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섬 같은 나도
[국슙] DADDY 26. 본문
[국슙] DADDY 26.
w.몽블랑
*
해가 지고 있었다. 정국은 천천히 집으로 걸었다. 주황과 노랑빛으로 물드는 거리의 풍경을 바라봤다.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빴다. 그들을 의미 없이 응시하던 정국이 이내 다시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이 시간부터는 머릿속에 부유하는 생각이 많았다.
정국은 문득 자신이 윤기에게 부드럽게 끌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면 윤기는 사람을 홀리듯 하얀 달빛을 머금은 얼굴로 애가 닳은 표정을 한 채 매달려 왔지만 낮의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인 듯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되어도 괜찮은 걸까. 정국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괜찮고 말고는 더 이상 상관없었다. 그저 그렇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으니까.
정국은 멍하니 걷다가 이내 무릎에 뭔가 닿는 것을 느꼈다. 그게 쭈그려 앉아 있던 사람 머리인 것을 발견하고 죄송합니다, 하고 놀라며 사과했던 정국은, 고개도 들지 않고 땅에 무엇을 찾는지 손으로 군데군데 짚으며 ‘괜찮아요.’ 하고 말하는 조그마한 머리통이 어디서 많이 봤다는 것을 알아챘다.
땅바닥에서 무엇을 찾는 그를 잠시 지켜보던 정국은 자신도 땅바닥에서 무엇을 집어 들고는 그것을 빤히 바라보다 저기요, 하고 다시 한 번 그 사람을 불렀고, 그는 정국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
정국의 얼굴을 알아보고 작은 외마디 소리를 내며 제 모습을 황급히 정리하던 건,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민이었다.
*
태형의 말을 이미 들었던 터라 정국은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지민의 얼굴이 놀랍지는 않았다. 그보다 더 정국을 놀라게 했던 건 지민의 태도였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얘기나 하자는 정국의 말에 지민은 머뭇거리더니 결심한 듯 고개를 꾹 끄덕였다. 그리고는 정국과 함께 카페에 오면서도 불안한 얼굴로 제 손톱을 자꾸 물어뜯더니, 카페에서 다른 사람의 전화벨이라도 울릴라 치면 경기를 하듯 떨며 손에 꼭 쥔 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지민은 아까도 그랬고 카페에 들어와서도 자신의 핸드폰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이런 지민을, 정국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정국은 교복을 입었던 그때의 지민을 가만히 생각해 봤다. 말이 느리고 천성이 착했던 지민을. 눈을 곱게 휘며 푸스스 웃던 그때의 지민을. 이런 사람은 태형 같은 사람의 품에서 사랑만 받을 줄 알았다. 지금의 이런 모습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정국이 지민을 앞에 둔 채 말없이 눈만 굴리는 데도 지민은 불안함에 정국이 말이 없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핸드폰만 꾹 쥔 채.
“어디 연락 올 데 있어?”
“응? 어….”
“누구.”
“…….”
지민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그저 고개만 푹 숙였다. 정국은 제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돌렸다.
“아직 김태형이랑 사귀어?”
“태형이…? 아니, 이제 안 만나. …깨졌어.”
“헤어졌어? 아… 미안해, 몰랐어.”
“아냐. 우리 연락 안 한지 오래 됐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그럼 지금 누구랑 사귀는 중이야?”
“응… 사귀는 사람 있어.”
“그렇구나….”
지민의 음료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정국은 무언가 지민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었지만 지민에겐 그럴 여유가 없어 보였다. 저 전화라도 울리면 금방이라도 지민은 도망치듯 이 자리를 나가버릴 것 같았다. 정국은 노선을 바꾸기로 했다.
“혹시 핸드폰 번호 그대로야?”
“응? 번호…?”
머뭇거리던 지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바뀐 번호 찍어줘. 정국은 지민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지민은 정국의 핸드폰을 들고도 망설였다. 정국은 그런 지민을 바라봤고 지민은 고민 끝에 자신의 번호 열한자리를 찍어 정국에게 돌려주었다. 돌려주면서도 지민은 불안한 얼굴이었다.
“대신 절대 전화하면 안 돼.”
“…어?”
“이 번호로 전화…걸지 않아줬으면 좋겠어.”
“…그럼 문자는? 카톡은 돼?”
지민은 바로 대답을 못했다. 그때 지민의 손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지민은 정국이 뭐라 할 새도 없이 ‘미안해, 나 그만 가볼게. 미안해.’ 하며 카페에서 나가 버렸다. 정국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미 지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허무하게 테이블에 남은 건 정국과 아직 저장되지 않은 채 액정에 띄워진 지민의 번호와 식어버린 커피뿐이었다.
*
그가 잠든 깊은 밤, 지민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로등 빛이 드는 곳을 찾아 원룸의 구석에 자리한 창틀에 선 지민은 조심스레 제 주머니에서 종이 조각들을 꺼냈다. 아까 그가 홧김에 찢어서 바깥으로 날려버린 사진 조각들이었다. 지민은 조각이 하나라도 날아갈까, 자신의 기척에 그가 잠을 깰까, 숨을 죽이고 창틀에 붙어 서서 조각들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진이 거의 다 맞춰져 갈 무렵, 지민은 다시 한 번 제 주머니를 뒤졌다가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분명 거의 다 가져왔다고 생각했는데, 한 조각이 비었다.
지민은 사진을 쓰다듬다 결국 흐읍, 하고 울음을 비쳤다. 제 소리에 놀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지민이 눈을 돌려 자고 있는 그를 살폈다. 다행히도 그는 잠을 깨지 않은 듯 미동도 없었다. 그제야 소리 없이 숨을 내쉬는 지민의 어깨가 이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다 맞췄는데도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태형에 대한 물건이라고는 고작 사진 한 장뿐이었는데, 그 사진조차 정확히 태형의 얼굴이 담긴 한 조각이 비어버렸다.
지민은 사진을 눈높이까지 들어올렸다. 까맣게 막힌 사진에 텅 빈 조각만큼의 창문 밖 풍경이 보였다. 그 창문 밖 풍경은 달도 별도 없는 텅 빈 하늘이었다.
*
약혼녀, 라는 자리는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다. 지은은 그렇게 생각했다. 결혼이 원래 사람과 사람 간 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과 집안 간 하는 거라지만, 이렇게까지 져야 할 책임과 의무가 많은 자리인 줄은 처음 알았다. 그럼 상대자의 자리는 어떨까. 지은은 술에 취해 테이블에 엎드려 잠이 든 윤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당신은 편할까. 그러나 분명 그에게도 편한 것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윤기와의 결혼은 기업과 기업 간의 결합인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떠나, 먼저 지은은 한 회사의 대표이사였다. 아버지 회사의 그룹 중 하나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은 기업의 임원으로 회사를 대표하는 직업이었다. 아버지의 회사를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고, 당연히 그녀 또한 어릴 때부터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노출되며 살아야 했다.
그래서 지은은 함부로 이 결혼을 망쳐놓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자유를 포기한 채 모두의 이목을 받는 게 자신의 인생이라면, 모두의 눈에 띄지 않게 행복하게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소개팅 때 봤던 윤기는 자신의 파트너로 만족스러운 사람이었다. 말이 많지 않아도 자신에게 보이는 태도가 자상했고, 그룹의 임원 자리부터 맡지 않고 밑부터 차차 올라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단지 눈에 걸리는 것이라면, 그저 조금 외로워 보였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외로움이 윤기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이 제게도 보였다. 이기지도 못할 술을 억지로 쏟아 넣던 아까 전의 윤기가 꼭 그랬다. 제게 숨기려고 했지만 헛구역질까지도 하던 것을 들었다.
자신이 막을 수 있는 걸까. 막아야 하는 걸까. 지은은 와인 잔 너머 옅은 자주색으로 물든 세상 속 윤기를 응시했다. 윤기는 자는 중에도 편하지 못한 듯 인상을 쓰거나 손가락을 작게 움직였다.
지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와인 잔을 든 채 창가로 걸어갔다. 조금 서늘하다는 생각이 들어 로브를 조금 여몄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호텔 창문에 비친 야경이 화려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동화 같은 불빛들을 보며 지은은 멍하니 생각했다.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해 행복한 삶을 포기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은 평범하다며 만족할까 아니면 행복하고 싶어질까. …윤기는 제게, 어떤 삶을 줄까.
*
요즘 그런 꿈을 꿔. 정국이네 이모가 나와 정국이가 사귀는 걸 알게 되시는 거야. 그리고 너무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씀하셔. 내가 당신한테 속았다고. 멀쩡하게 키워놓은 줄 알았더니 도대체 어린 애를 꼬셔서 무슨 짓을 한 거냐고.
그러면 꿈속의 나는 그날을 생각해. 정국이를 처음 데려오던 날에 정국이 삼촌이 내게 했던 말. 더러운 새끼. 형도 모자라 정국이까지 호모 새끼로 만들려 하냐는 그말.
그땐 절대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그리고 꿈속의 나는 도망쳐. 모든 걸 다 버리고 도망쳐. 정국이도 다 버리고 나는 오직 살기 위해 도망쳐. 그러다 발이 닿지 않는 물속에 빠지거나 절벽에 떨어져. 그래도 나는 발버둥 쳐. 살려고. …살려고.
내가 살려고 모든 걸 버리고 도망쳐, 석진아.
내가 저지른 원죄로부터 도망치려고, 그래서 이 죄책감에서 벗어나 좀 살아보려고 내가, 정국이도 버리고 도망친다고.
*
+)
오늘 좀 글이 중구난방인 거 같은데... 막 시점도 왔다갔다 하고 막 얘기도 이 사람 얘기 저 사람 얘기 해서 막 그런 거 같아서 걱정입니다... 켛 ㅜㅜ
댓글 남겨주신 대디 파이팅님 감사합니다 ㅜㅜ 예쁜 댓글 백번천번 읽을거에여 어엉 ㅜㅜ 공감 하뜌 눌러주시는 분들도 제가 정말 백번천번 감사하다고 꼭꼭 알아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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