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국슙 (67)
외딴 섬 같은 나도
[국슙] DADDY 37.w.몽블랑 * 이른 아침이었다. 여린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가볍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윤기 형인가? 하며 호석이 잽싸게 나섰다. 그런 호석의 손을 붙든 건 남준이었다. “조심하자니까. 아직 모르잖아.”“아냐, 아닐 리가 없어.” 호석은 전날 봤던 어린 남자를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남준은 그런 호석이 걱정스러웠다. 남준이라고 그를 아예 믿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반신반의에 가까웠고, 그보다는 그가 정국이길 바라는 것에 더 가까웠다. 그는 그간 지켜봐왔던 윤기를 보듬어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기에. 남준은 호석의 손을 잡은 채 그를 등 뒤로 하고 대문을 열었다. 그리고 대문 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사람들에 한숨을 내쉰 남준이 놀란 숨을 집어삼킨 호석..
[국슙] DADDY 36.w.몽블랑 * 새벽녘에 윤기는 문득 눈을 떴다. 침대 옆이 비어 있어 벌떡 일어났던 윤기는 이내 멍해졌다. 옆자리엔 누군가 있던 흔적조차 없었다. 어제의 그 모든 일이, 결국 꿈이었나보다. 너무나 간절해서 환각에 가까운 걸 봤을지도 모른다. 하긴 저도 모르게 정신이 들면 맨발로 몇 시간씩 마당을 헤매고 있을 때가 많았으니, 이젠 병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제 정국의 꿈을 꾼 건, 이제 견딜 수 없어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즈음, 제 생명이 귀한 줄 아는 머릿속이 죽고 싶지 않다고 보내는 마지막 발악일지도 몰랐다. 이렇게라도 정국을 보고, 조금 더 살아있으라고. …깨고 나면 더 살고 싶지 않을 줄도 모르고. 멍청하게. 그때 정국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굴..
[국슙] DADDY 35.w.몽블랑 * 호석과 남준이 대문 밖으로 멀리도, 빨리도 갈 필요가 없었다. 정국이 문 앞에 대어뒀던 차는 그대로였고 정국은 그 차에 타지도 않고 있었다. 단지 정국은, 대문 앞 한 구석에 고개를 숙인 채 쭈그려 앉아있었다. “…정국 씨.” 호석이 부른 자신의 이름에 정국이 고개를 들었다. “…정국 씨….” 정국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었다. 호석이 안쓰럽게 정국의 이름을 부르자 더 서럽기라도 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린 정국은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흐트러지고 젖은 숨소리와 간헐적으로 들썩이는 등이 정국의 울음이 그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호석은 정국의 옆에 쭈그려 앉아 가만가만 그의 등을 토닥였다. 호석을 말리려던 남준도 차마 그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정국은 그렇게 한참동안을 서럽..
[국슙] DADDY 34.w.몽블랑 * - 정국아, 저기… 윤기 씨에 대한 건 뭐 좀 찾았니?“…아니요. 뭐가… 더 찾을 것도 안 나와요.”- 저런…. 힘들겠네, 우리 정국이.“…아니에요.”- 아니기는, 목소리가 풀이 죽었는데. 제주도 거기 갔던 곳에는 아직 집 주인 안 돌아왔대?“편지 남기고 왔었는데, 아직 연락 없었어요.”- 정국아, 여행이라도 가보면 어떨까. 몇 개월째 윤기 씨 찾는 일에만 매달리고 있잖니. 그러면 사람이 지친단다. 언제까지 찾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벌써부터 지쳐 나가떨어지면 곤란하지. 그렇지 않아?“…여행이요….” * 분명 여행이라고 이모에게 말은 했지만, 정국은 결국 제주도로 와 버렸다. 벌써 몇 번째 제주도행인지 몰랐다. 그곳에서 잃었기에 그곳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마치 잃..
[국슙] DADDY 33.w.몽블랑 * “내가 오늘 보자고 한 건, 그때… 윤기 결혼식 날에 퀵으로 왔던 게 유서만이 아니라서야.” 석진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이 놀라울 법도 한데, 정국의 눈은 고요했다. 그간 많은 기대를 했고 많은 좌절을 했기에 정국은 더 이상 그 어떤 것에도 많은 기대를 걸지 않게 되었다. 기대를 해봤자 돌아오는 건 그만한 상실감이었다. 윤기를 찾을 수 없다는 그 혹한과도 같은 서러움이었다. 정국은 무너지는 기대를 더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뭐가 더 있었나요, 하는 정국의 목소리의 차분함에, 석진도 태형도 표현하진 않았지만 놀라웠다. 그리고 곧 정국이 어떻게 저렇게 변했는지를 알 수 있었기에 안쓰러워졌다. “별 건 아닌데, 나한테 보낸 편지가 있었어.”“…….”“그리고 거기엔 너에 대..
[국슙] DADDY 32.w.몽블랑 * 정국의 울음이 가까스로 그쳤다. 그녀는 정국이 우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누군가 대충 이야기해주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정국은 자신의 눈물의 이유를 스스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닮은 그녀 앞에서 무거운 고백을 하는 건, 정국에게 있어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이모…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정국은 윤기와 있던 일에 대해 조곤조곤 털어놓았다. 자신이 윤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윤기와 어떤 관계였는지, 지금 윤기에 대한 마음이 어떠한지. 그녀는 정국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하는 정국은 어쩐지 계속해서 죄스러워졌다. 제 마음의 짐을 다른 사람에게도 지우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제가 윤기에..
[국슙] DADDY 31.w.몽블랑 * 눈이 부셔 눈을 떴다. 인기척이 없는 방안에 대디…? 하고 부른 정국은 옆자리를 확인한다. 손에 닿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정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마. 이렇게 자신을 버리고 가버렸다. 한마디 말도 없이, 약까지 먹여 재워놓고, 윤기는 또 자신의 결혼을 위해 떠나버렸다. 지난 일주일을 꿈처럼 만들어 놓고. 그걸로 평생 자신을 그리워하라는 듯한 조롱으로까지 느껴졌다.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이제 뵈는 게 없다는 말이 딱 맞았다. 시계를 확인하니 빠르게 준비하면 윤기의 식장에 어쩌면, 도착할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뭘 할 수 있을까, 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가서 뭐라도 해야 했다. 하다못해 깽판이라도 쳐야 했다. 아니면 윤기를 납치해 도망이라도 치든..
[국슙] DADDY 30.w.몽블랑 * “대디 정말 청소 그렇게 할 거에요?” 청소기를 돌리던 정국이 결국 잔소리를 한다. 정국의 눈치를 보며 어슬렁어슬렁 물건의 자리만 옮기던 윤기가 결국 끄응, 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깨끗한데 청소하자 그러니까 그렇잖아.”“쌓여있는 먼지 좀 봐요. 이거 다 대디랑 내가 마시는 거라고요. 이거 날리는 먼지 안 보여요?” 정국은 햇빛을 반사하며 공중에 부유하는 먼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나 정작 윤기는 보지도 않고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아아… 몰라. 귀찮아. 자리에 누워버리는 윤기는 이미 정국에게 익숙했다. 저렇게 누워서는 몇 시간을 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안 되지. 정색을 한 정국이 청소기 주둥이로 윤기의 옆구리와 허리를 꾹꾹 찔렀다. 윤기는 피..
[국슙] DADDY 29.w. 몽블랑 * 아침부터 정국의 집에 쳐들어 왔다. 누가? 윤기가. 잠에 취한 정국은 비몽사몽간에 등을 떠밀려 씻으러 들어갔다. 그리고는 거울 앞에 서서 멍하니 생각했다. 모든 게 다, 꿈인가. 대디에 대한 모든 게…. 나는 아직… 학교를 가야 하는 고등학생이었나…. …아, 그랬나 보다. 이제 학교 갈 시간인가보다. 잠결에 모든 것을 합리화한 정국이 씻기 시작했고 얼굴에 물을 몇 번 묻히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화장실은 대디네 집이 아닌데?! “여긴 우리 집이잖아요!” 씻다가 뛰쳐나와 소리부터 지르는 정국에 소파에 앉아 있던 윤기가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그래서. 뭐.”“여긴 우리 집이라고요!”“…어, 나도 알아. 그래서 어쩌라고.”“……?”“빨리 씻고 나와. 나가자.”..
[국슙] DADDY 28.w.몽블랑 * 응급실로 이송된 지민은 신속하게 수술실로 실려 들어갔다. 태형은 지민의 침대를 따라 무아지경으로 뛰다가 수술실 앞에서 간호사들에 의해 가로막혔다. 여기서부터는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 태형의 시선은 지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창백한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침대의 움직임에 따라 덜컹이며 흔들리는 그 모습이,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버린 그 얼굴이,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촛불처럼 연약하기 그지없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이렇게 약했다. 지금까지 왜 잊고 있었을까. 어떻게 잊고 있었을까. 그래서 곁에 있었고 그래서 마음도 커졌었고, 그래서… 좋아했었는데. 지켜주지 못했다. 복도에 마련된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태형에겐 마치 모든 것이 제 책임인 것 같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