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섬 같은 나도
[국슙] DADDY 03. 본문
[국슙] DADDY 03.
w. 몽블랑
*
전정국 18세, 민윤기 30세.
새벽 6시 29분. 여름이 다가와 해가 뜨는 시간이 일러져 집안은 이미 환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돌아다니지 않아 아직 고요했다. 초침 가는 소리가 몇 번 더 들렸을 즈음, 두 개의 방에서 서로 울리는 알람 소리가 집안의 적막을 깨웠다.
알람이 울리자마자 눈을 뜬 윤기가 인상을 찌푸린 채 알람을 껐다. 잠이 덜 깨어 입술이 조금 나온 채로 윤기는 일어나 앉아 잠시 멍을 때리다 이내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섰다. 얼굴엔 아직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은 채 비틀대며 걸었다.
조금 열려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열심히 울리고 있는 알람과 침대 위 이불과 엉켜 꿈쩍도 않는 정국이 있었다. 핸드폰은 소리가 작다기에 사줬던 알람시계를 들고, 그 쩌렁쩌렁한 소리에 인상을 찌푸린 윤기가 잠시 고민했다. 얜 이게 안 들리나? 미동도 없는 정국의 등을 바라보던 윤기가 이내 알람을 끄곤 정국의 팔을 잡아 흔든다.
“전정국, 일어나.”
“…….”
“정국아, 학교 가자.”
“…….”
…죽은 건가? 아무런 응답이 없었지만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던 윤기에겐 익숙했다.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죽이 웃은 윤기. 최후의 방법을 쓸 차례였다. 윤기는 천천히 상체를 숙여 정국의 귀에 입술을 갖다 대고 속삭인다.
“정국아.”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귀에 닿는 숨에 정국이 화들짝 놀라더니 단번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눈도 못 뜬 채 ‘응? 으응…?’ 하고 주위를 살핀다. 눈을 뜨려고 애를 쓰는 정국을 보며 윤기가 피식 웃었다.
“나와, 밥 먹자.”
“으응? 응.”
간신히 한 쪽 뿐이지만 실눈을 떠낸 정국이 대답했다. 비몽사몽간에 반말을 하는 건 정국의 오랜 버릇이었다. 윤기가 먼저 나간 그 길을 잠시 후 잠이 덜 깬 정국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갔다.
*
정국에겐 고등학교에 들어오고 나서 생긴 두 명의 친구가 있었다. 김태형과 박지민. 1학년 때 같은 반이 되어 휩쓸리듯 친해졌는데 2학년 때도 운 좋게 같은 반이 되었다, 하는 생각을 하며 태형과 지민을 보던 정국이 다시 생각했다. 이게 정말 운이 좋은 걸까?
지민은 그나마 괜찮았다, 혼자 있을 땐. 귀엽게 생겨서 착하고 잘 웃었다. 정국이 처음에 친해진 것도 그런 지민이었다. 짝이 되어 옆자리에서 눈웃음을 지으며 안녕, 난 박지민이야. 하고 말하는 지민과 친해지는 건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문제는, 김태형이었다. 옆에 태형이 있으면 지민의 그 모든 장점들이 모두 시너지를 일으켰다. 태형이 이상한 짓을 시작하면 그 옆에서 하나도 말리지도 않고 따라다니며 그걸 다 보고 목청껏 웃는다. 바로 지금처럼.
“미쳤, 미쳐써 김태형! 하하하하하하!”
교실 내에 지민의 웃음소리만 울려 퍼졌다. 좋지 않은 신호다. 정국은 슬쩍 지민의 웃음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태형이 손 안에 무언가를 잡아 놓고 ‘나 건드리지 마. 막, 막, 튄다고오! 튄다고오!’ 특유의 발음으로 반쯤 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 옆에서 지민은 허리를 꺾어가며 웃어재꼈다.
“그러니까, 하하하학, 놔주라니까?”
“형님이 이걸 어떻게 잡았, 악!”
태형이 뭔가에 놀라 손을 벌리자 태형의 손 안에서 청개구리가 튀었다. 그에 같은 반에 있던 아이들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태형의 손에서 빠져나온 청개구리는 열심히 뛰었다. 가끔 서서 꾸엑, 꾸엑, 하는 소리를 내기도 했는데 태형이 ‘왜 남의 손에서 소릴 질르냐고오!’ 하는 게 저 소리에 놀랐나보다. 그러면서도 ‘개굴아! 개굴아!’ 하며 청개구리를 따라 교실 밖으로 뛰어나가는 태형의 뒷모습에 지민이 아하학, 하고 몸을 배배 꼬며 웃다 눈이 마주친 정국에게 다가왔다.
“봐써? 봐써?”
정국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의 말투는 항상 뭔가 하나 빠진 듯 했다. 그리고 그건 태형도 그러했는데, 둘이 주는 느낌은 퍽 달랐다. 지민의 말투는 부드럽게 들리기도 했고 착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태형의 말투엔 상대방의 경계심을 내리는 느물함이 있었다. 그래서 낯을 가리는 정국이 두 사람과 친해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태태 미쳤나바.”
“원래 정상일 때 별로 없잖아.”
“아니야. …아닌가?”
모르겠다, 하고 지민이 웃는다. 정국이 마주보고 웃자 어디선가 나타난 태형이 두 사람의 사이에 섰다. 왜 웃어? 태형의 말에 정국이 아무것도 아냐, 하고 말하자 태형은 이번엔 지민에게 다가섰다. 왜 웃는데? 뭐? 왜? 지민은 어리둥절한 태형의 어깨를 붙들고 뒤로 돌려 그의 등에 기대어 웃기 시작했다. 태형은 영문을 몰라 다시 정국을 보고 말 좀 해줘, 왜 웃어? 하고 말했다. 정국이 아무렇지 않게 개구리 다시 잡았어? 하고 묻자 태형이 아니이…. 복도 끝 창문에서 개굴이가 뛰어내려서. 나도 뛰어내릴 순 없잖아, 하고 시무룩해 했고, 그 모습에 지민은 이번엔 아예 태형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웃었다. 정국이 저런, 안 됐네. 난 네가 뛰어내리면 어쩌나 했지, 하고 말하자 지민의 맑은 웃음소리가 더 커졌고 태형은 시무룩하게 으응, 그건 못했어, 하고 대답했다.
*
윤기는 요즘 퇴근이 늦었다. 퇴근이 늦은 일이야 이제 만성이 되어 정국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일에 중독된 사람처럼 늦게까지 야근을 하던 윤기였으니까. 그러나 요즘의 늦은 퇴근은 그 양상이 달랐다.
술이 세지도 않은 윤기가, 새벽 2시쯤이나 되어서야, 발그레해진 얼굴로 웃으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늦어서 미안해 정국아, 아직 안 잤어? 하고 웃으면서. 평소 잘 웃어주지도 않던 사람이.
처음 한 두 번은 정국도 그러려니 했다. 회식일 수도 있었으니까. 윤기가 아직 회사에서 높은 위치가 아니라는 건 덜 큰 저도 알 수 있었다. 술을 거절할 수 없으리란 것도. 하지만 지난 번 누군가 데려다줬을 때가 문제였다.
답지 않게 문을 딩동대며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에 설잠이 들었던 정국이 나와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처음 눈앞에 보인 건 처음 보는 남자였다. 그 밤의 어스름한 빛에도 눈에 뜨일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자. 그리고 문이 조금 더 열리자 그의 어깨에 기대어진 윤기가 보였다. 몸에 아예 힘이 들어가지 않은 채 윤기는 축 늘어져 있었다. 놀라서 동그래진 정국의 눈에 남자가 당황스러워 하며 웃었다.
“네가 정국이구나? 아하하, 안녕? 나는 윤기 친구야.”
“…안녕하세요.”
“어, 그래그래. 윤기 방 좀 알려줄래? 이제 진짜 무거워서 안 되겠거든.”
그 말을 들었는지 윤기가 감겨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자세를 바꿔 남자의 몸을 팔로 안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그에 정국의 눈이 크게 뜨이며 눈썹이 꿈틀, 하고 저도 모르게 움직였다.
“가게? 가지 마….”
웅얼대는 윤기의 목소리가 정국의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남자는 그런 윤기가 당황스러웠는지 정국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정국에겐 더 이상하게 보인다는 걸 남자는 그 당시 깨닫지 못했다.
“야, 내일 출근해야지!”
“으응, 가지 말라고….”
남자는 당황스러워할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보다 못한 정국이 윤기를 빼앗듯 제 품으로 데려왔고 그 거친 움직임에 남자가 조금 놀란 듯 정국을 바라봤다. 정국은 눈치를 보며 변명처럼 내뱉었다.
“대디가 많이 취한 것 같아요. 피곤하실 텐데 가보세요. 대디는 제가 볼게요.”
“…그럴래?”
숨기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나온 부루퉁한 정국의 목소리에 남자가 정국을 향해 웃었다. 그 웃음이 뭔갈 알겠다는 것 같아 정국은 괜히 기분이 나빴다.
“아저씨 이름 석진이야, 김석진.”
“…네.”
“다음부턴 아빠…가 아니라 대디 이렇게까지 마시게 안 할게. 미안해, 정국아.”
“…….”
“그럼 아저씨 갈게. 정국이 안녕!”
“안녕히 가세요.”
싱글싱글 웃으며 사라진 석진이 정국은 괜히 더 기분이 나빴다. 마치 자신을 어린 아이 대하듯 타이르고 떠났다. 제가 한 행동이 석진의 눈엔 어린 아이가 아빠 빼앗길까봐 질투하는 행동처럼 보였나보다.
“하아.”
정국이 한숨을 뱉는다. 어린 애 질투 정도면 다행이게. 이미 중학교 시절에 윤기를 꿈에서 본 후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들춰보고 세상 최고 당황했던 정국은 이미 제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입 밖으로 뱉기엔, 뱉는다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인지, 그 한 번의 고백이 무엇을 불러올지, 정국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
제 어깨에 기댄 윤기의 머리통을 바라본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윤기의 머리통이 제 시선 밑에 있었다. 그에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려던 차, 윤기의 다리가 훅 꺾여 쓰러지는 것을 정국이 깜짝 놀라 허리를 잡아 간신히 받아낸다. 놀란 가슴을 안고 윤기의 잠이 든 숨소리를 확인한 정국이 결국 한숨을 쉬며 윤기를 안아들었다.
그를 침대에 눕히고 불편할 옷들을 대충 벗겨놓은 정국이 가슴께까지 이불을 덮어놓는다. 자는 얼굴이 너무나 평안해서 정국은 그것이 오늘 밤 되레 속이 꼬였다.
“잘 자네. 아무것도 모르고.”
작게 말하는 제 목소리도 피곤에 잠겨있었다. 이제는 정국도 마음 놓고 잠들 수 있는 시간이었다. 윤기의 방의 문을 닫기 전 한 번 더 뒤돌아 본 정국은 고요한 윤기의 방을 확인하곤 조용히 방문을 닫아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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