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섬 같은 나도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12. 본문

국슙 외 : 화무십일홍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12.

몽블랑11 2017. 4. 17. 00:49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12.

w.몽블랑




*



대전에 돌아온 정국의 몸 상태는 많이 나아졌다. 사실을 말하자면, 몸이 아직 가뿐하지는 않았으나 이대로 침상에 누워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왕좌라는 것은 누리는 권력 꼭 그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책임을 지는 것이라서, 이 자리를 오래 비우면 꼭 조정에 커다란 일이 터졌다.



조정의 대신들은 각자 생각도 많고 그 생각들도 모두 다 달랐지만, 어떤 때엔 한 사람처럼 뭉쳐 행동하는 때가 있었다. 그 방향은 정국이 예상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었다. 그 많은 정치판의 권모술수들은 손에 쥐일 듯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곤 했다.



선왕은 왕권의 강화를 위해 공포정책과 회유정책을 동시에 썼는데, 그로 인해 현재 조정엔 왕권은 탄탄했지만, 또 그에 비례하여 왕권에 대해 불만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박 대감의 경우 선대왕이 펼친 회유정책의 최대수혜자였다. 그는 머리가 좋아서 선대왕이 펼친 정책의 다음 수를 내다보고 그에 맞춰 행동하였으며, 그로 인해 선대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데다, 자신의 음인 아들을 왕가에 넣기까지 성공했다. 그런 그를 따르는 이들은 많았고 명망까지 좋았던 덕에 그의 세력은 조정 대신의 절반 정도에 다다랐다.



나머지 절반 중의 대다수는 바로 선대왕이 폈던 공포정책의 피해자들이었다. 선대왕의 왕권강화 정책은 굉장히 칼 같고 철저했다. 자신과 방향이 다르면, 제게 거역하면, 여지없이 피바람이 불어 닥쳤다. 그렇게 남준의 백부도, 호석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유명을 달리했다. 수많은 가문이 왕권의 아래 으스러져 갔다. 그들은 커다란 죄 같은 건 저지르지 않았다. 다만 선대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길을 다듬음에 있어 커다란 걸림돌이었을 뿐이다.



왕위를 위협하는 반역자들도, 덕망 있고 세력이 커다란 자들도 있었다. 선대왕은 타협을 몰랐다. 그저 왕권을 위협하는 그 모든 뿌리를 뽑으려 했다. 그는 최대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어느 뿌리를 뽑아내도, 그 틈을 타 또 다른 뿌리가 그 자리의 영양분을 쭉쭉 빨아먹으며 자라난다는 것까지는 채 깨닫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남겨진 정국(政局)은 언제나 다음 왕의 몫이었다.



정국은 두루마리들을 살피다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누워있던 그 사이에 결국 터져 있었다. 정국이 과하게 정무를 보아야 했던 것도, 채 낫지도 못한 몸으로 업무에 복귀해야 했던 것도 바로 이 이유였다.



결국 며칠 사이 남해 지방에서 옆 나라와 결탁한 세력들이 민란을 일으켰다. 긴급하게 봉화가 올라가고 병력을 요청하는 파발이 도착했다. 밑에선 일단 막아보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이 전쟁의 방향을 모르는 이들은 민심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의 세력을 불리고, 또 불려나갔다. 이미 커다랗게 모인 백성들의 원망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사그라드는 일 없이 계속해서 부풀고만 있었다. 옆 나라 또한 이미 주변국들과의 동맹이 굳건한 나라였으니, 그 세(勢)가 이미 무시무시할 것이었다.



정국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차출할 수 있는 병력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 병조판서를 늦은 밤 궁으로 불러들였다. 바야흐로 전쟁의 시작이었다.



*



박 대감은 보고를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박 대감이 ‘전하께서는?’ 하고 묻자 상대방은 들리지도 않을 목소리로 박 대감에게 무어라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난 후 ‘동태를 잘 살피게.’ 하는 박 대감의 말에 고개를 숙인 누군가가 조용히 뒷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가 돌아간 뒤 혼자 남은 박 대감의 얼굴이 묘하게 실룩였다. 일이 터졌다는 긴장감과 자신의 뜻대로 되어간다는 충족감이 박 대감의 얼굴에 기묘한 표정을 그렸다. 누군가 그의 얼굴을 봤다면, 평소의 박 대감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얼굴이 설마 그의 얼굴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기괴한 얼굴이었다.



“…이미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전하. 제 말씀을 들으시라니까요.”



혼자 생각하던 것을 웅얼거리듯 입 밖으로 내던 것이, 종래엔 또렷한 발음으로 박 대감의 업무실에 울려퍼졌다. 움찔거리던 그의 입에선 기어코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것은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서의 만족감으로 가득 찬,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 섬뜩할 수 있는, 한 권력가의 웃음소리였다.



*



태형은 자신과의 하룻밤을 원한다고 했다. 지민은 자신이 무어라 대답했던가 생각했다. 당황한 마음에 어물거렸던가. 그러다 그리 하자 말했던가. 자신을 바라보는 곧은 시선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거절은커녕 ‘이 아무도 찾지 않는 몸뚱어리를, 단 하룻밤 그대가 원한다는데… 그것이 무엇이 어렵겠소.’ 하고 저는 웃어보였던가. 제가 허탈감에 웃으면서 우는 것을, 그가 처음으로 못 본 척을 하고는 편히 쉬시라며 교태전으로 다시 데려다 주었었던가. 그때 태형의 표정은… 어땠었던가.



지민은 물에 몸을 담근 채 생각했다. 젖은 머리에서 똑, 똑, 하고 물이 통 안으로 떨어져 맑은 물방울 소리가 이따금 탕을 울렸다. 자신은 정국을 연모하고 있는 것인가, 배반하고 있는 것인가. 정국이 마음을 주는 이를 찾고 싶어 태형에게 몸을 주는 것은, 이것은 옳은 것일까. 옳지 않다면 자신은 또 무슨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저 멍하니 누군지도 모를 이에게 마음을 내준 정국을 그의 곁에서 바라만 보아야 하는 걸까. 그것이 중전의 도리인가.



태형에게 안기는 것은 태형에겐 배반인가, 위로인가. 입맞춤조차 두려워 떨던 그때와는 달리, 놀랍도록 덤덤하게 그와의 하룻밤을 준비하고 있는 자신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자신은 이대로 태형과의 관계가 일그러져도 상관없는 걸까. 관계가 일그러지게 되는 걸까. 그러다 태형을 잃어도, 자신은 괜찮을까.



지민은 멍한 눈으로 젖은 제 몸을 목욕통에서 일으켰다. 태형과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지민이 몸과 머리를 말리고 침소로 들어섰을 땐, 모두가 물러간 뒤였다. 불이 꺼진 채 어렴풋이 달빛만 들이치는 그곳엔 태형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침소로 걸어 들어오는 지민을 보자 소리 없이 일어서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보니 태형의 굳은 표정은 교태전으로 출근하여 평소처럼 제게 인사하는 것 같은 모습인데, 그도 자신도 소복 한 장 차림이라는 것이 참으로 낯설었다.



태형은 말없이 지민의 손을 잡아 침상으로 끌어당겼다. 지민은 그런 태형의 손길에 속절없이 끌려갔다. 강하지 않게 끌어당겼지만 힘없이 끌려온 지민을, 태형은 무엇보다 조심스럽게 이불 위에 눕혔다. 태형은 달빛을 하얗게 반사하는 지민의 눈동자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눈을 맞췄다. 지민은 그 태형의 눈동자에 제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어둠에 가려진 태형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태형에게서 평소보다도 작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실 겁니다.”

“…….”

“지금 제 심장이 얼마나 뛰는지도 모르시겠지요.”

“…….”

“마마께 오늘이 어떤 날이든, 제겐 죽는 날까지의 여한이 남김없이 사라질 날입니다.”



그 낮은 목소리가 지민의 심장까지 울려오는 듯했다. 태형은 지민의 왼손을 들어 손가락 하나하나의 끝마다 작게 입을 맞췄다. 태형은 이 손끝이 항상 꽃이 물든 것처럼 분홍색이라는 것을 알았다. 저 손을 잡아 입맞춰볼 수 있다면, 하고 수백 번도 생각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태형은 다섯 손가락에 빠짐없이 입을 맞추곤 손목 안쪽을 혀로 감아 핥다가 약하게 물었다. 예상치 못한 통증에 작게 아, 하고 신음을 흘린 지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를 바라보는 지민의 표정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눈앞에 있으나 닿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 비참함에 눈물을 짓는 대신, 오늘 밤 태형은 슬프게 웃었다. 천천히 고개를 내려 지민의 입술에 제 입술을 내려앉혔다. 여전히 따뜻하고 보드라운 입술이었다. 가만히 입술을 대고 있던 태형이 고개를 살며시 떼고 물었다.



“…두려우십니까.”



태형의 물음에 지민은 태형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와서 무엇이 두렵느냐 묻는지 모르겠다. 이제 제겐 무서운 것도, 두려운 것도 없었다. 만약 이것을 정국에게 들킨다 해도? …아마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미 정국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지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태형이 지민의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다행입니다.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제겐 닿을 수 없다 생각했던 깨끗한 이마와 코끝에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지민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두렵지 않으시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지민의 감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태형은 보지 못한 척을 했다. 그리고는 지민더러 안심하란 듯, 작게 웃어보였다. 지민이 태형의 옷고름을 향해 손을 뻗었다. 태형에겐 지민의 옷고름을 향해 내리깐 시선마저 고왔다. 그런 태형의 눈을 바라보던 지민이 옷을 조심스레 풀며 말했다.



“호위는… 웃는 모습이 예쁩니다.”

“…….”

“계속, 그리 생각해 왔습니다.”



지민을 향해 웃음을 머금고 있던 태형이, 그 말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지민은 입술을 꽉 깨문 태형의 표정을 보고서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형의 풀어헤쳐진 상의를 어깨에서 잡아 내렸다. 태연하게 행동하며 저렇게 말하다니. 지민은 참으로 원망스러운 사람이다. 태형은 제 옷을 붙든 지민의 손을 제 손으로 잡아 강하고도 조심스레 떼어내곤 그 손을 천천히 침상으로 내렸다. 지민의 촉촉한 눈동자가 저를 따라온다. 언제든 울고 있는 것 같은 저 눈동자가 항상 태형의 입을 막았었다. 어떤 말도 하지 못하도록. 함부로 입 밖으로 제 마음을 내지 못하도록. 그래놓고 이제와… 이제와.



“제게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제게 마음 한 자락 내어주지 않으실 거라면, 기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태형의 말에 지민이 아프게 웃었다.



“…내가… 미안합니다. 내가, 내가….”



지민이 더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태형을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눈을 감고 입을 막듯 입술을 맞물려 혀를 밀어 넣었다. 보드라운 촉감이 예민한 입술에 닿고 우응, 하는 소리와 함께 지민의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먹혔다. 지민은 그 달콤하고 촉촉한 혀로 저를 찾아온 태형의 혀를 살며시 감았다. 그리곤 똑같이 눈을 감고 태형의 목을 양 팔로 살며시 끌어안았다. 태형은 더 이상 무슨 말을 듣지 않아도 괜찮았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 자리이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제 마음이 전해지지 않아도 좋았다. 지민의 위로는 받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신과의 계약을 위한 하룻밤이라 생각해도 좋았다. 이 모든 죄의 원인과 대가를 제게 돌리고 지민은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 어떤 것도, 그가 미안할 것은 없는 것이다.



“…하아, 응…! 읏, 아….”



태형은 지민의 입술을 지나 가녀린 목선, 그리고 하얀 가슴에 제 입술과 혀를 내리며 그리 생각했다. 그저 오늘 밤이 흘러가면 된다. 밤의 장막에 가려져 그 뒤에서 이 사랑스러운 사람을 하룻밤이라도 안을 수 있다 한다면, 태형은 그것으로 좋았다. 그것으로 족할 수는 없었으나, 그것이면 되었다. 그 이상의 욕심을 지니지 않을 자신은 없었으나, 지금의 순간이 제겐 과분한 것이라는 것을 태형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민은, 저와 똑같은 아픔을 가진 이를 품으며 눈을 감았다. 어찌 자신과 이리도 같은지, 지민은 그 아픔을 알 것도 같아 제 안으로 들어오는 이의 등을 꽉 안고 숨을 죽인 채 울었다. 그 울음의 연유는 알 수 없었다. 물에 젖어 번진 시야엔 들이치는 달빛조차 엷었다. 어둠에 몸을 숨긴 채 지민은 조심스레 울었다. 그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서로를 꼭 닮은 두 사람의 밤을 어둡게 가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궁궐에 뜬 달은 오늘따라 달빛이 옅고 여렸다. 안간힘을 다해 지붕에 간신히 닿은 달빛마저 애처로운 밤이었다.



*



+)

조금 많이 늦었습니다 죄송해요 ㅠㅅㅠ 지난주엔 뭐하느라 그리 바빴는지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잘 모르겠어요 ㅠㅅㅠ;;

형 시리즈에 댓글 남겨주신 언ㅕ님, 대디에 댓글 남겨주신 망개망개님, 화무십일홍에 댓글 남겨주신 지민럽님과 하뜌 눌러주신 분들!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멜랑꼴리한 이 새벽 한 시에 저의 사랑을 날려봅니다 퐁퐁^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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엌 미쳤나 봅니다, 댓글 주신 분 닉넴을 틀리다니; 등에 식은땀 나서 고치러 들어왔네요; 지민럽님 죄송해요 8ㅅ8;;;;;; 자기 전이라 정신이 없었어요 8ㅅ8;;; 아잌 변명 다 필요없고 죄송해요 8ㅅ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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