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섬 같은 나도
[국슙] DADDY 09. 본문
[국슙] DADDY 09.
w.몽블랑
*
별로 원한 것이 없었다. 바란 것도 없었다. 그저 머릿속 한 구석에서 막연하게, 정국이는 예쁘고 바른 사람이 되겠지,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처럼, 하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윤기는 정국이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점점 그를 닮아가고 있는 모습까지도 윤기의 막연한 바람과 같았다.
그래서 이건 전혀 아니었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고백이라니.
‘좋아해요.’
그저 윤기는 다시 제대로 정국과 이야기해 보고 싶던 것이었다. 정국의 ‘엄마’의 빈자리에 대해. 그리고 지난 번 정국이 남긴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에 대해.
그러나 윤기가 말을 꺼내자마자 답답함을 이길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국은 좋아한다 말했고, 말을 입 밖으로 낸 순간 정국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정국의 말을 들은 윤기의 표정 또한 황망하기 그지없었다.
정국의 마음을 듣던 순간, 끝을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실망감이 윤기를 덮쳤다. 어떤 마음을 갖고 정국이 말한 걸까, 어떤 고민을 해왔을까 같은 건, 조금도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눈앞이 새까맣게 암전되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제대로 키우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윤기는 정국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이, 모두 저 때문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엄마가 없어서도 그런 것 같다. 주위에서 여자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정국이 저한테만 사랑받아 버릇해서, 그래서 이렇게 된 것도 같다.
…모르겠다. 윤기의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지금까지 정국에게 해줬던 그 모든 것들이 죄가 되어 돌아왔다. 애초에 자신이 정국을 맡아서 키웠던 것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닐까.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정국이 원망스러웠다.
왜 그런 말을 내게 하니. 왜 그런 마음을 품었니. 왜 일을 이렇게 만들어.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했길래.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래서야 네 아빠를 볼 면목이 없잖아….”
한숨처럼 터진 윤기의 말에 정국은 또 다시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러나 손으로 눈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인 윤기는 그런 정국의 표정을 보지 않았다.
*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전화 드립니다. 저… 조카 정국이 데리고 있는 민윤기라고 합니다.”
윤기는 제 넥타이에 손가락을 넣어 조금 풀어내야했다. 오랜만에 하는 통화는 여전히 숨이 막혔다.
*
“내일 너희 삼촌 집으로 가야 해.”
말 한 마디 없이 식탁을 지키던 윤기에게서 떨어진 청천벽력 같은 말에 정국이 움직임을 멈췄다. 밥 대신 커피를 마시던 윤기도 천천히 잔을 내렸다.
“앞으로 그분들께서 널 맡아주시기로 했다. 네 삼촌과 숙모셔. 앞으로 내가 바빠질 것 같아 나 혼자 너를 보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 너와 말도 없이 일이 이렇게 되어서 미안하다.”
“…….”
“내일 짐을 옮기러 사람들이 올 거야. 짐은 다 옮겨주실 테니 너는 몸만 편히 가면 된다. 주소는 내일 내가 문자로 보내줄게. 그분들은 나처럼 남이 아니라 진짜 네 친척들이니까 가서 잘하고. …나한테 연락은 안 해줘도 돼. 괜히 부담 갖지 말고.”
정국은 말이 없었다. 화가 난 듯 굳어진 얼굴이 식탁만을 뚫어질 듯 응시했다. 지금 윤기가 자신을 위해서랍시고 하는 말들 한 글자 한 글자가 정국의 머릿속에선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요.”
정국의 목소리가 뜨거웠다. 홧홧 불에 델 듯한 화를 담은 어린 목소리가 감추지 못하고 넘칠 듯한 감정을 담았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나한테 이래요.”
“…….”
“좋아하는 게 죄예요? 그렇게 나빠요?”
“…더 이상,”
정국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치는 윤기의 말투와 눈길이 정국만큼이나 날카로웠다.
“나에게 좋아한다는 말 하지 마.”
그리고 곧 슬퍼졌다.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 하지 마, 정국아.”
“…….”
“그 말을 들으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말을 들으면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한 걸까 자꾸 생각하게 돼. 그게 나를 망가지게 해. 너를 향했던 모든 시간들이 한 줌의 재처럼 느껴질 때, 그게 너를 미워지게 해, 그러니까… 그만하자.”
나는 너를 미워하고 싶지 않아. 너는 내 사랑스런 아이니까.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마.
아프고 지친 윤기의 표정이 정국을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은데, 그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윤기는 더 이상 정국을 이해할 힘도 마음도 없어 보였다. 정국은 아직 변명조차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윤기가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것은… 그것만큼은 싫었다.
*
삼촌과 숙모라는 사람들은 그리 친절하지 않은 것 같다. 오랜만에 갑자기 친척이랍시고 만나게 된 사람들과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걸 상상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정국은 방과 후 주소만 들고 갔던 삼촌의 집에 사람이 아무도 없어 닫힌 문 앞에서 지금처럼 계단에 쭈그려 앉아있을 것을 상상해봤던 적도 없었다.
“…하아….”
가로수가 푸른빛으로 물든 제법 더워진 오후, 하교 길을 걷느라 볼이 발갛게 올라온 정국은 땀을 식히며 한숨을 쉬었다. 언제쯤 돌아올까, 이 가족은. 괜히 멀쩡한 가족에 불청객이 끼어드는 기분이었다. 그 불청객이 정국 자신이라는 사실이 정국을 꽤나 괴롭혔다. 움츠러든 어깨에 수그러든 목. 정국은 저도 모르게 집에 가고 싶다, 고 생각했다가 떠오른 사실 하나에 이내 제 팔 안으로 얼굴을 묻었다.
“…읍….”
이제 그곳은 집이 아니다. 그곳을 집으로 만들어줬던 사람은 더 이상 정국을 따뜻이 맞아주지 않을 거고 그를 그렇게 만든 건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에, 정국은 눈시울이 뜨거워 고갤 들 수가 없었다.
*
저녁 즈음에야 도착한 삼촌네 부부는 지금까지 복도에서 기다렸냐며 놀란 얼굴로 정국에게 집 문을 열어주었다.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 숙모의 말에 정국은 그냥 웃었다. 번호를 받은 기억이 없었다. 윤기에게 전화해서 물어볼까 싶었지만 그에게 전화하는 것을 상상만 해도 목이 메여와 그만뒀다.
환영식이라며 학원에서 돌아온 사촌들과 함께 다 같이 외식을 했다. 사촌들의 입맛엔 별로 맞지 않는 외식 메뉴였는지 사촌들은 내내 퉁퉁댔다. 그런 아이들에게 혼을 내며 숙모는 음식이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눈치를 보느라 무슨 맛인지는 커녕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지만 정국은 그냥 웃으며 맛있다, 감사하다 했다.
식사 후,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형제인 사촌들이 정국의 방으로 들어왔다. 한 명은 중학교 2학년, 한 명은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이것저것 놓인 정국의 방을 보던 사촌들은 물건 하나에 꽂혔다.
“형, 이 구두 멋있다.”
책상 밑에 있던 박스를 어떻게 봤는지 큰 아이가 박스를 연 채로 정국에게로 보였다. 구두는 예전에 윤기의 가죽 다이어리 속에서 봤던 그 브랜드의 그 모델이었다. 윤기가 정국이 중학교 때 사줬던 것이라 이미 신발은 맞지 않게 되었지만 그 구두가 고급 브랜드의 한정판이라서 계속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국에겐 그에 대한 추억이 있었다.
정국이 윤기의 일기를 보게 되고 둘 사이에 작은 일이 있었던 그날, 다음 날 윤기는 화해의 선물이라며 조그마한 카드와 함께 이 신발을 건넸었던 것이다.
‘신발을 선물해주면 도망간대. 정국아. 너는 내게서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도망가도 괜찮아. 대디가 항상 뒤에 있을게.’
카드를 몇 번이고 읽으며 울먹거리는 자신을 꾹 안아준 윤기를, 정국은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했다. 항상 뒤에 있겠다면서, 이젠 곁에 없는 사람이 또 원망스러워졌다. 정국은 쓸데없는 생각을 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오래된 신발이야.”
“몇 번 신지도 않은 거 같은데? 완전 새 거야!”
“맞아. 한 번도 안 신었을 거야.”
“우와, 형 이거 어디서 샀어? 나도 갖고 싶다….”
큰 형의 말에 남동생도 다가와 고급스러운 검정색 로퍼를 보더니 눈을 반짝였다. 나도, 나도, 하는 사촌들의 목소리에 정국은 웃었다. 이젠 구할 수 없을 테니 신어보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잘 어울리면 비슷한 신발을 사는 것도 괜찮을 테니까.
“신어 봐도 돼.”
*
문제는, 그 신발이 다음 날 박스 채로 없어진 데에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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