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섬 같은 나도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35. w. 몽블랑 * 한밤중이었다. 밤의 한중간을 지나는 고요한 시간. 암흑뿐인 공간과 반복되는 풀벌레 소리에 잠과 피로로 의식이 아득해지려하던 윤기는 발소리에 눈을 떴다. 굳이 숨기려하지 않는 발소리에 윤기는 어떤 예감이 스쳤다. 빠르지 않은, 그러나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 제가 갇혀 있는 이 깊은 구석까지 찾아올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 정국, 그밖에. 정국은 입을 굳게 다문 채였다. 어른거리는 작은 촛불 하나에 그림자가 어지럽게 일렁였다. 그의 표정을 알기가 어려웠다. 정국은 자신을 따라온 내관에게 불을 제게 달라 손짓했다. 내관은 그에게 불을 넘기고는 정국의 턱짓에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리로 사라졌다. 멀어지는 내관의 발소리에 윤기는 벽에..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34. w.몽블랑 정국은 옆으로 쓰러져 있는 윤기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 박 대감의 눈을 응시했다. 박 대감은 제가 가진 모든 패를 보여주었다. 자신의 거래가 먹히지 않으면 이런 패를 쓸 수도 있고, 저런 패를 쓸 수도 있다고, 제게 말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원할까.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전하.” 그는 정국의 시선을 읽은 듯 입을 열었다. 정국의 커다란 눈에 총기가 돌았다. 이쯤 되니 무엇이 그리 하고 싶어서 이렇게 판을 벌였나 궁금하기까지 했다. “중전 자리입니다.” 정국은 저도 모르게 하,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고작 중전의 복위? 이렇게 큰일을 벌여놓고, …고작? 정국은 잠시 지민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제대..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33.w.몽블랑 * 안아도 안아도 질리지 않는 몸이었다. 재환은 그리 느끼는 제 자신이 생소할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먹고 버리는’ 존재라 생각했던 음인이었는데, 재환은 그새 또 윤기에게 발걸음하고 있었다. 제 아버지와 형의 복수는? 거기에서 민윤기란 존재는? 자신과 윤기의 관계란 도대체 뭐였을까? 생각이 복잡해져 올 때 그 모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줄 방법으로 재환은 또 다시 윤기를 안는 일을 택했다. 하루에 한 번씩은, 많을 땐 두 번, 세 번도 윤기를 안았다. 윤기가 재환의 주기마저 불러온 것처럼 견딜 수가 없을 만큼 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정말 견딜 수 없을 때면 결국 또 윤기를 찾았다. 이쯤 되니 재환은 윤기가 아니라 제가 색욕에 미친 게 아닐까 생..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32.w.몽블랑 * 정국은 박 대감의 얼굴을 보자 빳빳하게 힘을 주었던 목에 힘을 탁 풀었다. 뒤통수가 바닥에 닿은 정국의 표정은 웃음을 머금고 있으면서도 짜증스러움 그 자체였다. 박 대감은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다리던 분이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정국이 웃음을 띠운 채 박 대감을 똑바로 쳐다보며 눈을 빛냈다. “나를 납치한 게 자네라니. 권력 줄이 끊기고 나더니 똥줄이라도 타는 모양이지? 더러운 일에 그 더러운 손을 직접 뻗치고.” 일국의 왕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저속한 정국의 말본새에 박 대감이 참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지민이 폐위되었다 해도 자신은 아직 정국의 장인이었고 영의정이었다. 감히 제게 천한 말을 무례히 건네다니. 게다가..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31.w.몽블랑 * 정국의 군대와 수국의 정예병들은 서로 팽팽하게 맞섰다. 이제 수국의 습격에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 뒤엔 정국의 역할이 컸다. 정국은 부대의 구석구석까지 돌며 사기를 돋웠다. 남해로 내려오기 전, 정국은 남해에 내려와 있는 군사들의 가족들에게서 그들에게 보낼 편지와 물건 등을 받아두었다. 그것이 전쟁터에서 쓸모가 없는 한갓 거울이나 천조각일지라도, 정국은 그것을 모두 소중히 받아둘 것을 명했다. 그리고 남해로 온 정국은 그것을 하나하나 군사들에게 나누어주며 물건과 편지에 담긴 그들의 이야기를 묻고 들었다. 군사들은 정국의 앞에서 울고, 웃었다. 긴 시간 지치고 황폐해진 마음 한 구석에 내리는 단비 같은 행사였다. 그렇게 정국이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