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섬 같은 나도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04. 본문
※ 추천 BGM : Max Richter - Path 5 (delta)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04.
w.몽블랑
*
그날 밤, 홀린 듯 윤기를 제 침소로 끌어들인 정국은 제 자신조차 그날 밤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정국이 단편적으로 드문드문 기억하는 것은, 칼같이 단정했던 대전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새하얗게 흐트러져 가쁜 숨을 내쉬던 윤기와, 그를 도망가지 못하게 꽉 붙들고 미친 사람처럼 거친 움직임을 반복하던 자신, 그리고 그 품안에서 벗어날 생각도 못한 채 정국에 맞춰 흔들리다 이내 허리와 허벅지를 떨며 무너지던 윤기, 정도였다. 기억들이 연속되지 않은 채 편린처럼 머릿속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었다.
정국에게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향이었다. 아니, 그보다 꽃향기나 과일의 향, 그 무엇도 아닌 그 새벽의 공기 같은 향이 이렇게까지 제게 자극적일 줄 생각도 못했다. 그 축축하면서도 상쾌하고 어슴푸레한 향은 조금의 이질감도 없이 자신을 흔들고 어지럽혀 놨다.
진짜 새벽이 오고, 눈을 떴을 때 이미 비어버린 옆자리를 확인한 정국은,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제야 제가 주기라던 지민에게 찾아가지 않았던 것이 생각이 났다. 그제서야.
정국은 그 밤 내내, 한순간도 지민이 떠오르지 않았었다. 그것이 미안하기는 했으나, 별다른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
문을 툭툭 하고, 힘없이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가 새벽녘에 장난을 치는가 싶어서 눈을 떴던 석진은 작게 저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에 잠에 취한 몸을 이불 속에서 억지로 일으켰다. 누구냐…. 석진이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장지문을 열어젖히자, 문 앞에 쓰러져 있는 인영이 보였다. 석진은 단박에 그것이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윤기야…!”
다급히 윤기에게로 다가가 그를 안아 올린 석진은 차마 큰소리는 내지 못하고 주위의 눈치를 보며 그를 방안으로 들였다.
옷을 어떤 상태에서 입은 건지 몰라도, 옷을 여미는 매듭들이 제대로 끼워져 있지 않거나 제자리와 다른 곳에 끼워져 있었다. 그 때문에 옷은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져 있었고, 어디서 여러 번 넘어진 건지 무릎과 버선은 흙투성이였다. 손 또한 여러 군데 까져 쓰라릴 법한데도, 윤기의 얼굴엔 헤실한 힘 빠진 미소가 감돌았다.
“너 이게 도대체…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형… 혀엉….”
“응, 윤기야. 나 여기 있다.”
석진이 윤기의 손을 잡아주었다. 윤기도 석진의 손을 잡으려 애쓰는 듯 했지만, 손은 덜덜 떨릴 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아 금방 포기한다. 이런데도 윤기의 눈은 이상하리만치 빛났다. 재미있다는 얼굴로 여전히 웃으며 석진에게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내가 이번에, 약을 먹지 않았어….”
약…? 잠시 생각하던 석진의 낯빛이 흙색이 되었다. 어쩌려고. 어쩌자고! 안타까운 얼굴로 윤기의 팔을 부여잡는 석진과는 달리, 여전히 윤기는 미소를 띤 채였다.
“미친 사람 같았어. 둘 다….”
“둘? 둘이라니…? 약도 먹지 않고 누굴 만난 거야, 응?”
“몸이 동하는 게, 나에게까지 느껴졌어.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피식, 새는 듯한 웃음이 윤기의 입술 사이로 흘렀다. 당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윤기를, 석진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달빛에 홀려온 사람처럼 크지 않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제게 무언가를 말하는데, 그것은 모두 석진이 원하는 정보와는 동떨어진 뜬구름 잡는 말투성이였다.
“윤기야, 도대체 네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누가 이런 거니.”
석진의 물음에 입꼬리에 걸려있던 윤기의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그리고 눈동자를 움직여 석진과 눈을 맞춘 윤기는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힘을 주어 대답했다.
“형은 알면 안 돼. 절대로.”
“…네가 위험할 것 같아 그러는 거야.”
윤기는 석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위험해.”
“…그럼,”
“그래서 안 돼.”
석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윤기는 제게 보이는 석진의 어두운 표정이 싫었다. 그는 표정 하나만으로 자신의 기분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이 세상 단 한 명의 사람이었다. 윤기는 그런 석진의 어깨를 간신히 붙든 채 말했다.
“…그런 표정 하지 마.”
“…….”
“입 맞춰 줘. 응?”
이럴 때 윤기는 항상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했다. 석진은 안타까운 표정을 하다 이내 윤기의 입술에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 떼려던 석진의 입술 사이를 가르고 윤기가 혀를 밀어 넣었다. 석진이 놀라는 게 느껴져 윤기는 불안함에 붙들고 있는 석진의 옷을 더 꽉 쥐었다. 그러나 이내 석진은 윤기보다 더 부드럽고 강하게 윤기의 혀를 감싸 안아왔다. 윤기는 그 안도감에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형이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냐.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자신을 토닥이는 석진의 목소리가 따뜻했다. 윤기는 그제야 생각했다. 언제부터 그랬는진 몰라도, 아마도 자신은 이미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게 맞는 것 같다고.
*
교태전의 금줄이 치워졌다. 그 소식을 들은 태형은 궁으로 곧장 달려왔고, 며칠 만에 모습을 드러낸 지민은 전보다 더 핼쑥해진 모습이었다. …마마, 하고 다가가자 지민이 태형을 향해 옅게 웃으며 오랜만이오, 하고 말했다.
보료에 누워 속이 비치는 얇은 저고리만 입은 것이 서늘해 보여 태형은 조심스레 지민이 덮은 이불을 그의 마른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어찌나 입술을 악 물었는지 보라색으로 멍이 든 입술과 대조되어 핏기를 잃은 지민의 얼굴이 참담했다.
이런 사람을 혼자 두고, 어떻게. 어떻게 그는 그럴 수가 있었을까.
“…….”
차마 입 밖으로 뱉지 못하는 말 대신 씁쓸한 얼굴로 말이 없던 태형은 잠시 후 ‘쉬십시오. 곧 미음이라도 지어 올리겠습니다.’ 하고 나가려 했다. 그때였다. 지민이 이불 밑에 덮여 있던 제 팔을 빼어 태형을 향해 뻗었다. 혼란스러워 하는 태형과 눈을 맞추며 지민은 부서질 것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손 좀… 잡아주시오.”
태형은 감히 손을 뻗어 잡을 수가 없었다. 지민과 닿아본 적 없는 것은 아니다. 곁에서 보필하며 지민을 부축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손을 잡는 건 무언가, 달랐다. 애절한 저 손 끝에 닿으면, 무언가 변할 것 같았다.
태형이 굳어서 머뭇거리자 지민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리고 다시 애원하듯 말했다.
“내가… 외로워서 그럽니다. 한 번만, …잡아주시오.”
“마마….”
“…제발….”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태형은 지민의 곁으로 다가갔다. 지민이 내민 손에 깍지를 꼈다. 지민의 손이 말도 안 되게 작고 하얗고 부드러웠다. 제 커다란 손으로 삼킬 듯 깍지를 낀 채, 엄지손가락으로 지민의 손 위를 둥글게 덧그린 태형이 지민의 손을 꽉 잡고,
“…호ㅇ, 읍…!”
입을 맞췄다.
촉촉한 태형의 혀가 마르고 부르튼 지민의 입술을 쓸어주다 부드럽게 밀고 들어오자, 지민은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깨닫자 급속도로 무서워졌다. 제 지아비는 이 나라의 군주였고, 제가 하고 있는 일은 그를 배신하는 일이었다. 법도 도덕도 그의 편에 설 수 없는 일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일이었다.
지민이 바들바들 떨었다. 태형은 지민의 손을 잡지 않은 손으로 떨고 있는 지민의 어깨를 꽉 잡고 그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입을 맞췄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제 체온이 익숙해질 때까지.
“…하아, 하아….”
태형이 입술을 떼자 지민은 급하게 모자란 숨을 들이켰다. 태형은 저를 바라보는 지민의 새까만 눈동자와 곧게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지민의 입술 가의 타액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닦아내며 억지로 미소를 띤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없던 일입니다. 잊을 것입니다. 마마께서도… 잊으시면 됩니다.”
“…….”
“아프지 마십시오, 마마. 몸도… 마음도.”
도포자락을 날리며 일어섰던 태형은 어느 새 문밖으로 사라졌다. 방에 혼자 남은 지민은 한참을 멍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 이내 억지로 눈을 감았다. 잊을 일이라 했다. 잊으면 된다 했으니, 그럴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 슬픈 얼굴로 제게 그런 말을 건넸는지는 몰라도, 잊어야 할 일이었다.
*
+)
늦어서 죄송해요 ㅠㅅㅠ 짧아서 죄송해요 ㅠㅅㅠ
우울함과 무기력을 달리고 있는 요즘이라 그래요... 금방 이겨낼 수 있으면 좋을텐데.
저 위의 추천 BGM은 정국이 혼자 브이앱 할 때던가? 그때 정국이가 자기 전에 듣는다고? 했던 음악이었는데, 듣다 보면 우주와 내가 하나되는 기분이고 몽환적이고 우울하고 좋습니다! 혼이 빠져나가는 느낌? ...같이 들어주세여 ^ㅁ^
하뜌 눌러주시는 분들 항상항상 감사합니당 ㅠㅅㅠ♥
다음엔 대디 국슙 편 외전으로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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