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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 섬 같은 나도
[국슙] DADDY 07.w.몽블랑 * 어제 퇴근 직전, 회사에서 다른 부서의 여직원에게 고백을 받은 윤기는 퇴근길 내내 거절의 말을 생각했다. 부서가 멀어 얼굴을 자주 마주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마주치지 않는 사람은 아니니 적당한 거절이 필요했다. 상처받지 않도록, 자존심 상하지 않게, 에둘러 표현할 수 있는 그런 말. 그러다 문득 윤기는 제가 습관적으로 사람을 거절하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 제 자신이야 성적 지향성이 다수와 달랐으니 거절하고 있다지만, 정국에겐 엄마가 필요할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그런 티를 조금도 내지 않았던 정국이지만, 속이 깊은 구석이 있는 아이이니 윤기에게는 말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정국도 엄마를 원했던 순간이 있었지 않았을까. 이 간단한 것을 조금도 ..
[국슙] DADDY 06.w.몽블랑 * 태형을 발견한 지민은 흠칫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태형은 지민에게 눈길을 주기 보다는 지민의 어머니께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어, 태형아. 왔니?”“네, 저기….” 뭐라 말을 해야 하는데 태형이 머뭇거리자 지민이 먼저 엄마의 등을 살짝 밀었다. “엄마, 나 태형이랑 얘기 좀 하다 들어갈게.”“응? 들어가서 얘기하지 왜.”“아니야, 오늘은….” 지민도 말을 흐렸고 지민과 태형 사이에서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지민의 어머니는 ‘그래. 늦지 않게 들어오고.’ 하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지민의 어머니가 들어가길 기다린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땅을 보고 있던 태형이 고개를 들었다. “놀이터로 가서 얘기해.” 그 말에 지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앞서 가는 태형..
[국슙] DADDY 05.w.몽블랑 * 「몸 괜찮아?」「머리 안 아프냐」「난 미치겠어」「(이모티콘)」 아침부터 석진에게서 온 메시지를 밀린 일로 점심시간이 지나고서야 확인한 윤기가 입가에 미소를 띤다. 석진이 첨부한 이모티콘이 귀여움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이모티콘의 결제 방법조차 모르는 윤기는 막연히 석진이 이런 것들을 어디서 받았나보다 생각했다.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이모티콘을 보며 석진에게 잘 어울린다고도 생각했다. 「나도 아침에 아팠어」「두통약 사 먹었어」 아침에 숙취가 덜 깼을 그 시점을 생각하니 오늘 아침 일이 떠오르며 또 정국이 떠올랐다. 한숨부터 나오는 일에 윤기는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요 근래 석진과 너무 술을 마셨나. 집에 늦게 들어가는 일이 잦았나. 그러고 보니 좀 그런 것도 같..
[국슙] DADDY 04.w.몽블랑 * “대디.”“응?”“어제 그 아저씬 누구예요?” 아침을 먹던 정국이 갑자기 묻는 말에 윤기가 숟가락을 들다 말고 가만히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내 친구.”“무슨 친군데요?”“그냥, 동창. 거래처 대표로 만났어.”“아….” 그러고 한참 시리얼을 퍼먹던 정국이 갑자기 먹는 걸 멈추더니 또 물었다. “요즘 왜 자꾸 늦게 들어와요?” 정국의 질문에 윤기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정국이 이런 걸 아침 댓바람부터 묻는 이유를 모르겠다. 정국은 눈을 맞추지 않고 제 시리얼 그릇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였다. 눈도 맞추지 않고 다짜고짜 따지는 듯한 정국의 말투에 윤기는 조금 기분이 상했다. “가끔 친구 만나서 술 먹는 게… 뭐가 잘못된 건가?”“가끔이 너무 자주인 것 같아요.”“이제..
[국슙] DADDY 03.w. 몽블랑 * 전정국 18세, 민윤기 30세. 새벽 6시 29분. 여름이 다가와 해가 뜨는 시간이 일러져 집안은 이미 환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돌아다니지 않아 아직 고요했다. 초침 가는 소리가 몇 번 더 들렸을 즈음, 두 개의 방에서 서로 울리는 알람 소리가 집안의 적막을 깨웠다. 알람이 울리자마자 눈을 뜬 윤기가 인상을 찌푸린 채 알람을 껐다. 잠이 덜 깨어 입술이 조금 나온 채로 윤기는 일어나 앉아 잠시 멍을 때리다 이내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섰다. 얼굴엔 아직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은 채 비틀대며 걸었다. 조금 열려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열심히 울리고 있는 알람과 침대 위 이불과 엉켜 꿈쩍도 않는 정국이 있었다. 핸드폰은 소리가 작다기에 사줬던 알람..
[국슙] DADDY 02.w.몽블랑 * 전정국 15세, 민윤기 27세. 아이는 잘 자랐다. 또래들보다 빨리 크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픈 곳 없이, 씩씩하게도 자랐다. 그런 점에 있어 윤기는 정국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윤기는 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아버지의 의사에 맞추어 회사의 경영 수업에 들어갔다. 그로 인해 많이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 말하면 정국은 ‘대디 바빠서 그렇잖아요. 괜찮아요.’ 하고 말했다. 정국은 절대로 어리광을 부리지 않았다. 그건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래서 윤기는 그게 정국의 성격인 줄 알았다. 조용한 아이라고. 어른스러운 아이라고. 장하게도. 아이에게도 변성기가 찾아왔다. 목이 불편하다 하던 아이는 하루 이틀쯤 감기약을 사다 먹는 것 같은데도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어린 아이의 목소..
DADDY 01.w.몽블랑 평소와 같은 평범한 전화였다. 아니, 평소라면 조금 달랐을 지도 모르겠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던 자신이 평범한 지역번호가 찍히는 전화를 굳이 받아든 것은, 사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에서 ‘그’가 사고를 당했다며 말해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윤기는 와달라는 병원 관계자의 말에 현실감 없는 목소리로 그러겠다 대답했다. 분명 현실 같지 않은데, 제 손은 무엇을 아는지 심하게 떨려왔다. * “네가 왜?” ‘그’의 형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이상하지도 않을 일이다. 그의 형은 항상 그와 윤기의 사이를 의심해왔다. 어떻게 보면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도 눈치 채지 못한 그 마음을 눈치 챈 유일한 사람. 희한하게도 감이 좋았다..