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국슙장편 (53)
외딴 섬 같은 나도
[국슙] DADDY 13.w.몽블랑 * 도로를 달리던 윤기의 차가 도로변에 급하게 멈춰섰다. 방향등 표시도 없이 차로를 바꾸고 길 한 쪽에 급하게 서고 나서야 주의등을 켜자 지나가는 차들에게서 곱지 않은 시선과 말들이 날아왔지만 윤기는 그대로 핸들에 팔을 대고 이마를 묻었다. 쓰러졌다고 했다. 그렇게 건강했던 정국이, 쓰러졌다고. 태형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른다. 이런 기분은 정국이 어렸을 때 한밤중에 고열을 냈던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보건실에 창백한 얼굴로 정신을 잃은 채 누워있던 정국을 보고 윤기는 혼이 나갈 뻔 했다. 마치 정국이 큰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주저앉을 뻔했다. 별 문제는 없다는 말과, 만약을 위해 그래도 진찰을 받아보시라는 보건교사의 말이 없었다면 아마 윤기는 분명 ..
[국슙] DADDY 12.w.몽블랑 * 결국 윤기는 정국의 삼촌의 집에서 정국의 짐을 모두 가져왔다. 정국의 짐을 가져간다고 미리 얘기를 해두었는데도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주인 대신 기다리고 있었다며 관리인이 문을 열어주는 집으로 들어가며 윤기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정국도, 이런 일을 겪었을까. 방 한 구석에서 창고처럼 쌓여있는 정국의 짐들처럼, 그렇게 이 집 한 구석에서 ‘버려진’ 시간들을 버텼을까. 윤기는 무거워진 마음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윤기의 집으로 돌아온 정국은 예전과 같았다. 아니, 예전과 달랐다. 사실 윤기는 같은지 다른지 알 수가 없었다. 정국은 웃었다. 밝았다. 항상. 정국을 평소 어두운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건 아니었지만, 항상 밝기만한 정국은 윤기에게 묘한 ..
[국슙] DADDY 11.w.몽블랑 * 윤기는 모니터를 응시하면서도 핸드폰을 힐끔거렸다. 일을 하는 도중에도 자꾸 핸드폰에 시선이 가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벌써 정국이 그 집으로 간 지 한 달이 넘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전화가 없다는 건 정말이지 이상했다. 누구든 한 번쯤은 전화를 해야 맞는 거 아닌가. 정국의 삼촌이든, 정국이든. 핸드폰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굴리던 윤기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 쪽에서라도 전화를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 “…지금 뭐라고 말씀….”- 걔 가출했다고요. 벌써 집에 안 들어온 지 꽤 됐어요. 지금 짐도 다 우리 집에 있는데 치우지도 못하고 나 참.“혹시 학교는,”- 아, 끊으세요. 걔만 생각하면 골치 아프니까.“그럼 정국이가 갈 만 한 데라도,”- 몰라요. ..
[국슙] DADDY 10.w.몽블랑 *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제 구두가 보이질 않았다. 윤기가 사준 것 중 정국이 간직하려고 하는 물건 자체가 몇 개 없어서 더 눈에 잘 틔었다. 제 방을 몇 번이고 뒤졌지만 나오지 않았다. 삼촌과 숙모에게 없어진 물건이 있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말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 짚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도 말할 수가 없었다. 마치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집안에 분란을 일으키려는 사람 같아서, 정국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며칠 후엔 돌려주지 않을까 생각하며 기다렸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구두는 제 방에 돌아오지 않았다. 사촌들은 그날 이후로 정국과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그건 삼촌과 숙모도 그러했는데, 자신들이 정국을 불편해하는 건지, 아니면 정국이 자신들을 불편해 할..
[국슙] DADDY 09.w.몽블랑 * 별로 원한 것이 없었다. 바란 것도 없었다. 그저 머릿속 한 구석에서 막연하게, 정국이는 예쁘고 바른 사람이 되겠지,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처럼, 하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윤기는 정국이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점점 그를 닮아가고 있는 모습까지도 윤기의 막연한 바람과 같았다. 그래서 이건 전혀 아니었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고백이라니. ‘좋아해요.’ 그저 윤기는 다시 제대로 정국과 이야기해 보고 싶던 것이었다. 정국의 ‘엄마’의 빈자리에 대해. 그리고 지난 번 정국이 남긴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에 대해. 그러나 윤기가 말을 꺼내자마자 답답함을 이길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국은 좋아한다 말했고, 말을 입 밖으로 낸 순간 정국의 표..
[국슙] DADDY 08.w.몽블랑 * 정국이 초등학교 다닐 때쯤, 학교에서 온 전화를 받고 앞뒤 없이 학교로 달려갔던 어느 날이었다. 윤기가 교무실 문을 열고 맨 처음 마주한 건 담임 교사와 부장 교사, 그리고 모르는 아이와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 그리고 정국이었다. 두 아이 모두 얼굴에 꽤나 생채기가 나 있었다. 저도 모르게 정국의 상처에만 눈이 가는 제 자신을 다잡으며 윤기는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고 말했었다. 담임 교사는 아이 둘이 싸웠다며, 이 아이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는데, 정국은 그게 아니라고 했다고 했다. 그래서 정국에게 그럼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정국이 갑자기 입을 꾹 다물더란다. 몇 번을 물어도 입을 열지 않아 ‘선생님한테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선생님이 정국이가 억울한 곳이 ..
[국슙] DADDY 07.w.몽블랑 * 어제 퇴근 직전, 회사에서 다른 부서의 여직원에게 고백을 받은 윤기는 퇴근길 내내 거절의 말을 생각했다. 부서가 멀어 얼굴을 자주 마주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마주치지 않는 사람은 아니니 적당한 거절이 필요했다. 상처받지 않도록, 자존심 상하지 않게, 에둘러 표현할 수 있는 그런 말. 그러다 문득 윤기는 제가 습관적으로 사람을 거절하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 제 자신이야 성적 지향성이 다수와 달랐으니 거절하고 있다지만, 정국에겐 엄마가 필요할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그런 티를 조금도 내지 않았던 정국이지만, 속이 깊은 구석이 있는 아이이니 윤기에게는 말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정국도 엄마를 원했던 순간이 있었지 않았을까. 이 간단한 것을 조금도 ..
[국슙] DADDY 06.w.몽블랑 * 태형을 발견한 지민은 흠칫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태형은 지민에게 눈길을 주기 보다는 지민의 어머니께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어, 태형아. 왔니?”“네, 저기….” 뭐라 말을 해야 하는데 태형이 머뭇거리자 지민이 먼저 엄마의 등을 살짝 밀었다. “엄마, 나 태형이랑 얘기 좀 하다 들어갈게.”“응? 들어가서 얘기하지 왜.”“아니야, 오늘은….” 지민도 말을 흐렸고 지민과 태형 사이에서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지민의 어머니는 ‘그래. 늦지 않게 들어오고.’ 하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지민의 어머니가 들어가길 기다린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땅을 보고 있던 태형이 고개를 들었다. “놀이터로 가서 얘기해.” 그 말에 지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앞서 가는 태형..
[국슙] DADDY 05.w.몽블랑 * 「몸 괜찮아?」「머리 안 아프냐」「난 미치겠어」「(이모티콘)」 아침부터 석진에게서 온 메시지를 밀린 일로 점심시간이 지나고서야 확인한 윤기가 입가에 미소를 띤다. 석진이 첨부한 이모티콘이 귀여움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이모티콘의 결제 방법조차 모르는 윤기는 막연히 석진이 이런 것들을 어디서 받았나보다 생각했다.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이모티콘을 보며 석진에게 잘 어울린다고도 생각했다. 「나도 아침에 아팠어」「두통약 사 먹었어」 아침에 숙취가 덜 깼을 그 시점을 생각하니 오늘 아침 일이 떠오르며 또 정국이 떠올랐다. 한숨부터 나오는 일에 윤기는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요 근래 석진과 너무 술을 마셨나. 집에 늦게 들어가는 일이 잦았나. 그러고 보니 좀 그런 것도 같..
[국슙] DADDY 04.w.몽블랑 * “대디.”“응?”“어제 그 아저씬 누구예요?” 아침을 먹던 정국이 갑자기 묻는 말에 윤기가 숟가락을 들다 말고 가만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내 친구.”“무슨 친군데요?”“그냥, 동창. 거래처 대표로 만났어.”“아….” 그러고 한참 시리얼을 퍼먹던 정국이 갑자기 먹는 걸 멈추더니 또 물었다. “요즘 왜 자꾸 늦게 들어와요?” 정국의 질문에 윤기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정국이 이런 걸 아침 댓바람부터 묻는 이유를 모르겠다. 정국은 눈을 맞추지 않고 제 시리얼 그릇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였다. 눈도 맞추지 않고 다짜고짜 따지는 듯한 정국의 말투에 윤기는 조금 기분이 상했다. “가끔 친구 만나서 술 먹는 게… 뭐가 잘못된 건가?”“가끔이 너무 자주인 것 같아요.”“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