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섬 같은 나도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11. 본문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11.
w.몽블랑
*
정국은 어지러운 머리를 잠시 저었다. 요즘 들어 이런 일이 조금 잦았다. 뭉근하게 달아오른 체온과 머리가 무거운 느낌에 책상 위에 있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켰으나, 조금 맑아졌던 것 같던 시야는 이내 또 다시 부옇게 흐려졌다.
하아…. 한숨을 내쉰 제 숨이 뜨거웠다. 아무래도 무리한 모양이었다. 한숨 자고 나면 조금 괜찮아지겠지, 생각하여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던 정국은,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 꺼지는 의식을 잡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닥으로 빠르게 무너져 내리려는 정국을 곁에 있던 내시가 간신히 잡아채곤 그 무게에 저도 같이 주저앉은 채 당황해서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어의를 불러라! 어서!”
*
정국이 다시 눈을 떴을 땐 한밤중이었다. 주위엔 저를 지키는 궁녀 하나쯤 있을 법 했는데, 어지러운 시야에 들어온 그녀는 정국을 간호하다 잠이 들었는지 어느 의자에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잠이 드는 순간 놓치고 말았는지, 정국의 이마를 식혀주어야 할 물수건이 그녀의 치마 위에 떨어져 짙은 물자국을 남기고 있었으나, 그녀는 미동도 없이 고롱고롱한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정국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너도 피곤하겠지, 하는 생각에 다시 눈을 감았다. 괜히 정신을 깨어 소란을 부려 모든 이를 깨우는 것보다 다시 잠에 드는 게 나았다.
그러나 눈을 감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스르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참으로 조용하게 문을 열 줄 아는 이였다. 그가 문을 열고 닫아도 저쪽에서 잠이 든 궁녀는 숨소리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침실을 눈으로 살피더니 천천히 정국의 곁으로 다가왔다.
“…….”
그는 정국의 얼굴을 바라보는 듯 말이 없었다. 한참동안을 말없이 그는 정국의 곁에 앉아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던 정국은 그의 숨소리만으로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아니면 애초에 저를 깨우지 않을 작정으로 이곳에 왔는가. 정국은 기다리다 못해 슬며시 눈을 떴다. 그러나 제 생각에 빠진 그는 정국이 눈을 뜬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정국은 조금 심술이 나 침상에 놓인 그의 손을 빠르게 잡아챘다.
“…전하.”
“쉿.”
불시에 손을 잡힌 그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에 정국은 머리가 울려도 조금 웃고 싶어졌다. 예상치 못하게 불쑥 찾아온 것처럼 그는―윤기는, 제게 생각지 못한 즐거움을 줄 때가 있었다. 아파하면서도 입꼬리를 올린 정국을 본 윤기가 소리를 최대로 낮춰 정국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속삭였다.
“저를 놀래키셨습니다.”
“아무래도 여기 앉아 생각만 하다 갈 것 같아서. …그대로 가지 말라 붙잡은 것이다.”
“…….”
잠시 말이 없던 윤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십니까, 하고 말했다. 정국은 옅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잡고 있던 그의 손을 장난치듯 손가락으로 문질거리며 물었다.
“오늘은 어찌 나를 찾았는가. 내가 아프다고 찾아왔을 리는 없고, 찾지 않으면 오지 않던 자네인데. 어째서 이리 약해진 때, 나를 찾아왔는가.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오늘 대전에서 쓰러지셨다 들어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
정국이 덤덤하게 물었다.
“자넨 내가 아프다고 찾아올 만큼 날 연모하는 마음 같은 것 없지 않는가.”
윤기의 입이 말을 잇지 못한 채 벌어지지도 다물어지지도 못하고 굳어졌다. 저는…, 하고 말을 이어보려 했지만, 지금 당장 윤기의 머릿속에 이렇다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정국을 마주하며 이렇게 당황스러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정국과의 만남에서 윤기의 예상을 크게 벗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가 원하는 대로 상황을 끌어왔고 정국은 윤기가 바라던 대로 끌려왔다. 그것을 정국이 알고 있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확인받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윤기의 표정이 본 적 없는 당황으로 물들어 있었다.
“모를 것 같았는가.”
“…….”
“그래, 나도 모르고 싶었지.”
정국은 쓰게 웃었다. 그리고 제 손에 잡힌 윤기의 손을 다시 손가락으로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윤기의 손바닥이 축축했다. 정국은 윤기의 그 긴장감에 슬퍼졌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이유 모를 것이었다. 왜 하필 오늘 자신은 이 말을 꺼냈을까. 정국은 제 약해진 마음이 이 같잖은 고뿔 때문인가 생각하였다. 인간이란 얼마나 약한 것이며 얼마나 제멋대로란 말인가.
그때였다. 윤기가 정국의 손을 잡은 채 정국의 입술에 조심스레 맞닿은 것은. 제 까슬한 입술에 닿는 말랑하고 보송한 느낌에 놀라 정국은 저도 모르게 윤기를 잡은 손에 일순간 힘이 들어간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수 초간 정국의 따뜻한 체온에 닿았던 그 조금 낮았던 체온의 입술은, 다가올 때처럼 조심스럽고 천천히 떼어졌다. 닫혔다 열린 윤기의 눈동자가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정국은 그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윤기의 나긋한 목소리가 귓가로 퍼졌다.
“전하께서 저를 어찌 생각하시든, 오늘 찾아온 것은 전하께서 쓰러진 것을 듣고 마음이 쓰여 찾아온 것은 사실입니다.”
“…….”
“저조차도… 오늘 이곳에 왜 찾아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전하께서 저를 찾으신 것도 아닌데.”
윤기가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무시는 것을 방해하여 송구합니다, 전하.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정국의 손에서 잡혀 있던 윤기의 손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뒤로 물러서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들어올 때처럼 문은 조용히 닫혔다. 또 다시 침소엔 한 번도 깬 적 없던 궁녀와 자신뿐이었다. 정국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둠으로 숨어든 윤기는 집에 도착하여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벽에 기대어 섰다가 눈을 감고 숨을 죽이다 이내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이상하게 뛰는 제 심장에 윤기는 이유를 찾을 수 없어 애꿎은 새벽 시간을 탓으로 돌렸다.
애초에 정국을 찾아갔던 이유는 다른 것이었다. 정국에게 말했던 ‘쓰러졌단 소식을 듣고 신경이 쓰여 찾았다’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 말인즉슨, 정국의 상태를 보러갔던 것뿐이었다. 정국이 제 목표하는 날까지 멀쩡하게 그 자리에 있어주지 않으면 계획은 또 다시 복잡해지고 마니까.
그렇게 침소 안에 들고 나서, 윤기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한 나라의 왕이 잠들어 있는 곳에, 그것도 병중이라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왕이 잠든 곳을 지키는 것이라곤 세상모르고 늘어져 자고 있는 궁녀 하나가 다였다. 윤기는 제 소매에 잠들어 있는 작은 칼을 떠올렸다. 이 정도라면 정국을 죽이는 일쯤은 별 것도 아니었다. 치안이 이 정도인데… 그리 어려운 일 같지 않았다. 윤기는 생각했다. 어째서 아무도 정국을 죽이지 않는 걸까. 이 어리석고, 하나밖에 모르는 왕을.
윤기는 정국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정국의 얼굴을 살폈다. 열이 있었는지 얼굴이 달아올라 숨소리가 색색거렸다. 언제나 제 앞에서 위엄 있게 굳어있던 얼굴은 살짝 풀려 정국이 가진 제 나이의 얼굴을 보였다. 그 맑은 얼굴을. 제가 아는 왕에게도 이런 얼굴이 있었던가, 윤기는 저도 모르게 스치듯 생각했다.
문제는, 그 어리고 맑은 얼굴 앞에서 차마 소매의 단도를 꺼낼 수조차 없던 자신이었다.
애초에 꺼낼 생각이 있던 건 아니었다. 무슨 일을 일으키러 간 것이 아니었기에. 그러나 만일, 오늘 제 단도를 꺼내고자 했으면 윤기는 실패했을 것이었다.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왜 이러지. 왜 그렇지. 도대체 뭐가… 문제지? 윤기가 제 자신 안에서 헤매는 사이 정국은 눈을 떴고, 모르는 사이 제 손목을 붙들고 저를 불렀다. 그리고 놀란 제게 웃어보였다. 기운 없이 풀린 얼굴로, 순하고 무해하게. 윤기는 그런 느낌을 받고 있는 제 자신에게 놀라 멍한 얼굴로 말조차 제대로 이을 수 없었다.
자신이 오늘 정국에게 한 행동과 말들은, 제 진심과 위선이 제멋대로 섞여 있었다. 그 이유는 정국이었다. 제게 연모 같은 마음 없지 않냐고 덤덤하게 묻던 그에게 당황했고, 모르고 싶었다는 말과 함께 내보인 그 외롭고 가련한 얼굴이 제 자신과 겹쳐졌다. 제 손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제게 보이던 그 얼굴은 동정마저 불러 일으켰다.
어째서 그는 모든 걸 발밑에 가진 주제에 그런 얼굴을 할 수 있는 걸까. 가증스러웠다. 분명 지난번까지 그러했다. 사실, 그것조차 윤기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번엔 확실히 달랐다. 제가 그에게 동정심을 느낄 이유는 추호도 없었는데, 어째서 그 얼굴에 흔들렸을까. 제가 그에게 건넨 입맞춤은 도대체 무슨 의미였던가.
윤기는 고개를 저었다.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이리 깊게 생각해서 남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괜히 제 마음만 흔들릴 뿐이었다.
“…….”
하고 생각하던 윤기는 이내 제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 결론이 더 불안했다. 제가 흔들릴 이유는 없다. 흔들려선 안 됐다. 윤기는 제 옷자락을 꽉 쥐고 저도 모르게 덜덜 떨었다. 연달아 폭죽을 터뜨리는 도화선의 불을 잡아당긴 것 같이 생각이 막을 사이도 없이 퍼져나갔다.
정신없이 제 손톱을 물던 윤기가 결국 손끝을 물어 피를 냈다. 제 혀끝에 퍼지는 짭쪼름한 비릿함에도 끊이지 않는 생각이란, 참으로 질기고 모진 것이었다.
*
톡톡, 하고 누가 방문을 두드렸다. 출근 전의 석진은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문은 제가 대답을 하기도 전 벌컥 열렸다. 윤기였다. 사모관대를 정리하던 석진은 움직임을 멈추고 윤기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윤기는 꽤나 다짜고짜 말을 꺼냈다.
“내 편이라고 했지.”
“…그래.”
“나를, 끝까지 도와줄 거지.”
“응.”
윤기는 무언가 달라보였다. 지난 밤 잠을 설친 듯 눈 밑이 푸르게 색이 올라와 있었다. 석진은 그에 대해 무어라 말을 걸고 싶었지만 윤기의 기세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뒤이어 뱉어진 윤기의 말이, 아예 석진의 말문을 막았다.
“그럼 김남준이랑 만나.”
“…뭐?”
“김남준의 마음을 얻어. 형이 뭐라고 하든 형 말만 듣도록, 김남준의 마음을 얻으라고.”
“…….”
“알겠지.”
다짐을 받는 듯한 윤기의 말에 석진은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윤기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그대로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혼자 남겨진 석진은 마음이 무거웠다. 남준의 마음을 얻으라는 말이, 이리도 제 속을 갑갑하게 만드는 말일 줄 짐작조차 못했던 까닭이었다.
*
+)
날이 좋네요! 계속 이렇게 쾌청했으면 좋겠어요 ^ㅁ^
하뜌 눌러주신 분들, 지난편에 댓글 남겨주신 세라피나님, 남준이보조개님, 희양님 감사합니다! 대댓은 지금 달러감니다!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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