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섬 같은 나도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06. 본문

국슙 외 : 화무십일홍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06.

몽블랑11 2017. 3. 18. 17:16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06.

w.몽블랑




*



입궁하는 박 대감의 발걸음이 거칠었다. 그는 곧바로 교태전으로 향했다. 이번 지민의 주기에 정국이 교태전을 찾지 않았다 하였다. 어의와 호위가 꽤나 왕에게 강력하게 얘기했던 것 같았으나, 정국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고.



중전의 아비로서, 그리고 이 나라의 중신으로서 자존심도 상했고 속도 상했다.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불편한 얼굴로 교태전에 들자 박 대감이 올 줄 몰랐던 지민이 놀란 얼굴로 그를 맞았다. 아버지, 하고 부르는 지민과 고개를 숙이는 태형을 포함해 올리는 인사를 모두 무시한 박 대감은 지민을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뱉었다.



“중전마마, 잠깐 저와 하실 이야기가 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네….”



방에 들어가자 침통한 얼굴의 박 대감이 지민을 바라보았다. 지민은 제가 무언가라도 잘못한 것 같은 느낌에 쭈뼛대며 자리에 앉았다. 박 대감은 말을 돌려할까, 하다 이내 가족끼리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어 직선적으로 말을 내었다. 어쩌면 말을 돌려할 여유가 없는지도 몰랐다.



“이번 마마의 주기에 전하께서 교태전을 찾지 않으셨다 들었습니다. 전하와의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 겁니까.”

“…….”



지민은 죄없는 입술만 물어뜯었다. 예전부터 정국과의 사이에 미묘한 거리감은 느끼고 있었으나, 이렇듯 정국이 누구나의 눈에도 보일 만큼 저를 내친 적은 처음이라 지민 또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부덕한 제 탓입니다.”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제 탓이었으며, 두 번째 들었던 생각도 제 탓이었다. 무언가를 잘못한 게 아닐까. 이제 찾지 아니할 정도로 제가 어여쁘지 않은 걸까. 아니면 이제 제게 질려버리셨는가. 생각할수록 답은 나올 생각이 없었고 지민의 기분만 우울해졌다.



정국은 지민을 찾지 않았고, 지민은 정국이 찾지 않으면 그를 감히 보러 갈 수 없었다. 아예 그러지 못할 것은 아니었으나, 지민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 자신을 찾지 않는 주상을 보러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박 대감은 답답한 말만 꺼내놓고 입을 꾹 다문 지민을 질책하듯 말했다.



“뭐라 말씀을 해보십시오, 마마.”

“…….”

“하… 참.”



박 대감은 어두운 낯빛의 지민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렇게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으니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게 아닌가. 지민이 이렇게 어두워진 것이 벌써 언제부터인지 몰랐다. 져버린 꽃처럼 시들시들한 사람을, 누구도 보고 싶어 할 리 없었다. 하물며 그것이 이 나라를 손에 쥔 사람이 무엇이 아쉬워서 그런 이를 찾겠는가.



“…….”



지민은 입술을 깨물고 제 치마를 꽉 쥐었다. 박 대감의 표정에서 차마 입으로 뱉지 않는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모두 다, 지민 스스로도 생각했던 것들이었다. 스스로 생각하며 혼자 눈물짓던 생각들을, 제 아비에게서 확인받는 것 같아 참담했다. 깊은 한숨을 내쉰 박 대감은 회유하듯 지민을 다독였다.



“음인의 몸으로도 가문을 일으켜 세우실 수 있습니다. 마마께선 다른 누구도 아닌, 중전마마시지 않습니까.”

“…예.”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그리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허나 주상 전하와의 관계는 원만하셔야 합니다. 그분은 주상이시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중전마마께서도 그간 여러 번… 봐 오셨을 테지요.”

“…….”

“집안 식구들을, 특히 대군마마의 일신을 생각하십시오. 마마께선 더 이상 혼자가 아니십니다.”



지민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었다. 떨고 있는 지민을 바라보며 박 대감은 쐐기를 박았다. 마마의 어깨에 많은 것들이 달려 있습니다. 높이 날수록 추락도 빠른 법입니다. 부디, 현명한 처사를 부탁드립니다. 아버지의 낮고도 엄한 목소리에 지민은 고개만 끄덕였다. 일어나서 그런 지민을 내려다보던 아버지는 이내 교태전을 나섰다.



중전인 자신과 영의정인 아버지, 그리고 대군인 자신의 아이. 세 사람은 얼마나 높이 날고 있는 새란 말인가. 그 새의 추락은 얼마나 참혹하고 비참할 것인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지민이 태형의 걱정스러운 눈동자에 담겼다. 차마 태형은 그에게 손을 뻗어 위로할 수 없었다.



*



이조정랑 김윤기를 들라하라, 는 정국의 명을 받은 윤기가 대전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언제나와 같은 표정으로 당당하게 대전으로 들어오는 하얀 얼굴은, 저와 마주해도 참으로 변함이 없어 정국은 속으로 웃음 섞인 감탄을 삼켰다. 어찌 이리도 뻔뻔하단 말인가. 지난번의 밀회 같은 건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무덤덤한 얼굴이 정국의 흥미를 끌어올렸다.



“신 이조정랑 김윤기,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몸은 괜찮은가.”



난데없이 날아온 정국의 질문에 윤기가 몸을 굳혔다. …예, 걱정해주신 덕분에. 한 박자 쉬고 덤덤한 윤기의 목소리가 들려와 정국은 속으로 웃고 말았다. 윤기를 당황하는 게, 저 덤덤한 얼굴이 순간적으로 무너지는 걸 보는 게 즐겁기 그지없었다. 정국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 즐거움이 도를 넘었다. 그래서 멈출 수 없었다.



“무탈하여 다행이군. 그날 굉장히 무리했다 생각하여 신경이 쓰였네.”

“…황송합니다.”



환관들이 두 사람을 보며 알 수 없는 눈짓을 교환했다. 저것이 무슨 말인가. 두 사람이 무슨 접점이 있었지. 어리둥절한 눈빛이었다. 그들의 눈길 교환에 정국은 그건 그렇고, 하고 맥을 끊어냈다. 벌써부터 궁인들의 관심을 모아서 이 즐거운 놀이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지난번의 일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게 많아 할 이야기가 있으니, 후원이라도 나와 함께 돌지 않겠소.”



윤기는 거절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왕에게 불려서 이곳까지 온 것이기에. 윤기와 자신을 뒤따라오는 환관을 자신에게서 열 보 이상 떨어뜨린 정국은, 막상 후원으로 나오자 한동안 말이 없었다. 윤기는 정국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할 말이 많을 터인데, 말이 없는 것이 윤기에겐 오히려 더 이상했다. 연못가에 서서 꽤 오래 간 수면을 바라보던 정국이 툭 던지듯 입을 열었다.



“그땐 왜 그 자리에 있었던 거지.”

“어디를 말씀이십니까.”

“내 침소 말이오.”



정국이 윤기를 향해 몸을 돌렸다. 지금까지의 얼굴과는 달리 정국의 표정은 꽤 날카로웠다.



“그곳은 함부로 누가 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지. 설마 그게 이 나라의 관리라도. 하물며 정무가 끝난 그 심야에, 나의 침소에, 그것도… 주기 중의 음인이.”



그 자리에 있다는 건, 누가 들어도 수상하지 않겠소. 정국이 픽 웃었다. 참으로 뻔히 보이는 수였다.



“몸을 팔아 왕의 관심을 사겠다는 게 아니고서야.”



앞에 있는 윤기가 목적을 가지고 다가온 거라면, 정국은 그 목적을 알아야 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제게 무언가를 원하며 다가오므로, 윤기의 행동쯤이야 깜찍하게까지 느껴지는 정국이었다. 본능을 이용해 자신을 내던진 윤기는, 차라리 솔직한 편에 가까웠다.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시오. 응?”

“…….”

“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나랏일에 뛰어들지 않았고, 형은 예조의 말단 관리라지. 예조, 나쁘지 않지만 이조정랑에 비하겠나. 결국 집안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 그대인데, 음인이라니. 그것도 남자 음인이라니. 이거야 말로 다 된 밥에 재 뿌린 게 아니고 무엇인가.”

“…….”

“그대가 음인이라는 것은, 집안사람들은 모두 아시는가? 남자로 태어났으나 양인에게 안겨야 후사를 볼 수 있는 몸이라는 것을.”



…하긴, 발현도 했을 테고 주기도 있었을 테니 숨길 수가 없었겠지. 안 그런가. 정국이 비웃음과 함께 떠보듯 윤기에게 물었다. 윤기는 말이 없었다. 윤기가 입을 다문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국의 얼굴이 굳어졌다. 형부에 넘겨 의자에 묶어놓고 주리를 틀면 빨리 입을 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정국은 이내 마음을 접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설사 그렇게 한다 해도 그리 쉽게 입을 열 것 같지도 않았다. 정국은 답답한 마음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내게 무엇을 원하느냐 물었다. 왕의 침소에 침입한 죄는 반역에 해당하는 큰 죄이니라. 무엇을 위해 그 자리에 머물렀느냐.”

“…말씀 드리면, 제게 주시겠습니까.”



윤기가 정국과 시선을 맞춰왔다. 감히, 하고 생각하면서 정국은 말없이 대답을 기다렸다. 저 입에서 튀어나올 대답이 궁금했다.



“전하의 마음을 원합니다.”



윤기의 눈이 말갛게 빛났다. 순한 눈매가 정국을 곧게 향했다. 정국은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그러나 순식간이었다. 굳었던 표정은 어느 새 윤기를 향한 비웃음으로 탈바꿈한 지 오래였다.



“안타깝지만 이미 중전자리는 주인이 있네. 그보다 후궁은 어떠한가. 내 매일 밤 찾아가주지, 그대가 원한다면.”



어차피 양인을 받기 위한 몸이 아닌가. 정국의 말에 윤기가 픽 웃었다.



“몸으로 나눌 수 있는 정은 전하의 지척에 널려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어찌 만족하라 하십니까. 몸이야 늙어지면 그만이지요. 또한, 이미 중전자리에 주인이 있다 하시는 전하이신데 어찌 제가 전하의 마음을 얻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그 말은, 중전을 내치고 그 자리에 올라앉고 싶다는 이야기인가.”



정국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감히 제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었다. 지민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이는 왕의 권위에 관한 것이었다. 윤기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그것이 아닙니다, 하고 말했다.



“중전이든 후궁이든, 제겐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

“제게 중요한 것은, 전하의 마음이지요.”



윤기가 두어 발짝, 걸음을 옮겼다. 연못가에 지어진 정자의 기둥 뒤로 두 사람의 모습이 가려졌다. 윤기는 정국의 품에 더 가까이 기대어 섰다. 윤기의 향이 훅, 가까워졌다. 평소에도 윤기의 몸에선 은은한 향이 흘렀다. 그것은 정국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서로만이 알 수 있었다. 윤기는 정국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제게, 주시겠습니까. 전하의 마음.”



정국은 말이 없었다. 다만 윤기의 뒷머리를 잡아채어 윤기를 집어 삼키듯 입 맞췄다. 윤기는 그에 맞추어 스르륵 눈을 감았다. 저를 압도하는 왕의 소유욕에 윤기는 나른한 신음을 울렸다. 그러나 윤기를 감싼 여유로움과는 반대로, 하얀 손에 쥔 곤룡포가 조금씩 떨리는 것은 정국도 윤기도,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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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올리고 감니다 ㅠㅠ 하뜌 눌러주신 분들, 막드와 화무십일홍 전편에 댓글 달아주신 한유야님 감사드립니다♥ 대댓은 오늘은 조금 이따가 달게요! 오늘 안으로, 아마도 금방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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