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섬 같은 나도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24. 본문

국슙 외 : 화무십일홍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24.

몽블랑11 2017. 6. 12. 01:57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24.

w.몽블랑




*



귀뚜라미가 우는 밤이었다. 박 대감의 크지 않은 목소리가 늦은 밤의 사랑방을 나지막이 휘감았다. 방문에 바른 창호지에 귀를 갖다 붙여도 들릴까 말까한 크기의 은밀한 밀담이었다. 방 안에 앉아 말소리를 죽인 박 대감은 요즘 들어 조금 변해 있었다. 이채가 도는 눈동자가 벌겋게 충혈 되어선 집요한 시선으로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의 입만을 좇았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알아올 셈이지, 자넨?”

“열심히 전하의 뒤를 좇고는 있사오나 전하께서 워낙 움직임이 빠르신 데다 궁의 지리를 잘 알고 계신,”

“왕의 단련 시간이 자네들보다 더 길 거라 생각해? 정무에 치여서 그마저 사라진 지가 언제인데, 그 속도도 못 따라잡는 놈들이란 말이야? 또. 궁의 지도는 내 이미 오래 전에 넘겼는데, 지금껏 그것 하나 머리에 못 넣고 뭐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도대체 무엇이 더 필요해? 내 인내심? 아니면 또 돈?”

“대감마님. 그런 것이,”

“내가 지금 자네 변명을 또 들어줄 만큼 여유로워 보이나?”

“…죄송합니다.”



박 대감의 앞에 앉은 이는 고개를 숙였다. 정국의 뒤를 캐어 그가 만나는 상대를 잡는 일이 계속해서 꼬이고 있었으나, 그 하나하나를 지금 박 대감의 앞에서 이야기한다면 그의 화만 더 돋울 뿐이다. 대신 그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렇지만 대감마님, 저희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박 대감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퍽이나, 하는 냉소 가득한 말에도 남자는 박 대감을 향해 예의를 갖춘 채 그 날카로운 눈을 빛냈다.



“딱 한 번, 전하께서 만나시는 분과 함께 계신 것을 뒤를 밟는데 성공한 적이 있나이다. 옆의 분께선 고개를 숙인 채 전하의 손을 잡고 달려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던 데다 결국 놓치긴 하였으나, 그 모습 정도는 본 적이 있습니다.”



그제야 박 대감의 눈빛이 달라진다. 대감은 …해서, 하고 덤덤한 듯 물었지만 남자는 그 짧은 말에서 느껴지는 긴장감과 기대를 읽어낼 수 있었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숨기며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만나시는 분은 남자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남자?”

“붉은 관복을 입고 계셨습니다.”



붉은 관복, 이라는 말에 박 대감의 눈이 커졌다.



“무어라…?”

“확실한 정보입니다. 저희가 두 눈으로 본 것이니까.”

“단순한 정무일 수도 있겠지.”

“전하께서 정무가 끝나신 후 혼자서 침소로 향하시던 것을 좇은 터라 그럴 일은 없습니다.”

“…자네들이 찾은 그를 만나는 게 확실한가.”

“그 사람은 이미 침소에서 전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침소에 드셨던 전하께서 저희를 눈치 채시고 그를 데리고 자리를 피하시던 터라….”

“변장을 한 것도 아니고?”

“대감마님이시라면 굳이 변장을 하는데 사람들 눈에 뜨이기 쉬운 붉은 관복을 입으시겠습니까.”



이 나라에서 붉은 관복을 입을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된다고.



남자의 말에 박 대감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처음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말대로였다. 붉은 관복은 당상관 이상의 직급만 입을 수 있는, 한마디로 고위 공직에 있는 자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이 궁에서 그런 옷으로 변장을 했다간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눈에 띄기 쉬울 것이었다. 정국이 숨기려는 사람에게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리 없었다. 박 대감은 정국이 얼마나 영리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국이 현재 만나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 그 관복을 입고 일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정국은 나무를 숨기려 숲을 택한 것이다. 바로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본인이 숲에 사는 사람이니 그에겐 가장 간편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참으로 영악했다. 박 대감은 남자가 물어온 의외의 커다란 수확에 엷은 웃음을 띄웠다가, 이내 그 웃음을 지우곤 다음 것을 물었다.



“…수국의 황자 쪽은.”

“아직 사람들을 풀어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헌데….”

“헌데?”



박 대감의 대답에 남자가 찜찜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희 말고도, 남해 마을 등지에서 수국의 황자에 대해 묻고 다니는 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으러 가면 떠도는 소문에 왜 이렇게 요즘 따라 관심들이 많으냐 되물었다 합니다.”

“되물었다….”

“예. 또한 저희가 묻는 것과는 조금 방향이 달라 보이는 것이, 수국의 황자가 누구인지 아느냐 묻는 것이 아니라 수국의 황자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 물었다 합니다.”

“아는 것이 있느냐 물었다니. …예를 들어?”

“그의 어린 시절이라든지, 그에 대한 소문이라든지, 그가 황자시절에 당했던 일의 전모라든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수국의 황자에 대해 물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조금 있는 사람들부터 물어보고 다녔다 합니다.”

“…….”

“수국의 황자가 누구인지 밝혀내려는 것보단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말을 끝낸 남자는 박 대감의 얼굴을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읽기 어려운 박 대감의 표정은 지금 더더욱 알 수 없어져 있었다. 박 대감은 변하지 않는 표정과 억양 없는 말투로 남자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그걸 알아보고 다닌 이가 누구라 하던가.”

“글쎄요. 그것에 대해선 아무도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신을 그냥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떠돌이라 하며 술이나 얻어먹고 다니며 저녁이 되면 술에 취해 마을을 돌아다니다 밤이 되면 사라져선 사나흘 마을에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답니다.”



박 대감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깊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남자는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박 대감의 생각을 남자는 털끝만큼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저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들이 맞춰지고 있는 걸까. 남자는 박 대감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윽고 열린 박 대감의 말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박 터진 소리를 내야 했다.



“누가 수국의 황자에 대해 캐고 다니는지 알 것 같군.”

“…예?”

“그렇다면 우린 더 이상 그곳에서 수국의 황자에 대해 캘 이유가 없겠어.”



어리둥절한 표정의 남자의 앞에서, 박 대감은 처음으로 확실하게 웃어보였다. 승리를 예감한 웃음이었다. 만족감에 참을 수도, 숨길 수도 없는 웃음이었다. 그쯤 되자 박 대감은 그냥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박 대감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남자를 향해 말했다.



“남해에 있던 자네 부하들 다 끌어올려. 수국의 황자는 바로 이곳, 왕의 곁에 있다.”



어쩌면, 이번 일은 왕의 자리가 흔들릴 수 있을 만큼의 커다란 일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박 대감은 자신의 안에서 막을 수 없이 벅차게 피어오르는 기대감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해야 할 것들을 짚어보기 위해, 일단 머릿속을 천천히 차게 식히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냉정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



호석은 때때로 술에 취해 늘어져 산중턱에 위치한 진지까지 올라왔다. 호석이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거기까지 올라올 수 있는지 남준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보초에게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었다. 술에 떡이 된 사람이 어떻게 귀신같이 보초들의 눈을 피해 들어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남준은 처음엔 그것이 감시를 소홀히 한 보초의 잘못이라 생각하여 그날 밤 보초를 섰던 병사들을 호되게 굴렸다. 병사들은 이유도 모른 채 이리 구르고 저리 굴렀다. 술에 취한 사람 하나 잡아내지 못하냐는 남준의 호령에 보초들은 ‘예에?!’ 하고 놀라며 그것이 누구냐 물었다. 그러면 남준은 그게 누군지 이야기도 하지 않고 그저 보초를 어떻게 서는 거냐며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질렀다.



병사들은 억울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남준이 이유 없이 사람을 굴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말 남준의 말대로 술에 취한 사람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면 진지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과 다름이 없었다. 병사들은 남준에게 혼나고 나서 두 눈에 불을 켜고 진지를 순찰하며 보초를 섰다.



그러나 보초들이 호석을 잡아내지 못하는 날들이 몇 번이고 이어지자 남준은 더 이상 병사들을 혼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술을 먹고 들어오는 사람이 누구냐는 병사와 장수들의 질문에 대답조차 할 수 없을뿐더러, 남준 스스로가 본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남준이 자신이 순찰하던 중이었다. 근처에서 잎사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돌렸던 남준이 들개인 것을 확인하고 눈을 떼려던 그 순간, 그 들개가, 아니 그 들개의 형체를 하고 있던 것이 천천히 일어나더니 사람의 형체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으, 으악!”

“…김남준…?”

“뭐야, 뭐, 읍!”



너무나도 정확하게 불린 제 이름에 남준이 더 놀라서 소릴 지르자, 인영이 황급히 다가와 제 입을 막았다. 끼쳐오는 익숙한 술 냄새에 남준이 급하게 얼굴을 돌려 제가 예상한 인물이 맞는지 확인한다. 역시나였다. 어찌 그리 감쪽같이 들개 흉내를 낸단 말인가. 남준이 물으려 하던 그때, 멀찍이서 ‘무슨 일이십니까. 괜찮으십니까?!’ 하는 병사의 목소리가 들려와 남준이 제 입을 막은 손을 내치곤 빠르게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괜찮다! 와보지 않아도 돼!”

“예, 알겠습니다!”



병사의 소리가 멀어진다. 그제야 곁에서 기척을 죽였던 호석의 목소리가 발랄하게 남준의 귓전을 때렸다.



“응, 나야.”



채 무엇을 생각할 틈도 없이 호석에게 당했단 생각이 들자, 남준의 머릿속에서 참을 수 없이 열이 올랐다.



“너 미친 거 아니냐, 진짜?!”

“미안미안. 보초들은 그냥 들개려니 하고 지나가는데… 왠지 넌 아는 척 하고 싶더라고. 흐흥.”

“내가 술 마시고 다니지 말랬잖아!”

“아아. 김남준 부장, 나는 중요한 임무를 맡은 책사란 말이야. 그리고 이건 술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라고.”

“도대체 네가 맡은 중요한 임무가 뭔데?”

“그것은 비밀. …쉿.”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며 눈을 찡긋거린 호석의 표정에 남준이 말을 잃는다. 어이가 없는 남준의 어깨를 잡고 익숙하게 돌린 호석은 남준의 등에 업히려 올라타며 버둥거렸다.



“업어줘…. 날 업어라, 김남준. 응? 나 들키면 여태까지 네가 봐준 거 다 불어버릴 거야. 군법은 지엄하다고오. 나는 왕의 특사니까 괜찮을지 몰라도 넌 아닐 거얼? 흐흥….”

“…에휴….”



술에 취해 늘어지는 호석의 발음에, 남준은 결국 커다랗게 한숨을 쉬며 또 호석을 등에 업고 마는 것이다. 호석의 허벅지에 팔을 두르고 안정적인 자세를 잡기 위해 두어 번 호석을 업은 채 들썩이면, 호석은 헤헤… 하고 남준의 등에 제 웃음소리를 흩뜨렸다.



점점 편해졌다. 등에 업힌 호석의 체온이 점점 익숙해졌다. 남준은 그것이 불안했다. 그는 ‘익숙함’이라는 것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 자신이 얼마나 발버둥 쳤는지도, 아직 잊은 바 아니었다.



그러나, 잊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그렇게 힘들게 잊어놓았는데, 습관이 되돌아오는 것은 무섭도록 빨랐다.



마치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남준은 막사에 호석을 데려다 놓고 어깨까지 모포를 덮어주었다. 그리고 막사의 문을 열고 떠나기 전 한 번 더 뒤를 돌아 호석의 누운 등을 확인했다. 그 모든 행동들이 익숙하게 몸에 배어 있었다. 마치 잊은 적도 없다는 듯이. 그간의 시간을 모두 뛰어넘은 듯이.



“…남준아.”



호석의 말에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멈추는 것 또한.



“왜.”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했었나.”

“응.”

“…그랬지, 참. 내가 다른 사람이랑 헷갈렸나 ㅂ,”

“아니.”



남준은 호석의 말을 잘라냈다.



“너한테 말한 적 없어.”

“…….”

“우리 그런 거 말할 사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

“…그럼 내일 보자.”



잘 자, 하는 말을 남기고 남준이 돌아선다. 막사의 천막 문이 남준의 몸만큼 열렸다 이내 닫혔다. 호석만 남은 막사 안으로 외로운 침묵이 찾아들었다. 막사의 문에 등을 보인 채 한참동안 미동도 없이 누워있던 호석의 몸이, 깊은 한숨소리와 함께 바로 뉘어진다.



“…망할, 도대체 어떻게 잘 자란 거야.”



호석은 팔을 들어 제 눈을 가린 채 눈을 감았다. 오늘은 아무래도 덜 취했다. 차라리 더 취했어야 했다. 모든 감정이 이렇게 예민하게 일렁이는 것을 원한 적 없었다. 그러나 정말 정신을 놓을 때까지 마실 수도 없었다. 특사로 파견되기 전 정국이 호석에게 단단히 일러둔 것 중 하나였다. 절대 의식이 끊어질 만큼 과음하지 말 것. 왕의 명령을 눈앞에서 어길 수는 있어도 없는 곳에서 어길 수는 없었다. 호석은 그런 성격이었다. 어쩌면 정국은 그것을 알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알고 그랬을 것이었다.



“이 망할 전하.”



호석은 괜히 이 자리에 없는 정국까지 원망하며 억지로, 억지로 생각을 끊어냈다. 이 모든 것이 다 정국의 잘못이었다. 그냥, 다.



*



+)

지난편에 하뜌 눌러주신 분들과 댓글 달아주신 NJ님, 남준이보조개님, 앵슷성애자님, 쭝님, o0o님 감사합니다! 지난편에 댓글 달아주신 분들이 너무 상냥하게 코멘트 해주셔서 저 혼자 레알 포풍감동 ㅠㅅㅠ ... 진짜 그냥 한풀이 할 데가 없어 썼던 것인데 ㅠㅠ 한편으론 위로해주시는 댓글 받으면서 상처가 가라앉는 제 마음이 참으로... 아 나는 본투비관종인가보다 생각하였습니다(...) ㅠㅠㅋㅋㅋㅋㅋㅋㅋㅋ 어떻게 이렇게 위로되는지 모를 일입니다 정말 ㅠㅅㅠ...

말로 다 드리지 못할 만큼 감사합니다ㅠㅅㅠ 어떻게 말해야 전해질지 모르겠어요. 감사합니다. 해주신 말씀들 한줄한줄 다, 너무나 벅차게 감사했어요. .... 이잉 8ㅅ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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