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섬 같은 나도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25.w.몽블랑 * 윤기는 거친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이미 늦은 밤이었으나 어차피 잠들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어질러졌다. 무어라 말할 수도 없는 감정 속에서, 윤기는 무조건 집 밖을 향해 걸었다. 김 진사의 죽음 이후 휑해진 느낌을 감출 수 없던 두 형제는 그간 서로 말을 아꼈었다. 서로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몰랐기에 그랬다. 김 진사는 알게 모르게 석진과 윤기의 사이를 이어주는 인물이었고, 그런 김 진사가 죽어버린 이상 석진과 윤기는 이제 남남이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사실을 미처 모르는 척 지냈다. 여전히 한 집으로 들어오고, 한 집에서 함께 지냈다. 얼굴을 마주치는 일은 드물었으나 두 사람 모두 서로가 그 집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국슙/슙국] 호텔 캘리포니아 (Hotel California)w.몽블랑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어질어질한 밤의 골목은 휘황찬란했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옷차림. 나는 그곳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 같았다. 누군가의 어깨에 치였고 욕이 들렸다. 물속에 빠진 것처럼 귀를 울려대는 욕이. 돌아보며 피식 웃자 나를 더럽다는 듯 쳐다봤다. 내가 가운데손가락을 올리자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달려들려 한다. 그러자 옆 사람이 그 사람을 붙들며 말렸다. ‘약에 취한 더러운 년이야. 상대하지 마.’ 비틀대며 밤거리를 헤매다 나는 항상 어슬렁거리던 거리에 멈춰 섰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벽에 등을 기댄다. 나를 향해 눈길을 주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던지면 갖가지 반응이 돌아왔다. 깜짝 놀라 눈길을 피하는 사람도 있는..
[X짐] 비오는 날w.몽블랑 ‘지민아.’ 그날은 비가 오는 평범한 날이었다. ‘형 방으로 잠깐 와볼래.’ 부모님은 일을 나가시고 조부모님도 외출로 집을 비우신 집엔 형과 나, 단 둘뿐이었다. 어렸던 나는 형의 말에 가지고 있던 장난감을 내려놓고 형의 뒤를 쫓아나갔다. 형의 방에 도착하자 형은 나를 들여보내곤 방문을 잠갔다. 형아, 왜? 하고 묻는 내 얼굴에 형이 웃었다. 그냥, 형이랑 재밌는 거 하자고. 그러나 형의 웃는 얼굴이 조금 이상했다. 형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땀도 이상했다. 조금 긴장한 듯 붕 뜬 변성기의 목소리도 이상했다. 나의 이해는 거기까지였다. 이상하다는 걸 느꼈지만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다. 형이 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바닥에는 이불이 펴져 있었다. 언제나 형이 일어나면 곱..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24.w.몽블랑 * 귀뚜라미가 우는 밤이었다. 박 대감의 크지 않은 목소리가 늦은 밤의 사랑방을 나지막이 휘감았다. 방문에 바른 창호지에 귀를 갖다 붙여도 들릴까 말까한 크기의 은밀한 밀담이었다. 방 안에 앉아 말소리를 죽인 박 대감은 요즘 들어 조금 변해 있었다. 이채가 도는 눈동자가 벌겋게 충혈 되어선 집요한 시선으로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의 입만을 좇았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알아올 셈이지, 자넨?”“열심히 전하의 뒤를 좇고는 있사오나 전하께서 워낙 움직임이 빠르신 데다 궁의 지리를 잘 알고 계신,”“왕의 단련 시간이 자네들보다 더 길 거라 생각해? 정무에 치여서 그마저 사라진 지가 언제인데, 그 속도도 못 따라잡는 놈들이란 말이야? 또. 궁의 지..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23.w.몽블랑 * 교태전은 고요했다. 지민이 교태전의 주인이 된 이후로 지금껏 소란스러운 적 없었던 교태전이라 하나, 요 근래 들어서는 고요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교태전의 주인은 바깥 빛을 볼 줄 몰랐고, 시간이 지나며 교태전에 배치되어 있던 궁인들은 다른 곳으로 재배치되었다. 하나, 둘. 교태전을 지키던 궁인들이 떠나갔다. 세자빈 시절부터 지민을 모셨던 나이가 지긋한 상궁마저 다른 궁으로 배치되자, 그녀는 울며 싫다고 버텼다. 교태전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마마! 제발 한 번만 나와 보십시오…. 제가 다른 곳으로 끌려가도 괜찮으신 겁니까, 마마…!’ 하고 울며 일어서지 않으려 하던 그녀는, 종래엔 억지로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나갔다. 그 소란이 일어나는 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