어?”
“…….”
“정국이 생각해도 그게 맞는 거야?”
윤기의 얼굴이 겁을 먹었다. 해야 하는 것을 해내는 건 힘든 게 아니었다. 그러나 해야 하는 것을 하려면 반드시 정국을 버려야 했다. 윤기의 결심에 정국은 없었다. 정국은 그에게 하고 싶은 것이었기에, 주어지지 않은 선택지나 다름없었다.
“정국이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어.”
“어떻게 정국이 생각을 안 해. 걔가 너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뭐라고 생각해도 괜찮아. 이게 정국이한테도 나아.”
“누가 그래.”
석진이 날카로운 눈으로 물었다.
“누가 이게 전정국한테 낫대. 어?”
“정국인 아직 어려서 몰라. 지금 기분대로 하고 싶어 해. 내가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우리 다 망가져.”
윤기의 말에 석진이 답답한 듯 제 가슴을 퍽퍽 쳤다.
“정국이가 어디가 어리냐. 네가 뭘 잡아 주고 있는데? 넌 정국이를 놓은 거고 정국인 이미 망가졌어!”
술잔을 쥐고 있는 윤기의 손이 떨렸다. 이거였다. 석진이 말한 그대로였다. 윤기의 가슴 한 구석에 자리 잡은 깊이 모를 불안감은,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윤기는 고개를 저었다. 술을 잔째로 들이켰다. 부정(否定) 혹은 망각을 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니야.”
“혹시 지금 망가져도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해? 너 결혼하고 나서도 정국이가 너 포기 못하면 어떡할래? 그땐 네 옆에 있는 그 사람까지 상처 줄래?”
“그렇게 안 되게 할 거야.”
“방법 있어?”
윤기는 입을 다물었고 그걸 바라보던 석진 또한 길게 한숨을 뱉었다. 머리를 뒤로 넘긴 석진이 술을 넘기며 자신을 진정시켰다. 안 그래도 파국으로 치닫기 쉬운 두 사람을 자신마저 이렇게 몰아세울 필요까진 없었다. 석진은 윤기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방법을 떠나서 물을게. 네가 하고 싶은 건 뭔데.”
“…….”
“결혼해야 하는 게 네가 해야 하는 것이라면, 네가 하고 싶은 건 정확하게 뭔데. 어차피 할 수 없대도 나한테 말해봐. 친구니까 들어는 줄게.”
석진의 말에 가만히 말을 생각하던 윤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윤기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을 흘려냈다. 그리고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정국이랑 같이 사는 거…. 우리 정국이 아프지 않게 오래오래 같이 사는 거…. 부모 말고, 연인 하는 거….”
도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안타까워 석진은 윤기를 안아주었다. 윤기는 그 품에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우는 법을, 윤기는 어디선가 배운 적이 있었다.
*
늘어진다아ㅏㅏ 또르르..... ㅁ7ㅁ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