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섬 같은 나도
[랩뷔/슙민] 적도(赤道) 01. 본문
적도 01.
적도보다 뜨거웠던 너의 사랑이,
우리의 첫 만남은, 아름다웠다. 김남준, 그의 아버지와 김태형, 나의 어머니가 만나서 살게 된 것은 어쩌면 천운이라고 생각했다. 연세가 드셨지만 훤칠한 외모의 나의 법적 아버지. 그의 넉넉하고 따뜻한 품에 가만히 기대어 수줍게 손을 잡은 어머니를 보았을 때, 나는 더 이상 내게 선택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를 보내드려야 했다. 지금까지 홀로 17년간 나를 키워준, 고생만 알고 살았던 나의 어머니를. 생각 없던 시절의 나라도 그쯤은 알고 있었다.
두 분이 모두 아들 하나뿐이셨고, 우린 공교롭게도 성이 같았다. 마치 처음부터 가족이었던 것처럼.
형은 어머니께 듣자하니 굉장한 수재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아 뭣도 일찍 하고, 중학교 때는 뭣도 하고…. 나 참 비범한 놈이랑 형제가 되는구나, 내 인생에 이런 희한한 일이 생기네, 그 정도로 생각했다. 관심을 두고 싶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실 당시 나는 형을 그렇게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굳이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이제부터 가족으로 살 거라면 천천히 만나고 천천히 친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내가 3학년으로 올라가던 그 겨울,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을 하셨다. 두 분과 우리 형제만이 참석한 조촐한 결혼식이었다. 조촐한 결혼식이라도 구색은 갖추고 싶으셨는지 조그마한 홀을 빌리신 두 분을 기다리며, 어색한 수트 차림으로 결혼식장 한 구석에 서 있던 나에게, 미소를 띤 채 다가왔던 형. 무언가를 쥐고 들어 올리더니 내 눈앞에 손바닥을 가만히 펴줬다.
‘커프스 버튼. 선물이야.’
‘너랑 나랑 맞췄어.’
‘우리 오늘부터 형제니까.’
은빛의 조그마한 단추는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값이 나가보였다. 화려한 문양과 은은한 반짝임. 무슨 문양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의 소매를 보니 그의 수트와 잘 어울리게도 달려있었다. 그리고 처음 본 그의 수트 입은 모습은, 아직도 생생할 정도로 기억에 남아있다. 나는 고등학생, 그는 대학생이라는 차이 때문일까. 세련되게 잘 정리된 머리에 깔끔한 쓰리피스의 정장이 그의 몸에 맞춘 듯 잘 어울렸다.
웃으며 단추를 받아든 나는, 커프스 버튼이라는 것을 실제로는 처음 보았고 덜렁 단추만 갖고는 소매에 달 수가 없었다. 어디에 다는 건지도 모르는 내가 단추를 들고 어쩔 줄 몰라 소매와 단추를 든 채 가만히 서 있자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다가와 나의 소매를 가만히 돌려보더니 커프스단추 구멍을 찾아 끼워준다. 그의 커다란 손의 익숙한 움직임이 나와는 완전히 달라서 나는 그걸 멍하니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단추를 채워준 그는 그런 나를 보고 픽 웃었던 것 같다. 그런 그에게 눈을 맞추며 웃었던 것도 같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결혼식 이후로 두 분이서 같이 살기 시작하셨다. 나도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문제는 나의 학교였다. 고등학교 3학년이나 되어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집으로 이사하려고 학교를 옮기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 이유였다.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집으로 옮기고, 나만 혼자 어머니와 살던 집에서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오히려 안심했다. 갑자기 너무 많은 것이 바뀌면 혼란스러울 것 같았다. 학교가 바뀌는 것도 그렇고, 갑자기 커다란 집으로 가게 되는 것도 그렇고, 없던 아버지나 형과 함께 사는 것도 그렇고. 학교 등교 준비나 하교 이후가 조금 바쁘고 외로울 것 같긴 하지만, 이전부터 집안일은 꾸준히 해왔으니 별로 달라질 건 없을 것도 같았다. 거기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집이 차로 한 시간 거리이니 그리 멀지도 않아 가끔 들러주신다고도 하셨고. 그냥 이 정도가 좋은 것 같았다.
그러나 부모님은 우리 형제가 태어나서 계속 따로 살다가 갑자기 형제로 묶여 서로 어색해하진 않을지 걱정이 되셨던 것 같다. 형이 대학의 여름 방학이 시작될 즈음,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들고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이다.
‘방학 동안만 여기에 있다 갈게. 우리가 너무 어색할까봐 어머니께서 많이 걱정하셔서 이번 방학 때부터라도 같이 시간을 보내라고 말씀하시길래. 네가 많이 불편하겠지만 잠시 동안 이렇게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생각하면 형은 내가 어머니에게 약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형의 말에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나에게 웃었던 그 얼굴을 생각하면.
그때부터 형은 우리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다니고 친구들을 만나는 평범한 대학생의 방학을 보냈다. 어쩌다 일찍 일어나는 날엔 부스스한 머리와 얼굴로 내 아침 식사를 챙겨주기도 했고, 내가 집에 들어갈 때 웃는 얼굴로 보고 있던 tv를 끄며 반겨주기도 하고.
개강 1주일 전, 집으로 돌아가기 얼마 전까지는 말이다.
*
딩동- 딩동-
꽤 한 새벽의 일이어서 좀 짜증스레 일어났었다. 인터폰을 받아보니 형과 모르는 얼굴이 화면 속에 있다. 형의 친구로 보이는 그는 축축 늘어지는 형의 팔을 어깨에 둘러메고 힘들어 죽겠다는 얼굴로 인터폰 렌즈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황해서 잠결에도 빨리 문을 열어주니 형의 친구와 눈이 턱하고 마주쳤다.
‘네가 이 새끼 동생이야?’
‘ㅇ…예.’
‘아 미친, 졸라 무거워.’
그는 신발장으로 들어오자마자 술에 취해 의식이 없는 것 같은 형을 거실바닥으로 내팽개쳤다. 꽤 세게 내팽개쳐서 나는 형이 어디 다치는 건 아닌가 놀란 얼굴로 형과 형의 친구를 번갈아 봤다. 그때
‘아가, 형아 물 한 잔.’
‘…네?’
‘물. 시원한 걸로. 빨리. Hurry up!’
손뼉까지 치며 나를 재촉하는 통에 빠르게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들고 형 친구에게 왔을 때 그는 이미 신발을 벗고 거실 쇼파에 앉아있었다. 그리고는 눈을 맞추며 생긋 웃고 ‘땡큐.’하며 그 자리에서 한 병을 벌컥벌컥 비웠다. 그를 잠시 바라보다 형이 괜찮은지 형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별로 얘기해본 적도 없는데 갑자기 취한 형의 모습을 보게 되어 당황스럽고 신기하던 차였다. 그러다 시선을 들어 올렸는데 형의 친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쳐다보고 있었나? 갑자기 눈이 마주쳐 눈만 깜빡이니 형 친구가 먼저 피식 웃으며 쇼파에서 일어섰다. 이 형 버릇인가 자꾸 나한테 눈웃음 쳐….
‘민윤기.’
‘…네?’
‘민윤기라고, 내 이름.’
‘아, 형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윤기 형.’
‘넌 이름 뭐야?’
신발을 비적비적 신으면서 이름을 물어보길래 김태형이요, 하고 대답을 하니 또 눈을 맞추며 눈웃음을 친다.
‘김남준이 동생 귀엽게 생겼네. 다음에 또 보자.’
‘예.’
‘괜히 쟤 방으로 안 옮겨도 돼. 그냥 거실에 둬. 이불이나 덮어주면 감기는 안 들 거야.’
‘네.’
‘밤늦게 미안하다. 다음에 보자.’
‘네, 안녕히 가세요.’
‘어어.’
손을 가볍게 들어주고 나가는 그의 옆모습에 꾸벅 인사를 하고 문이 닫힌다. 그리고 거실로 고개를 돌리자 아까 윤기 형이 내팽개쳐 놓은 대로 가만히 잠든 형이 보였다. 그냥 두라고 했지만…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옆으로 쓰러진 사람에 이불만 덮어두는 건 좀 불쌍하지.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기고 그래도 바닥은 너무 차니까 쇼파에라도 올려줄까 하고 공주님 안기를 시도한다. 똑바로 눕혀서 등과 다리에 손을 넣고 팔에 힘을 주지만 내 힘으로 그를 안아 올리는 건 역부족이었다. 끙끙대고 힘을 줘봤자 돌덩이 같이 꿈쩍도 안 하는 형에 나는 맥이 탁 풀어졌다. 이불이나 가져와야겠다, 하고 일어나 형의 침대에서 이불을 질질 끌고 나오는데 거실로 나와 보니 형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형, 일어났어요?’
‘…어. 집인가?’
‘네. 윤기 형이 데려왔어요.’
비척비척 일어나는 형을 보며 나는 한 아름 이불을 든 채 형 방문에 서있었다. 이불을 버리고 부축하러 갈까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닌 듯 형이 방으로 걸어온다. 들어와서 잘래요? 하고 물어보려는데 형이 내 목을 안고 이불과 함께 그대로 쓰러진다.
‘아 형… 아파요.’
‘졸려….’
‘자요, 형. 나도 이제 자야… 앗.’
목 뒤쪽으로 갑자기 숨을 내뱉는 형 때문에 한껏 예민해진 부분이 움츠러든다. 간지러워서 피하려는데 형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뭐지. 뭐지….
‘태형아.’
‘네, 형.’
‘우리… 별로 얘기해본 적 없지.’
‘…….’
실제로 그랬던 것 같다. 학교 스케줄이 바쁘다고 핑계는 대지만 사실, 형이 어려워 형을 피하고 있었으니까. 형이 내 어깨 쪽으로 얼굴을 묻는다. 형의 숨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 있었다. 괜히 그쪽으로 모든 신경이 쏠린다.
‘우리 어떻게 친해질까….’
‘…….’
‘어떻게 해야 네가 날 덜 어려워할까.’
‘…헤헤.’
어려운 순간엔 웃는 게 최고다. 그러나 웃으며 형의 눈과 마주한 순간 난 그게 처음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마주친 형의 눈은 조금 무서울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다. …형? 하고 불러봤지만 형은 아무 말이 없다. 얼마 간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뚫어져라 보던 형은 한숨을 탁 내쉬며 내 머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아니다… 미안하다, 자.’
‘…네.’
나는 인사도 못하고 나왔다. 나를 바라보는 형의 눈빛이 조금 무서웠고, 겁이 났고, 또 …애처로웠다.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나에게. 그러나 나는 무엇을 바라는지도 알지 못했고, 무언가 안다고 해도 쉽게 답해줄 수 없는, 그런 걸 형이 바라는 것 같아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내 방으로 돌아와서도 한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써야 했기 때문이다.
형은 왜인지 다음 날 내가 학교 가 있는 동안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갔다. 조용하고 텅 빈 형 방엔 ‘겨울 방학 때 보자’ 하는 쪽지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사람 드는 자리는 태가 안 나도 난 자린 태가 난다더니… 인사도 없이 가버린 형이 조금 서운했다. 다음에 보면 조금 더 친해지려고 노력해야지. 그때는 나도 수능도 끝났을 테니까. 여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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