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슙민 (35)
외딴 섬 같은 나도
적도 05.적도보다 뜨거웠던 너의 사랑이, 대학교 새내기가 된 나는 형과 같은 대학교에 가진 못했다.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수재였던 형의 대학교는 내 성적으로는 모자랐다. 대신 집을 옮기지 않고 갈 수 있는 성적이 맞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버지께선 대학을 들어가면서 조금 시간이 여유로워졌으니 집을 옮겼으면, 하셨지만 원래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가족이라는 게 설어서인지 역시 쉽게 들어갈 수는 없었다. 대신 아예 형이 집을 여기로 옮기기로 했다. 부모님께선 형과 나라도 많이 친해졌으면, 하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형은 정말 부모님의 기대 그대로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얘기해볼수록 사려 깊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형은. 내가 윤기 형과 싸우거나 문제가 있을 때..
적도 04.적도보다 뜨거웠던 너의 사랑이, 형이 그렇게 떠나고 나는 멍하니 몇 시간을 앉아있었던 것 같다. 박지민도 생각하고, 민윤기도 생각하고, 내가 민윤기한테 했던 말도 생각하고, 박지민이 나한테 했던 말도 생각하고… 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넘어갈 때쯤 집에 들어섰던 걸 보면. ‘많이 늦었네? 어디 갔다 왔어?’‘아니요… 일이 있어서요.’‘표정이 안 좋은데.’ 형의 걱정하는 표정이 보였지만 형은 윤기 형과 친구였기 때문에 섣불리 고민을 털어놓기도 어려웠다. 순전히 나 때문에 우리 집에 와 있는 형인데 말도 못해주고, 집에나 늦게 들어오고, 하는 생각에 괜히 미안해져 와 가방을 방에 놓고 옷을 갈아입고 쇼파에 앉은 형의 옆에 가만히 앉았다.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형이 내가 옆에 앉자 결국 픽 하고 ..
적도 03.적도보다 뜨거웠던 너의 사랑이, 그렇게 잠을 이루지 못한 나는 학교에 가서도 책상에 엎드려 수면 상태로 1교시와 2교시를 보냈다. 언제 4교시가 끝날는지. 간신히 2교시가 끝나는 종에 잠이 깼는데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비몽사몽지간에 멍을 때리는데 짝꿍자리에 누가 확 앉는다. 동시에 어디서 풋풋한 비누 향기가 확 다가왔다. 향기의 근원지를 찾으려 짝꿍 자리로 눈을 돌리니…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누군지 모르겠는 얼굴이 앉아있다. 순둥순둥하고 말랑말랑하게 생긴… 이게…. ‘누구…였더라.’ 내 말에 어이없다는 듯이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아직 덜 뜨인 눈앞으로 녀석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제 나 기억 안 나?’‘어제… 으음…. ……아.’ 잠에 취해서 눈을 비비다 퍼뜩 생각이 났다...
적도 02.적도보다 뜨거웠던 너의 사랑이,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벌써 고등학교에서 치룰 수 있는 시험이 몇 번 남지 않았고 그만큼 스트레스도 머리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아침 등굣길도 그랬다. 풀리지 않은 스트레스, 피로와 함께 멍한 얼굴로 학교를 가는데 누군가 앞길을 턱 하니 막는다. 약간의 짜증과 함께 올려다보니, ‘어, 윤기 형….’ 지난 번 형을 데려다 준 윤기 형이었다. 이번이 두 번째로 만나는 것인데도 형은 내가 생각보다 반가운 듯 광대가 확 올라간다. 형의 웃는 얼굴에 낯을 가리는 나도 빙긋이 웃었다. 형 또한 싱긋싱긋 웃으며 오랜만이라며 인사한다. ‘학교 가?’‘네. 형은 어디 가요?’‘나? 난 시험 기간이라 밤새고 이제 집에 가.’ 씻고 또 바로 나와야 돼. 미치겠다..
적도 01.적도보다 뜨거웠던 너의 사랑이, 우리의 첫 만남은, 아름다웠다. 김남준, 그의 아버지와 김태형, 나의 어머니가 만나서 살게 된 것은 어쩌면 천운이라고 생각했다. 연세가 드셨지만 훤칠한 외모의 나의 법적 아버지. 그의 넉넉하고 따뜻한 품에 가만히 기대어 수줍게 손을 잡은 어머니를 보았을 때, 나는 더 이상 내게 선택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를 보내드려야 했다. 지금까지 홀로 17년간 나를 키워준, 고생만 알고 살았던 나의 어머니를. 생각 없던 시절의 나라도 그쯤은 알고 있었다. 두 분이 모두 아들 하나뿐이셨고, 우린 공교롭게도 성이 같았다. 마치 처음부터 가족이었던 것처럼. 형은 어머니께 듣자하니 굉장한 수재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아 뭣도 일찍 하고, 중학교 때는 뭣도 하..
[슙민/국뷔] 인어공주 이야기 20. (完) 1층으로 숨어든 경찰들은 빌딩이 텅 비어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주말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조용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필요 이상으로 조용한 탓에 거꾸로 누군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하던 경찰들을 허무하게 만들 정도였다. 윤기는 그런 그들에게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라고 말했다. 윤기의 말을 듣던 김 형사가 ‘걔네가 어디에 있을 줄 알고 꼭대기 층부터 가래?’ 하고 물었다. “걔네 꼭대기 층에 있을 겁니다. 나 믿으세요.”“아니 도대체…. 참 나.” 김 형사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엘리베이터 층을 누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뒤에 서서 윤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김태형이 한 그 말은 거짓말 아닐 겁니다. 절대로.” 꼭대기 층은 정국의 사무실만이 있었다...
[슙민/국뷔] 인어공주 이야기 19. 날이 흐렸다. 깜깜한 아침은 눈을 뜨기가 힘들다. 정국은 억지로 일어나 침대에 앉았다. 온몸이 근육통이 찾아온 것처럼 찌뿌드드했다. 이유 없이 머리도 아파오기 시작해 인상을 찌푸린 채 몇 초 간 정지한 채 앉아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드는 생각이라기엔 어불성설이었지만 ‘이대로 하루가 끝났으면.’ 하고 생각했다. “…일어나야지.” 중얼거리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지만 기분이 더 별로였다. 오히려 일어서자 들어간 것 없는 뱃속까지 울렁거려왔다. 머리가 아프니 속도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부엌으로 나와 냉장고를 열어도 안은 텅 비어있었다. 두통약이라도 있을까 했지만 약은커녕 물조차 한 통도 없었다. 어차피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으니 당연했지만 오늘은 뭐라도 있었으면 싶은 마음..
[슙민/국뷔] 인어공주 이야기 18. 태형은 늦은 밤, 자신의 사무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정국이 자신을 멀리함으로써 모든 일들을 정국 모르게 뒤에서 보아야 하니 일이 끝나는 시간이 더 늦어졌다.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복도를 걷던 태형의 앞으로 익숙한 사람이 들어와 서 태형은 걸음을 멈췄다. “형님.” 앞에 서 있는 건 승철이었다. 항상 말이 없고 묵묵히 행동하는, 어쩌면 저와 닮은 모습에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끼는 부하였다. 그런 것을 알고 있던지 평소 말이 없을 뿐 저에게 말을 거는 것을 어려워하지는 않았던 승철이었는데, 오늘은 제 앞에서 머뭇대는 것이 여간 이상하지 않다. “무슨 일이야.”“…….”“박승철.”“잠깐 시간 있으십니까. 개인적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슙민/국뷔] 인어공주 이야기 17. 상태가 안정됨에 따라 일반 병실로 옮겨진 지민은 도통 깨어날 줄 몰랐다. 깨어나서 잘 먹고 잘 쉬어야 상처도 하루빨리 아문다고 했는데, 매일매일 잠만 자는 지민은 그저 말라만 갔다. 그걸 매일매일 와서 오늘은 깨어날 거라는 희망고문에 시달리다 돌아가는 정국도 점점 수척해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푸석해진 얼굴로 밤늦게 돌아가려는 정국을 붙든 건 석진이었다. “이봐요, 전정국 씨.”“…뭡니까.” 피곤에 찌든 정국의 얼굴이 석진을 바라본다. 석진이 붙든 게 꽤나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석진은 그런 정국의 표정을 무시한 채 제 할 말을 이어나간다. “요즘 잠은 좀 자요?”“네, 잡니다.”“근데 얼굴이 왜 그래요. 밥은 먹어요?”“…….”“일도 안 하고 이렇게 병원에만 있..
[슙민/국뷔] 인어공주 이야기 16. 몸이 어느 정도 낫자 태형은 다시 회사로 복귀했다. 아직 몸이 욱신거리는 건 있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맞아본 것도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몸을 추스르고 언제나처럼 이사실로 올라가 그의 사무실 문을 두드리려는데, 갑자기 비서가 다가와 자신을 황급히 말린다. 태형은 영문을 몰라 곤란한 얼굴로 제 행동을 막는 비서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일입니까.”“그게…, 저기….”“…말씀하세요.”“이사님께서 말씀이 있으셔서요….”“네.” 태형은 비서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렸던 비서에게서 들려온 말은 태형의 심장을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이사님께서 실장님은… 앞으로 사무실에 들이실 일 없을 거라고….” 태형에게 미안한 듯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