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섬 같은 나도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30.w. 몽블랑 * 수천 명의 커다란 부대를 정국이 도성에서 데려오면서 군의 사기도 덩달아 올랐다. 이 정도의 규모라면 어렵지 않게 필승일 것인데, 이상하게도 정국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도성에서 내려온 정국은 구체적으로 군사들의 모습을 둘러보더니, 거의 다 돌 때 즈음 굳어진 표정으로 초소를 향했다. 생각에 잠긴 듯한 느릿한 발걸음과 표정으로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내보이는 정국에 주위의 장수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서둘러 정국의 뒤를 따라 쥐죽은 듯 걸었다. 초소로 들어온 정국은 가만히 서있었다. 말이 없었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던 젊은 장수가 한참의 침묵을 깨고 앞으로 나섰다. “이 정도면 숫자로 밀고 나가도 이길 터인데 어찌 표정이 좋지 않으신지요, 전..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29.w.몽블랑 * 자상을 꿰매는 수술이 끝나고 호석은 잠이 들었다. 그러나 깊이 잠들지 못하고 그 밤 내 열을 내며 앓았다. 상처로부터 시작된 열이 호석의 온몸에 열꽃을 피웠다. 이것을 견뎌내어야 상처가 아물 것이었다. 어쩌다 살풋 든 잠결에 몸을 뒤척이기라도 하면 벌어진 상처가 주는 고통에 호석은 숨조차 내쉬지 못하고 끅, 하는 막힌 소리를 냈다. 침상의 이불을 꽉 쥐는 호석의 손을 서늘한 남준의 손이 가져가 잡아주면, 호석은 그제야 흐으… 하는 소리를 흘렸다. 어린 동물처럼 작고 밭은 숨을 여러 번 나눠 내쉬었다. 그와 함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드는 것을 남준이 손에 쥐고 있던 천으로 닦아내 주었다. 호석은 눈을 깜빡였지만 남준을 알아보는 것 같지는 못했다. 남준은..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28.w.몽블랑 * 새벽이 이제 막 도착한 시간. 남준은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이제야 간신히 도성을 벗어나 평평한 길이 펼쳐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달리며 말의 거친 숨소리와 제 숨소리에 집중하려 애를 써 봐도, 울며 제게 안기던 석진의 얼굴이 긴장을 놓친 한 순간을 파고들어 제 모든 사고를 정지시켰다. ‘그대를 붙잡고 있는 것이, 만일 그대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된다면….’ 남준은 미소를 지었다. 석진의 얼굴에 입술을 내리며 아니라고 했다. 절대 아니라고. 그러나 석진은 그 말이 조금의 위안도 되지 않은 듯 안타까운 얼굴로 남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 표정이 남준의 예상보다 훨씬 더 애절해서 남준은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곧 입술을 맞대어 오는 석진의..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27.w.몽블랑 * 남준은 정국의 명에 따라 윤기의 집에 도착했다. 몇 달 만에 눈앞에 마주한 대문은 익숙하면서도 생소했다. 출근 시간이 지났으므로 석진은 궁에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알 수 없는 기대감에 밭아진 숨을 고르며 남준은 대문을 두드렸다. 일단은 안에 윤기가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계십니까.” 대답이 없었다. 남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조금 더 세게 대문을 두드리며 계십니까! 하고 외치던 중, 대문은 어이없게도 끼익, 소리를 내며 힘없이 열리고 말았다. “…….” 혹시 제가 힘이 지나치게 들어가 문을 부숴버린 것은 아닌지 걸쇠를 확인한 남준은 그것이 멀쩡함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이 턱없이 조용했다. ..
[국슙 외]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26.w.몽블랑 * 평소 같은 밤길이었다. 풀마다 이슬이 맺힌 촉촉한 새벽의 길은 스산하리만치 고요했지만 윤기는 그 고요함이 제 피부 같이 느껴졌다. 그건 아마도 제 향의 탓일 지도 몰랐다. 정국과 몸을 섞고 나면 제게도 느껴질 만큼 피어오르는 제 새벽향기가 이제와 낯설다면 이상할 것이었다. 정국이 잠이 든 사이 곁을 빠져나와 궁을 나올 때쯤, 옅어져 버린 숲의 향기에 어딘가 한 곳이 텅 빈 듯 외로움을 느낄 때면 언제나 같은 하얀 달빛이 말 없는 친구처럼 은은히 제 길을 비춰주곤 하는 것이었다. 저 달빛만큼은 제 마음을 알고 있는 것 같아 윤기는 묵묵히 제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집에 다다를 즈음이었다. 느낌에 무언가 이상했다. 윤기는 평소 같은 고요함이 깨진 듯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