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섬 같은 나도
[국뷔] 늦게 피는 꽃 06. 본문
[국뷔] 늦게 피는 꽃 06.
w.몽블랑
*
늦은 밤, 태황태후의 곁으로 은밀하게 다가온 무녀가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가 태황태후의 가까이로 다가갔지만 주위엔 태황태후의 심복뿐 아무도 없었으며, 심복 또한 그녀가 태황태후의 귓속말을 속삭일 만큼 가까이 다가가도 막지 않았다. 오히려 주위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두리번거리며 경계를 세웠다.
무녀가 태황태후에게 무어라 중얼거리자 태황태후의 낯빛이 잿빛으로 변했다. 놀란 듯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던 태황태후는 간신히 그리고 어렵게 말을 뱉는다.
“…어쩌면 좋겠느냐. 막을 수 있느냐.”
“마마, 이런 일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정해준 운명이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닌지라….”
“그러면 어찌해야 좋단 말이냐. 방법이 없다는 말을 할 거라면 내 가만두지 않겠다.”
“방법이란… 단 하나뿐이지요.”
무녀의 초점을 잃은 뿌연 눈이 깊은 밤의 어둠속에서 일순간 빛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날카로웠다. 마치 살인모의라도 짜고 있는 듯한 기괴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늦은 밤까지, 세 사람의 밀회는 꽤나 오래 계속되었다.
*
남사당패의 모든 일원이 궁의 한 중간에 도열하여 엎드렸다. 태자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엎드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다음 날 길을 떠나려 모든 짐을 챙긴 것을, 운이 좋게도 남준이 태자의 명이라며 궁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앞으로 한 달 간 궁에 머물며 궁의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연회를 기획해 보도록 하라!”
“예, 전하!”
땅에 닿을 듯 고개를 숙이는 그들을 태자의 곁에서 바라보며, 남준은 그들을 찾으러 갔던 사흘 전을 떠올렸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 다들 모르는 사람의 등장에 의아한 얼굴로 남준을 쳐다보았고, 남준이 태자의 명이라며 궁으로 오라 하자 그들은 헛웃음을 지으며 남준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아니 사지 멀쩡한 양반이 왜 그러신대?’
‘태자는 뭔 태자요? 태자가 우리 같은 천인 중에 상천인을 왜 궁으로 부른단 말요? 아님, 이름이 태자인 양반집 자식도 있던가?’
‘아이 이 사람아 진짜 그런 양반집 자식이 있음 어째? 터진 주둥이라고 미친소리하다간 곰방 저승에서 주둥이 나불댈 줄 알아.’
‘저이는 성이 급해서 아직 향불도 안 올렸는데 벌써 저 뒈진 줄 알고 병풍 뒤에서 나불댈지도 모르지.’
남사당패거리들은 저들끼리 우스갯소리를 하며 낄낄거렸다. 남준의 말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태자를 모신다기엔 한참은 어린 남준의 얼굴도 믿기 힘들게 만들긴 마찬가지였다. 한참을 기다려도 꿈쩍하지 않는 그들에게 남준은 유한 얼굴로 말했다.
‘믿기지 않으면 오지 않아도 좋다. 다만 오늘 가지 않는다면 내일은 오랏줄을 받고 금군 손에 손발이 묶여 질질 끌려올 테니, 알아서들 하거라. 선택은 너희들 손에 있다.’
남준의 말에 다들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얼굴은 어려도 남준의 복장이, 꽤나 그럴 듯한 무인의 복장이었기 때문이다. 연극을 하며 이런저런 복식을 만드는 그들이었기에 그 정도 눈썰미는 있었다. 저렇게까지 나오는 것을 보니 진짜인가, 싶어지는 것이었다.
결국 아까부터 하나도 웃지 않고 곰방대를 피우며 남준을 지켜보던 꼭두쇠가 곰방대의 재를 바닥에 떨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준과 눈을 맞추던 그는, 시선은 남준에게 고정한 채 밖에 있는 누군가에게 소리쳐 말했다.
‘정국아! 옷 짐 풀어놔라. 오랜만에 골치 아프게 궁 구경 가야 쓰겄다!’
‘예엡!’
천막 밖에서 어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남준은 그제야 빙긋이 웃었다. 꼭두쇠는 남준의 미소를 보고 등을 돌려버렸다.
*
앞으로 남사당패가 머무는 한 달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연회를 열 예정이었다. 그 연회에는 사대문 안팎의 많은 어려운 백성들을 불러오는 자리도 있었으며, 궁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한 행사도 있었고, 왕족을 위한 행사도 있었다. 궁 전체를 떠나 한양이내가 모두 들썩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들썩거림이 궁의 구석에 자리한 만화전까지 느껴졌다.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궁내에 활기가 돈다는 것 정도는 태형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만화전과 그 근방만을 돌아다니는 태형에게는 별로 관련 없는 일처럼도 느껴졌다.
태자가 찾지 않는 태자의 후궁전에, 누구의 발걸음이 닿는단 말인가. 태형은 입가로 쓴웃음이 맴돈다.
지난 번 태자가 잠을 설치는 것을 본 이후로, 태형은 태자가 자신을 찾지 않는 것이 마치 제 탓처럼 느껴졌다. 자신 때문에 그런 꿈을 꾼 것은 아닐 테지만, 그를 제대로 위로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태자는 자신을 찾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보면 그날이 또 생각날 테니까. 어쩌면, 그런 모습을 제게 들켜서 기분이 나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태자가 자신을 찾지 않는 이유를 고르고자 하면 이유는 많았다. 태형이 열 가지를 찾으면 열 가지만큼 있었다. 그리고 그 열 가지는 태형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으며 계속해서 괴롭혔다.
그러나 태자의 발걸음을 돌릴 재주는 지니지 못한 터라, 태형은 그저 그 시리고 외진 궁에서 태자를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사람이 찾아오길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남준이 찾아오고 나서야 태형은 궁내를 떠들썩하게 만든 행사가 바로 남사당패의 방문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사당패…?’ 태형이 조용하게 입술 사이로 발음해 본다. 세간에 대해 무지한 자신이나, 남사당패라면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아…!”
“…? 왜 그러십니까.”
“혹시 남사당패에 정국이란 아이가 있습니까.”
남준은 글쎄요, 하는 말밖엔 할 수 없었다. 그 패거리의 이름 하나하나를 알고 있지는 못했다. 꼭두쇠의 이름조차 얼핏 스치듯 들은 판에. 정국? 정국…? 곰곰이 생각해보던 남준의 머리로 다른 의문이 스쳤다. 태형은, 18년을 사가에 갇혀 살았던 사람이다. 문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던 사람이 어찌하여 저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마마께서는 그 아이를 어찌 아시는지.”
“…….”
태형은 말이 없었다. 남준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남준은 그것이 묘하게 불안했다. 태형이 다른 사람과 연을 맺을 수 있는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닌데다, 남준이 아는 태자의 소유욕이란 대단해서 감히 태형이 다른 누군가에게 아는 척 하는 것을 곱게 볼 성격이 아니었다. 궁으로 들어온 태형이 태자만을 바라봤던 만큼, 더더욱 그러했다.
“…마마?”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
끝까지 숨기는 태형이라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태형은 제 붉은 댕기만 만지작거렸다. 남준은 자꾸만 피어오르는 불안한 마음을 억지로 달랬다. 평소 만화전에 들르면 태형을 위로하고 가던 터라 마음이 무거웠는데, 오늘 만화전을 나서는 발걸음은 불안한 예감으로 뒤죽박죽이었다. 마치,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만 같았다.
*
첫 번째 연회였다. 이번 연회는 태황태후와 태자, 그리고 조정의 관리들이 참석하는 연회로, 태형 또한 연회에 참석하라는 명이 내려와 준비된 좌석에 앉았으나 태자는 태형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다만 무거운 표정으로 제 앞에 놓인 술을 들이킬 뿐이었다. 태형은 그런 태자에게 차마 시선조차 함부로 보일 수 없었다. 그저 태자의 표정이 즐거운 연회일마저 좋지 않아 보여 태형은 마음이 무거웠다.
해가 지고 난 뒤, 연회는 남사당패의 춤으로 시작되었다.
둥둥, 둥둥. 북이 울리고 무대가 시작됨을 알렸다. 횃불이 너울거리는 무대가 비워지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고 숨조차 죽였다.
스르르, 달빛이 미끄러지듯 무대에 나타난 여인은 가면을 쓴 채 옅은 빛의 나풀거리는 천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움직임이 크지 않았다. 물 흐르듯 연결되는 몸동작에 그녀의 옷이 하늘거렸다. 그녀의 춤의 의미를 다들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가면 아래의 표정은 왠지 알 것도 같았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무언가를 바라는 듯, 하지만 그것조차 제대로 알 수 없도록 조심스럽게 이어지는 동작들에 모두 무희의 손끝과 발끝을 바라보며 온 넋을 놓았다.
무대의 다른 끝에서 남자가 나타났다. 그 또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움직임이 여인과는 달랐다. 여인의 것보다 두꺼운 천자락이 무게감을 나타내며 그가 움직임에 따라 때로는 촤락, 하고 펴지며 그의 동선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여인이 강약 조절을 이용해 부드러움을 자아내고 있다면, 그는 강약 조절을 통해 여인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굳건함과 변치 않음을 알렸다.
여인과 남자는 어우러져 춤을 췄다. 서로 닿지 않으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시선을 놓지 않았다. 서로의 시선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두 사람이 넓은 무대를 원을 그리며 돌면서 북소리와 어우러져 소리가 고조되었고, 여인은 남자와 단 한 번의 손끝의 스침을 끝으로, 무대에서 나비처럼 사라져 버렸다.
홀로 남겨진 남자는 춤을 췄다. 가면 밑의 얼굴이 울고 있을 것만 같은 무거운 슬픔의 춤을 췄다가, 모든 것을 산화시킬 사람처럼 격정적인 춤을 췄다가, 다시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정지에 가까운 느릿한 움직임을 했다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남자가 바닥으로 쓰러지자 몇몇 사람들의 입에서 흡,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손을 달을 향해 뻗으며 북소리가 드르륵 딱, 하고 멈췄다.
“…….”
숨 막히는 적막 후에,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무대 아래로 내려갔던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고 무대로 올라와 다시 사람들을 향해 인사했다. 모두의 웃음과 찬사 속에 다시 신나는 북소리가 연회의 분위기를 달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무대로 올라와 춤을 추기 시작하고 신명나는 분위기 속에서, 관객석의 누군가가 나비처럼 소리 없이 자신의 자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
“…흡, 흐윽….”
왜 우는지 모르겠다. 태형은 제 자신의 눈에서 터진 눈물의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춤을 보았고, 감동했으면 끝날 일인 것을, 어쩐지 춤이 끝나자마자 태형은 제 입을 막고 터지려는 울음을 억지로 눌러야 했다.
다른 사람들의 흥을 깰까 싶어 태형은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 만화전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궁의 구석으로 가는 동안 그 많던 궁의 사람들이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아마 모두들 연회장에서 모여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울고 있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해서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만화전의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은 채 태형은 그 자리에 주르륵 주저앉아버렸다. 이를 악물어 보아도 울음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나갔다. 참을 수가 없었다. 왜 가슴이 이렇게 아플까. 태형은 주먹을 쥐고 제 가슴께를 쿵쿵 두드렸다.
“…아파, 아파…. 흐윽, 너무 아파….”
“하지 마.”
갑자기 다가온 목소리에 태형이 흡, 하고 놀란 숨을 들이켰다. 달빛이 뜬 하늘을 등에 진 채 누군가가 제 앞에 서 있었다. 의상을 보아하니 아까 춤을 추던 남자였다. 가면조차 벗지 않은 채 태형을 따라왔다. 그러나 태형은 이상하게도 이 사람이 무섭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건넨 하지 말란 말이, 가슴을 치던 손을 가볍게 막은 이 손이 익숙했다. 이 굳은살이 박힌 남사당패 일원의 손이, 너무나 익숙했다.
“그렇게 때리면 아프잖아.”
“…….”
“태형아.”
남자가 가면을 벗었다. 커다랗게 뜨인 태형의 눈망울에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그런 태형의 눈을 마주친 채 싱긋 웃었다.
“만나자마자 울고 있으면 어떡해. 마음 아프게….”
정국이었다. 달빛보다 환한 그 얼굴은, 틀림없는 정국이었다.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던 태형은, 결국 그의 얼굴조차 흐려질 정도로 넘쳐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무너뜨리며 울기 시작했다.
“…흐으, 흐윽, ㅈ… 정ㄱ….”
“응, 나야.”
“정국아, 정국아… 흐으아, 정국아아….”
정국에게 손을 뻗자 정국은 당연스럽게도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태형의 팔을 제 어깨 위에 얹은 채 태형의 허리를 깊숙이 안아주었다. 많이 보고 싶었어. 정국의 말이 귓가를 울리고, 태형은 대답 대신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정국은 다 안다는 듯 태형의 등을 토닥였다. 파묻힌 정국의 품이 따뜻했다. 태형은 그의 품에서 마음껏 울음을 쏟아냈다.
그렇게도 그리던, 첫 연심을 가져간 붉은 실의 인연을 지닌 이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태형의 앞에 서 있었다.
*
+)
전편에 댓글 남겨주신 체리쉬님 감사합니다 ^ㅁ^♥
분명 미리미리 수정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욕볼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미루는 이유는! 제가 바로 그 유명한 게으름뱅이이기 때문입니다! (당당)
+ 집 나간 하뜌를 찾스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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