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섬 같은 나도
[랩뷔/슙민] 적도(赤道) 09. 본문
적도 09.
적도보다 뜨거웠던 너의 사랑이,
열대야가 계속되던 어느 여름 밤, 나는 무드등만을 켠 채로 침대에 누워 정국과 통화중이었다. 열어둔 창문으로 보이는 밤하늘의 달이 밝았다.
- 우리 낮에 만나는 거 처음이죠?
‘그런 것 같은데.’
- 와, 너무 좋다. 저 지금 완전 신났어요.
‘응,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어.’
정국과 낮에 데이트를 해보기로 했다. 밤에만 만나 술과 섹스, 그것밖에 모르는 사람들처럼 밤거리를 헤매지 말고, 우리도 눈부신 햇빛 아래서 걸으며 남들처럼 해보기로 했다.
- 나 교복 입고 나갈까요? 형도 교복이 좋아요?
‘…아니, 별로 안 좋아.’
- 왜요? 나 만났던 사람들은 교복 입으면 다 좋아했는데. 나 교복 입은 거 되게 예뻐요.
‘그런 사람들 만나면 안 돼.’
- 크하하, 형만 만나야겠네 그럼. 입지 말란 사람 형 밖에 없었는데.
‘그러든지.’
나의 대답에 정국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정국아? 하고 불렀더니 이내 네, 하고 대답해온다.
‘왜 말이 없어.’
- 아, 나 방금 착각할 뻔 했잖아요. 형이 자기만 만나라니까 사귀자는 줄 알고. 혼자 두근거렸네, 진짜.
‘…헛소리 하지 말고 내일 조심해서 나와.’
- 헛소리라뇨! 크윽, 이래서 짝사랑은 하는 게 아니야.
‘전정국.’
- 아아아아, 알았어요. 이상한 말 그만할라 그랬어요, 지금 막. 아 그리고 내일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예쁘게 하고 와요. 그럼 나는 형 쳐다보는 사람들 다 째려봐 줄게요.
의기양양한 정국의 목소리가 귀여워 웃음이 났다. ‘그럴거면 왜 예쁘게 하고 오라는 건데.’ 하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요. 예쁜 건 좋은데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면 싫잖아요.’ 하는 정국의 말에서 10대의 풋풋함이 묻어났다. 나도 10대 때 그랬을까. 아니면 그냥 정국의 성격일지도.
‘우리 내일 놀이공원 가는 거지?’
- 네. 형은 놀이공원 중에 어디가 좋아요?
‘글쎄. 아무데나 상관은 없는데…. L월드가 가깝잖아.’
- 음, 그쵸. 그럼 거기 갈까요? 사실 어디든 재밌을 걸요, 나랑 가면?
‘나도 그럴 것 같긴 해.’
자신감이 귀여워 웃으니 정국의 웃음소리도 같이 들렸다. ‘그럼 잘 자고 우리 내일 봐요, 형.’ 하는 정국의 목소리에 그러마 하며 전화를 끊는다. 꺼지는 액정을 보며 마음 한켠이 어두웠다. 어디서든 사랑 받을 것 같은 이 아이가 나와 엮여서 이러고 있는지. 왜 난 생각만큼 정국에게 잘해주지 못하는지. 그러면서도 왜 형이 집에 들어왔는지를 신경 쓰는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탁자에 있는 무드등을 눌러 꺼버리고 눈을 감았다.
*
정국과 전철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기다리는데 누군가 어깨를 톡톡 친다. 고개를 드니 예상대로 기다리던 정국이었다. 까만 머리에 싱긋 웃는 얼굴. 그런데 교복—아이보리 계열의 하복을 입고 있어 나도 모르게 ‘어…?’ 하고 물었다.
‘왜 교복을 입고 왔어? 방학이잖아.’
‘우리 학교 보충하거든요. 근데 보충하고 집에 들를 시간이 없어서 사복을 따로 가져오려고 했는데 어제 형이랑 전화하고 밤늦게까지 옷 고르다가 늦게 잤는데, 그래서 아침에 늦잠 자서 막 뛰쳐나오고 보니 가방 속에 옷은 없고….’
‘…….’
‘형은 오늘도 예쁘네요! 그냥 맨날맨날 예쁜 거 같아.’
‘…허….’
교복을 입으니 지금까지의 정국과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교복이 원래 이런 힘이 있는 건가. 이렇게 어렸구나, 전정국. 까만 눈동자에 비치는 내 모습에 복잡한 표정으로 정국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으니 정국이 손목을 잡아끈다.
‘빨리 가요, 놀이공원! 사람 많으면 어떡해요! 줄 서서 오래 기다리는 거 딱 싫단 말이에요.’
‘응, 가자.’
웃으며 올려다 본 정국의 표정이 참으로 예뻤던 걸로 기억한다.
*
놀이공원은 너무 월요일부터 온 건가 싶을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한산한 놀이공원의 정경에 정국은 더 신났는지 ‘이렇게 사람 없는 거 처음 봐요. 놀이기구 빨리 탈 수 있겠다!’ 하며 방방 뛰었다. 맑은 하늘도, 교복차림의 신난 정국도, 따가운 햇빛 아래서의 데이트도, 모두 다 처음이어서 하나하나 머릿속에 들어와 박히는 기분이었다.
꽤 뙤약볕을 돌아다니다 둘 다 얼굴이 발갛게 올라선 그늘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쉬다가, 옆에 있던 이상한 동물 머리띠에 꽂혀서 쓸데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서 쓰고 서로를 보며 웃고, 잘 어울린다며 핸드폰에 담는다. 무서운 놀이기구를 둘 다 잘 타는 편이어서 웃고 소리 지르며 놀다가, 돌아가는 찻잔 놀이기구에 오히려 멀미를 하고 헤롱헤롱 대기도 했다. 결국 찻잔 옆 벤치에 정국과 둘이 널브러졌다.
‘으아아아아. 더 못 타겠어요. 너무 힘들어.’
‘나도. 찻잔 너무 힘들어.’
‘맞아. 찻잔이 제일 힘들었어요.’
‘핸들만 신나게 돌렸으면서 뭐가 힘들어.’
옆에 앉아서 신나게 웃으며 핸들을 돌리던 정국의 얼굴이 생각나 구시렁대니 ‘그건 돌려야 맛이죠.’ 하면서 몸을 일으켜 핸들을 열심히 돌리는 시늉을 하더니 눈을 접고 웃는다. 그에 눈을 맞추며 웃었다.
‘몇 시야?’
‘지금… 네 시 반이요.’
‘이제 슬슬 갈까?’
‘좋아요!’
마지막으로 자이로드롭만 한 번 더 타고요. 정국이 손을 잡아 자이로드롭 쪽으로 이끈다. 집에 가는 거 아니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정국의 뒤를 따라 나서는데 멀찍이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웃는 정국의 뒤로 미소짓는 우리 형의 얼굴이. 손을 잡고 앞서나가던 정국이 내가 발걸음이 느려지자 뒤를 돌아본다.
‘형…?’
내가 내뱉은 한 글자에 정국이 앞을 쳐다본다. 이런 데서 마주치기 싫었는데, 심지어 정국과 함께 마주치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형에게 눈을 고정하고 돌리지를 못했다. 그러자 형의 옆에 있는 사람이 나를 가리키며 형에게 뭐라고 했고 형도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는 우리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웃으면서.
‘태형아, 너도 여기 왔어?’
하며 웃는 형. ‘머리띠 귀엽네.’ 형의 시선이 내 머리에 있는 머리띠로 꽂히자 나는 나도 모르게 당황스러워 하며 빠르게 정국에게 잡힌 손을 빼서 머리띠를 벗겨냈다. 그걸 바라보는 정국이 느껴졌지만 차마 그에게 시선을 돌리진 못했다.
‘누구야? 김남준이네 동생?’
‘김남준’이라는 말에 정국이 고개를 들어 형의 얼굴을 확인한다. 형은 정국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 내 동생.’
‘어느 쪽. 이쪽? 소개해줘야지, 임마.’
‘응, 이쪽이 내 동생 태형이. 태형아, 내 친구 호석이.’
나는 한 마디도 못하고 호석이라는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는 ‘귀엽네~’ 하며 손을 흔들며 웃었다. 그제서야 내가 웃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어색하게 웃어 보이려고 했지만 그 표정이 어떤 표정일지 나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제 집에 가려고?’
‘…….’
‘네!’
형이 묻는데도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니 옆에서 정국이 갑자기 끼어들어 대답했다. 그럼에도 형은 정국을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 호석이라는 사람이 ‘넌 태형이 후배야? 고등학생? 너도 귀엽다.’ 하며 웃었다. 그러자 정국도 ‘감사합니다!’ 하며 웃었다. 대뜸 튀어나온 정국의 목소리에 형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 공간에서 웃지 못하는 건 나와 형뿐이었다. 하지만 형은 다시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여전히 나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따 집에서 보자.’
‘야, 내일 봐야지. 우리 오늘 야간 개장 보러 온 거잖아.’
‘아, 그렇지. 내일 보자.’
‘응….’
나는 형에게 간신히 대답하고는 형과 일행에게 고개를 숙였다. 형은 나에게만 손을 들어 인사하고 돌아섰고 호석이라는 사람은 나와 정국에게까지 웃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정국 또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두 사람이 지나간 후, 나는 오늘 하루가 마치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 즐거운 기분이 모두 휘발되듯 사라지고 남은 건 불안과 걱정뿐이었다. 형의 옆자리의 친구라는 저 사람이 누굴까. 야간개장을 친구랑 보러오나. 교복을 입은 정국이와 함께 있는 내가 어떤 사이로 보였을까….
‘드디어 실제로 봤네요. 남준이라는 사람.’
정국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듯 놀라 그의 얼굴을 보니 그는 신고 온 컨버스로 땅바닥을 툭툭 차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앞머리가 눈을 가려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뭐야. 나랑 닮은 데 하나도 없네.’
시무룩한 정국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정국과 형을 겹쳐 생각했던 지난날의 잘못이 이제야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것 같았다. 조그맣게 ‘미안….’ 이라고 말하니 정국이 고개를 젓는다.
‘형이 미안할 거 없어요. 전혀 닮지도 않았는데 옆에 있을 수 있어서 행운일 정도네요, 뭐. 오히려 좀 너무 안 닮아서 당황스러울 지경?’
하며 정국이 고갤 들어 웃는다. 근데 왜 그 미소가 아침에 본 것과 달랐을까. 정국의 미소가, 평소와 똑같이 접힌 눈이, 비슷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나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가 왜… 슬펐을까.
‘형, 우리 저녁은 집 근처에서 먹을까요?’
‘…그래, 그러자.’
‘저녁까지 먹고…, 그러고….’
‘…….’
‘…헤어져요, 우리.’
헤어지잔 말이 평소와 다르게 들리는 건, 네 표정이 슬퍼 보이는 건 모두 내 착각일까. 정국이 조심스럽게 내 손에 들린 머리띠를 빼어 제 손에 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띠도 빼서 내 것과 함께 들곤 머리를 약간 흔들어 정리하고는 먼저 출구 쪽으로 나섰다. 정국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
저녁 식사를 제대로 넘기지 못하는 나를 보고 정국은 오늘 너무 피곤했던 것 같다며 이제 집에 가는 게 좋겠다 하면서 집으로 보냈다. 별로 되지도 않는 양을 먹고도 음식이 명치끝에 턱 걸려서 내려가지 않는 듯한 느낌에 가슴을 탁탁 치며 집으로 향했다. 정국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땐 분명 정국에 대한 미안함이 컸는데 집에 돌아와 아파오는 머리를 붙들고 소파에 늘어졌을 때 머릿속을 부유하는 건, 형과 그 남자.
머리도 아프고 속도 불편해 기분이 한없이 침잠해간다. 형은 언제 돌아오는 걸까. 에이, 그런 생각 하지 말자. 하며 잠을 청해 보려 눈을 감아봐도 불편한 속이 잠을 깨웠다. 그렇다고 눈을 뜨기도 귀찮아 눈을 감았다. 머릿속은 계속해서 가동 중이다. 멈춰! 하고 생각으로 말해보지만 그때뿐. 그래서, 왜 같이 있는 건데? 하고 또 형과 그 남자 생각이 났다.
지난 번 윤기 형과 말하는 걸 들어보니 형은 꽤 주위 친구들에게 오픈된 것 같았고, 그러면 그 친구도 형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알 수도 있고. 뭐… 그 친구도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지. 둘이 야간개장 같이 왔으면, 그럼… 그럼 뭐….
‘아씨…. 짜증나.’
눈은 뜨지 않고 인상만 찌푸리니 머리가 더 아파오는 것 같다. 결국 일어나 응급 키트를 뒤지는데 찾는 두통약은 없는 것 같았다. 소화제도 없고. 편의점이라도 가야하나 싶은데 머리가 울려와 움직이기 싫었다. 속에서 신물이 오르는 게 아무래도 단단히 체했나보다.
‘하아….’
되는 일 정말 없다, 진짜.
나는 쇼파에 누워 눈을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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