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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슙]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01. 본문

국슙 외 : 화무십일홍

[국슙]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01.

몽블랑11 2017. 2. 16. 16:58




[국슙]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01.

w.몽블랑




지민은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것은 태생부터 그러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난 사랑스러운 아이는 티 없이 하얗고 밝았다. 눈이 사르륵 접히며 꺄르륵, 하고 맑은 소리와 함께 아이가 웃을 때마다 집안의 모두가 아이를 따라 웃었다. 아이는 사랑받기 위해 별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이는 과한 사랑 속에서도 예쁘고 바르게 자라났다. 아이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이 커다란 애정이 분명 아이를 흔들고 망칠 수도 있다 생각하였으나, 아이는 그 모든 관심과 애정을 받기 위해 태어나기라도 한 듯 자신에게 뿌려지는 애정 어린 행동들에 대해 전혀 부담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상냥하고 곱게 답했다. 아이에겐 그 거대한 애정이 전혀 넘쳐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자란 지민이 혼기가 찼을 때쯤, 마침 전국엔 세자빈을 찾는 방이 뿌려졌다. 대대로 높은 관직에 있는 집안에 몇 없는 귀한 음인인 지민은 당연히 사람들에 의해 천거를 받았다.



어렵지 않게 마지막 3인까지 올라간 지민은 다른 이들과 함께 궁의 어르신인 대왕대비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다른 두 사람이 여자여서 그런지, 혼자 남자 음인인 지민은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인 세 사람을 바라보던 대왕대비는 세 사람에게 동시에 물었다.



“세자저하를 위해 너희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첫 번째 후보는 대를 이을 수 있는 세자라 답했다. 대왕대비는 그래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지, 하고 대답했다. 두 번째 후보는 세자가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되도록 평화로운 내전을 이끄는 것이라 답했다. 대왕대비는 그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란다, 해낼 수 있으면 좋겠구나, 하고 대답했다. 마지막 지민을 향해 대왕대비가 시선을 돌렸을 때 골똘히 생각하던 지민은 다소 엉뚱한 대답을 냈다.



“세자저하를 품어 드리는 일입니다.”

“…품어 드리는 일?”

“그렇습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슨 말이냐. 대왕대비는 다시 물었다. 지민은 긴장이 되는지 마른침을 삼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세자저하께서는 장차 왕이 되실 분입니다. 그 분의 자리는 세상 무엇보다 존귀하지만… 곁에 누군가를 쉽게 둘 수 없는 외로운 자리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분을 품어드리고 안아드리겠습니다. 저는 끝의 끝까지 그분의 편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이 쉴 수 있는 자리가 되겠습니다.”



지민의 대답을 들은 대왕대비는 쉬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래. 내 세자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을 물었으니 틀린 답변은 아니지…. 참으로 얕고도 깊은 답변이구나. 세자만을 생각하는 답변이나 세자 외엔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았어.”

“…….”

“그렇다면, 한 가지 더 묻겠다.”



너는 그 대가로 무엇을 바라느냐. 대왕대비의 질문에 지민은 예…? 하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가 급히 숙였다. 대가라니. 세상의 주인이 될 이에게 세자빈은 과연 대가를 바랄 수 있는 자리일까. 지민은 고개를 숙인 채 눈만 깜빡였다. 기다려도 답이 없자 대왕대비가 다시 물었다.



“설마 바라는 것이 없느냐.”

“…없습니다.”

“정녕?”



떠보는 듯한 대왕대비의 재질문에 지민은 다시 한 번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대왕대비는 지민의 답에 빙그레 웃었다.



“일방적인 것은 언젠가, 대가를 바라기 마련이란다.”

“…….”

“세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으니 그 또한 현명하게 헤쳐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따뜻하고도 무거운 목소리였다. 지민은 …예, 하고 허리를 숙였다. 다른 이들에게는 상냥한 답변을 건넸던 대왕대비가 제게는 전혀 자상하지 않은 대답과 함께 추가 질문까지 건넸던 것이 지민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굳은 표정으로 대왕대비전을 나가 궁의 한 곳에 마련된 제 방에 들어가자마자 지민은 쓰러지듯 주저앉아 울음을 쏟아냈다. 간택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에 돌아가서 보게 될 집안 어른들의 얼굴과 실망감이 무겁게 지민의 약하고 작은 몸을 짓눌렀다. 질책, 실망, 분노. 그런 것을 한 번도 받아보지 않았던 지민이었기에 그 모든 감정적 무게에 대한 면역이 없었다. 지민은 그 밤을 간간히 흐르는 눈물과 함께 뜬 눈으로 지새워야 했다.



그래서 중전으로 간택된 것이 자신이란 것도, 지민은 쉽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것이 기쁘다기보다는 도리어 궁이란 도대체 어떤 곳일까, 하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다. 집안 어른들의 축하에 지민은 처음으로 괴리감을 느끼며 화려한 가마에 태워진 채 입궐하게 되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겨울이었다.



*



“당신이 나의 빈입니까.”



제게 웃으며 하던 세자의 말에 지민은 얼굴이 발그레해져서 눈을 깜빡였다. 혼례식이 시작하기 전 눈에 꿀을 발라두어 하루 종일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지민을 위해, 미지근한 물을 손가락에 묻혀 조심스레 꿀을 지워주고 그날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보인 세자는, 아른아른한 촛불 사이로 그가 저를 향해 보인 미소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지민은 처음으로 누군가의 미소가 아름답다 느꼈다. 지금까지 지민에게 상대방의 미소는 당연한 것이었는데, 이 사람의 미소는 달랐다. 제 앞에 있는 것이 세상을 거머쥘 이의 웃음이란 세상 모두를 품을 수 있을 법한 것이었다.



“세자 저하십니까…?”



지민이 되묻는 목소리에 정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고운 이였다. 정국은 제 앞에 앉은 어리고 순한 세자빈을 바라보았다. 대왕대비가 말해준 그대로였다. 순하면서도 어리숙해 보이지 않았다. 촉촉하고 까만 눈동자가 정국을 향해 빛났다. 중전의 자리에 잘 어울릴 이였다.



‘간택된 세자빈은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세자를 생각할 사람입니다.’



세자만을 위한다. 그것은 세자인 정국에게 당연하면서도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정국의 주위엔 언제나 충(忠)을 맹세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실로 그렇지는 않았다. 그들은 충을 위하는 척 사리사욕을 채우려 했고, 자신의 눈에 들어 유명해지고 세력을 넓히고자 했다. 아버지와의 사이를 벌려놓고자 했고 정계의 신하들과의 사이도 벌려놓고자 했으며, 정국을 아예 모든 이들로부터 고립시켜 놓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저하와 백성을 위함이니…’

‘저의 충을 시험하지 말아주십시오, 저하.’

‘모두 저하를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하며 많은 말들을 쏟아내는 그들 사이에서, 정국은 한 번도 그들의 말을 믿은 적 없었다. 믿을 수 없었다.



과연 지민은 그를 해낼 수 있을까. 제 온전한 신뢰를 가져갈 수 있을까. 제게 쉴 그늘이 되어줄 수 있을까. 중전은 많은 것을 원하는 자리가 될 텐데, 그 무엇보다도 자신을 우위에 둘 수 있을까.



지민의 목과 머리를 무겁게 누르던 가채를 모두 내려준 정국은 지민의 뽀얗고 부드러운 볼을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고요히 자신을 바라보는 정국을 지민은 촛불에 일렁이는 눈으로 함께 응시했다. 그리고 부드럽게 제 뒷목을 감싸는 손길에 지민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세상에 태어나 경험하는 첫 입맞춤에 저도 모르게 세자의 옷을 부여잡은 지민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



서서히 입술을 떼자 정국을 바라보는 지민의 눈동자가 천천히 열렸다. 숨도 쉬지 못하고 정국의 품에 안겨 그의 눈을 마주보는 지민에게 정국은 한 번 더 웃어보였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같은 이였다. 그리고 그의 지아비는 자신이었다. 처음으로 생긴 제 사람이었다.



“…빈, 숨 쉬세요.”



정국이 지민의 코끝을 가볍게 톡 치며 말했다. 그 말에 지민은 다시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하아, 하고 숨을 내쉬고는 갈 곳 잃은 동공이 허공을 헤매자 정국은 그를 보고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옅은 미소를 담은 채 다시 지민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지민은 조금은 설프게 섞이는 혀에 작게 신음을 터뜨리며 다시 정국의 옷자락을 꾹 쥐고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온 세상을 가질 이 사람에게 제 모든 걸 바치고서라도, 사랑받고 싶다고.



*



과거에 합격하였다는 교지가 내려왔다. 식년시의 장원이었다. 집안의 경사였지만 잔치는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집안은 조용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고 밤이 늦은 시간, 과거에 합격한 주인공인 윤기는 자신의 아버지와 조용한 독대 중이었다.



“절에 갇혀 있듯 공부하더니 결국 해냈는데… 나는 네게 축하한다는 말을, 쉽게 건넬 수가 없구나.”

“…….”

“내가 뭐라 하든, 너는 네 갈 길을 가겠지.”



윤기를 앞에 둔 김 진사는 침통한 얼굴을 했다. 이제 윤기의 어깨에 얹힌 짐이 가시화되는 순간이었다. 그러한 순간에도 변화 없이 고요하기만 한 윤기의 표정이 김 진사에겐 가련하기만 했다.



윤기는 애정을 박탈당한 아이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절에서 천덕꾸러기 같이 자라던 것을, 김 진사가 수소문 끝에 찾아내어 집으로 데려와 양자로 삼은 것이었다.



“네 아버지의 복수를 갚아야 할 것은 나였는데, 결국 내 대에서 이루지 못하고 내가 할 일을 네게 미룬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구나.”

“…그 일이 어찌 아버님만의 일이겠습니까.”



윤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던 절에서 표정 없이 하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어린 아이를 봤을 때의 충격을, 김 진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아이가 윤기라는 말을 들었을 때 김 진사는 어린 윤기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미안하다고 말하며 아이를 수없이 쓰다듬었지만 아이는 표정 없는 조각 같았다. 아이를 그렇게 만든 건, 모두 윗대의 책임이었다. 아이는 죄가 없었다.



어찌 보면 그 아이를 데려와 복수의 화신으로 만든 것은 김 진사였다. 윤기가 어느 정도 머리가 컸을 때 모든 과거 이야기를 일러주고, 윤기에게 자신이 도모하는 일을 돕도록 했다. 그러나 김 진사는 시도했던 거사를 실패하고 말았고, 그 모든 진실은 윤기의 마음속에 앙금이 되어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하여 윤기의 과거 시험 합격 교지가 날아왔을 때 가장 가슴이 철렁했던 것은 김 진사였다. 모든 것이 실패하고 멈춘 줄 알았는데, 교지를 받는 윤기의 표정엔 날이 서 있었던 것이다.



“가끔은 생각한단다. 내가 너를 데려오지 않는 것이 맞는 일이었을까, 하고. 절에서 자유롭게 자랐으면… 이 모든 일을 몰랐다면….”

“어리석은 자에게 내려지는 천국은 진정한 천국이 아닐 겁니다. 언젠간 알게 되었을 일이라 생각하고요. …아버님의 탓은 아닙니다.”

“…하아….”



김 진사는 괴로운 듯 술을 들이부었다. 궁으로 들어가 과거지사를 밝히고 왕가(王家)를 처단하려 하는 일. 왕가를 적으로 두는 일이었기에, 이는 분명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끝은 죽음뿐인 일이었다. 그러나 막아도 막아지지 않을 것을 알기에, 김 진사에게 남은 것은 죄책감뿐이었다.



“네게는, 최대한 물려주지 않으려 했었다. …그것만은, 알아다오.”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너마저, 이런 길로 들게 해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윤기야….”



김 진사는 끝내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흘렸다. 윤기는 끝내 무너져 오열하는 김 진사를 뒤로 한 채 방을 나섰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자신도 김 진사도 잘 알고 있었기에 방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방문을 닫자 마당에 서 있는 석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그가, 바로 이 집안의 진짜 장남이었다. 



“윤기야, 달이 밝다.”

“…형.”



달을 바라보던 그는 윤기가 밖으로 나오자 윤기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윤기는 신을 신고 석진을 향해 다가갔다. 석진은 그런 윤기를 잠시 기다렸다. 그는 제게 걸어올 윤기가 조금은 서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윤기가 곁으로 다가오자 석진은 다정한 눈길로 말을 건넸다.



“네가 합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

“이제 궁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시작되는 거겠지.”



석진은 윤기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나는… 네 편이다.”



석진이 윤기를 향해 하얗게 웃었다. 하늘에 떠 있는 달처럼, 달밤에 흐드러지게 핀 배꽃처럼. 윤기는 그런 석진을 향해 빙긋이 웃었다가 다시 물었다.



“언제나처럼?”

“…그래. 언제나처럼.”



확신을 주는 석진의 한 마디. 어릴 때부터 그랬다. 석진을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윤기에겐 항상 석진이 있으면,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면 못할 것이 없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석진은 윤기의 세상의 전부였다.



*



+)

패기롭게 국민/진슙으로부터 시작해 봅니다. 끝과 시작이 달라지는 걸 바라봐 주세요. 화무십일홍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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